36. 사사 (4)
[퍼스트 블러드!]
> 뭐냐
> 와 뭔데 ㅋㅋㅋㅋ
> 어케한 거임???
[▶리플레이]
의문이 가득한 채팅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순간 바로 화면이 전환되고 리플레이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박!
화면에 있는 라온이 뿜어내는 무수한 고치덩어리들을 향해 달려드는 토끼가면의 모습이 화면에 비춰졌다.
달려들던 토끼가면의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BJ천마가 자주 보여주는 회피 무빙과 매우 닮아 있는 움직임이다.
그 움직임이 빚어내는 결과물은 놀라웠다.
파바바바박!
종이 한 장 차이로 고치 탄환들이 토끼가면의 몸을 스쳐지나갔다.
원래라면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고치 탄환」을 눈으로 보면서 피해낸 것이다.
> 와 무빙 뭐고
> 미쳤는데?
> 저것이···천마군림보?
“천마군림보는 무슨.”
단천이 불편해하거나 말거나 채팅창은 토끼가면의 무빙에 홀려 있었다. 실제로 BJ천마도 보여줄 수 있는 움직임이었지만 BJ천마는 글자 그대로 천외천의 인간.
하지만 토끼가면은 다르다. 최상위권이기는 하지만 일반인 중에서 최상위권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가 BJ천마만이 할 수 있는 무빙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와. 말도 안 되네.”
“저런 무빙을 사람이 할 수 있는 거였구나.”
“본좌는 눈 감고도 피할 수 있는 탄환 속도였다만.”
“저런 무빙을 사람이 할 수 있는 거였구나.”
자신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제로콜에게 화가 났지만. 단천은 너그럽게 용서하기로 했다.
“저런 무빙같은 거 사람이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한계라는 것은 그렇기에 우스운 것이다.”
인간은 주변의 환경에 따라 스스로를 규정한다. 주변 사람들을 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규정하며.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그 영향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BJ천마와의 일기토는 이러한 무의식을 서서히 찢어발기기에 충분했다.
“인간을 죽일 정도로 강한 고통은 인간을 강하게 만드는 법이지.”
“그거. 인간을 죽이지 못하는 고통 아니야?”
“인간을 죽이지 못하는 고통 따위가 어떻게 인간을 강하게 만드나. 안 죽는다는 걸 아는데 강해질 리가 없는데.”
“······.”
“자고로 사람이 강해지려면 언제나 황천길에 발을 한 발은 디뎌야만 하는 법이다.”
‘말을 말아야지.’
아무튼. 토끼가면의 실력은 그 자신의 실력보다도 훨씬 더 많이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거기에 여기 있는 네 명의 몸에는 서서히 내단이 자리잡기 시작했으니 더더욱.
“살아남았다아아아아!”
토끼가면이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당당히 치켜세웠다. 살아남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승리의 포즈였다.
“발판 엄청 써 놓고 저렇게 당당하네.”
“양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물론 천마신교 안에서의 분위기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지만.
***
이어진 2경기, 3경기도 이변의 연속이었다. 정유채도, 풀창고도 상대를 이기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네 번째 전투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떨어져! 떨어지란 말이다아아!”
“안 돼! 안 돼애애애애! 죽고싶지 않아! 죽고싶지 않다고오오!”
네 번째 순서인 제로콜이 상대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채 매달려 있는 상태.
[발판이 떨어집니다!]
[블라인더가 처치되었습니다.]
[제로콜이 처칭되었습니다.]
발판이 떨어져내리며 두 명이 동시에 게임 오버를 당했다.
“무승부네.”
“무승부는 어떻게 되는 거지?”
“무승부가 아니라 제로콜의 승리다.”
“왜?”
“먼저 죽은 쪽이 블라인더니까.”
거의 0.1초 차이기는 하지만. 승부는 승부다. 단천은 이런 승부까지 뒤집어가면서 수련을 시키는 악한이 아니었다.
[으흑흑. 흑흑··· 엄마··· 나 살았어···.]
관전자 모드가 된 제로콜의 혼령이 기쁨의 눈물을 훔쳐냈다. 살아남은 것을 기뻐하는 혼령이라니. 복잡미묘한 존재이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4연속으로 레인보우 셔벗 팀 선수들이 처치됩니다!]
[아! 정말 이변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네요!]
> ㄹㅇ
> 아니 대체 뭔 훈련을 했길래 실력이 저렇게 되는 거임???
물론 승패를 따진다면 팀 천마신교가 우위에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은 실로 파괴적인 BJ천마의 컨트롤에 힘입어서 승리할 것이라는 추측이었지, 이런 방식으로 일방적으로 게임이 굴러갈 것이라는 추측은 아니었다.
그런데. 실제로 벌어진 결과는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것이었다.
BJ천마가 아직 나서지도 않았는데 레인보우 셔벗에 남은 사람은 팀장인 셔벗뿐인 것이다.
> 게임 끝났네 ㅋㅋㅋㅋ
> ㅇㅈ ㅋㅋㅋㅋㅋ
“미안하다.”
“죄송합니다.”
“아뇨. 딱히 사과하실 것 없어요.”
셔벗은 팀원들의 사과에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승산은 그리 높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이어지는 5경기에서 그래도 나름대로 유종의 미를 거둔다. 그 생각뿐이었다.
[5경기 대진이 완성되었습니다.]
[BJ천마 vs 셔벗]
탁!
셔벗이 얼마 남지 않은 바닥에 사뿐하게 착지했다. 그녀가 플레이하고 있는 캐릭터는 「성기사 레나타」다. 중거리에서 한 번에 치고들어가서 상대를 일격에 죽이는 데 특화돼 있는 세미탱커 캐릭터.
원래의 상성대로라면 BJ천마가 플레이하는 「야수도 박정」에게 극상성인 캐릭터였지만.
고오오오오.
“히이익.”
저 피어나오는 오라를 보건데 전혀 이길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호랑이라도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것도 동물원에 갔을 때 봤던 흐리멍덩한 호랑이의 눈동자가 아니라 정말로 산을 지배하는 산군山君인 호랑이.
셔벗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츠렸다.
‘쯧.’
단천은 눈부터 피하는 셔벗을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찼다. 이런 종류의 무인들을 많이 만나왔다. 가지고 있는 재능도 있고 노력은 하지만 낯을 가리는 종류의 무인.
왜인지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프로게이머로 게임 생활을 시작했을 터다. 그리고 프로게이머라면 자연스럽게 수많은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되기 마련이다.
처음 나온 게이머에게 처음 나왔으니 좀 못해도 봐 준다고 할 정도로 세상은 만만한 것이 아니다.
‘아마 그런 반응들을 보며 수없이 깎여왔겠지.’
중원이었다면 상황이 조금은 더 나았을 터다. 사부가 있고, 사문이 있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든든하게 파도를 막아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21세기는 그렇지 않다.
‘이런 점은 아쉽단 말이지.’
부상의 위협이 적게 수련을 할 수 있는 것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무武를 가볍게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이상적이다.
하지만 무를 만들어가는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음가짐’을 만들어가는 데에 21세기는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도 저렇게 쫄아붙어 있는 인간이 나오는 것이다.
단천은 박도를 움켜쥐었다.
“삼 초를 양보해 주지.”
“3초나요?”
“3초가 아니라 삼 초.”
뭐가 다른 건지 셔벗이 물어보려고 했지만 단천의 눈에 쫄아붙은 셔벗은 질문을 하지 못했다.
어찌됐거나 봐 준다고 하니 자신 입장에서는 잘 된 일이다. 셔벗은 자신이 가장 자신있어하는 무기인 레이피어를 든 채 BJ천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백색 제비]
날카롭기 그지없는 검격이 BJ천마의 몸을 향해 꽂혀들었다. 막아내기 어려운 위치에 꽂혀든 일격이었지만 단천은 파리라도 쳐 내는 것처럼 가볍게 셔벗의 공격을 쳐냈다.
하지만, 레이피어는 가볍기 그지없는 무기. 한 번의 공격이 실패한다고 해도 자세를 바로잡을 필요도 없이 바로 다음 공격을 이어나갈 수 있다.
[백색 제비]
3연타의 백색 제비중 2번째의 검격이 다시금 밀려들었다.
평범한 사람, 아니. 프로라고 해도 일격을 허용했을 것이 분명한 일격.
하지만 셔벗이 마주하고 있는 상대는 고작 프로게이머 따위가 아니었다.
카앙!
레이피어를 되튕긴 BJ천마의 검이 이번에는 셔벗을 향해 쏘아졌다.
처억!
검끝이 셔벗의 목에 닿았다. 단천은 검을 거두었다. 아직 삼 초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셔벗은 침을 삼켰다. 어마어마할 정도의 격차다. 얼마나 해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격차.
‘못 이기겠어.’
거대한 벽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눈물은 치명적일 정도로 시야를 가린다. 눈물을 닦도록.”
“···안 울었어요.”
셔벗은 소매로 눈물을 닦아낸 다음 다시 검을 잡았다. 그래도 최소한 ‘좋은 결말’은 맞이해야만 했다. 부끄럽지 않은 패배는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셔벗의 귀에 들려왔다.
“고작 잘 지는 게 목표인가?”
“네?”
“처음 탑에 섰을 때. 무슨 생각으로 탑에 왔었지?”
“···처음 섰을 때?”
셔벗은 처음 탑에 섰을 때를 떠올렸다. 레이피어를 들고 탑에 왔을 때의 마음가짐.
내가 최고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
내 앞에 있는 누구라도 나는 이길 것이다.
그녀도 처음 탑에 섰을 때는 전형적인 탑신병자였다.
“······근데. 생각이랑 실제는 다르잖아요.”
“뭐가 다르지?”
“결국 탑에 두 명이면 한 명은 져요. 천마님이랑 다르게 누구나 언젠가는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고요.”
“한 번의 패배가. 네가 약하다는 증거가 되나?”
“···그건 아니지만요. 세상에는 제가 최강이 아니라는 증거가 넘쳐난다고요.”
“무시해. 그딴 거.”
단천의 말은 단호했다. 그리고 확연했다. 타인의 의견이라고는 전혀 듣지 않는 독불장군의 모습.
그리고,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지는 ‘탑’의 모습이었다.
“그런 걸 무시할 수 있어요?”
“해. 하면 돼. 언제나 처음의 마음을 떠올리면 된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너는 왜 탑에 왔지?”
셔벗은 다시금 처음 탑에 섰을 때의 마음가짐을 떠올렸다.
“최강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셔벗의 레이피어가 BJ천마를 향해 날아들었다.
얼핏 보기에는 이전과 다름없는 일격이었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매섭기도, 그 안에 담겨 있는 묘리도. 이전과는 비할 바가 없다.
‘돈오 직전의 상태로군.’
무인에게 평생 한두 번 찾아올까말까한 무아지경의 상태.
단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카각! 카가각! 검이 얽히고 섥힐 때마다 눈에 보일 정도로 실력이 성장한다.
다음 단계로,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단천의 검이 셔벗의 검을 유도하듯이 막고, 춤추고, 어우러졌다.
캉! 캉! 캉!
> 와
> 뭐냐
> 셔벗 저거 원래 저렇게 잘하는 프로였음?
> ㄴㄴㄴ 걍 연습실에서나 좀 잘 한다는 소리 나오지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동시에 채팅창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 BJ천마랑 거의 맞수 되는 것 같은데??
> ㅇㅈ;;
물론 지금의 BJ천마가 전력을 다한다면 셔벗을 일격에 제압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단천은 한창 자라나고 있는 열매를 따먹을 정도로 멍청한 인간이 아니었다.
지금 해야 할 것은 최선을 다해서 셔벗의 검을 다음 단계로 인도하는 것.
캉! 캉! 카아앙!
검격이 어우러지며 무수히 많은 불꽃이 튀어올랐다.
후대에 2대 탑의 신. 그리고 진성 탑신병자중의 탑신병자라고 불리는 ‘셔벗’의 검이 완성되어 나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