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사사 (3)
[첫 번째 도전자가 출전합니다.]
> ㄷㄱㄷㄱㄷㄱ
> 개긴장됨
> 뭔 긴장이야 어차피 천마님이 다 후둘겨팰건데
> 천마빠 새끼들 지치지도 않네; 인간적으로 힐도 안 되는 격투장에서 혼자 5명 상대를 어케함
> 팩트) BJ천마는 한다
> BJ천마 보지도 않은 유입 티내네 ㅋㅋㅋㅋ
“오. 그래도 천공 격투장은 채팅창은 볼 수 있군.”
“아무래도 참여하지 않은 선수들은 게임에 관여를 못 하니까 풀어 준 거겠지.”
[천마신교 출전자 : 토끼가면]
[레인보우 셔벗 출전자 : 라온]
천마신교에서 처음으로 나선 것은 서포터 포지션인 토끼가면이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나온 것은 정글러 포지션인 플레이어 ‘라온’이었다.
> 상성은 좀 받아주네
‘이게 진짜 되네.’
상대편 정글러랑 붙고 싶다고 했더니 진짜로 적 정글러랑 붙게 됐다.
물론 5분의 1 확률이니만큼 그냥 운이 좋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건. 자신이 바라던 상대와 맞붙게 됐다는 것.
“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라온이 꾸벅 인사를 했다. 한수아도 함께 인사를 건냈다.
천공 격투장의 경우에는 스킬이 모두 찍히는 상태인 18레벨부터 시작한다. 그런 까닭에 격렬한 라인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는 상당히 여유롭고 긴장감이 없어보이는 상태가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라온의 캐릭터인 「지배자의 독니 마틸라」는 거미 폼과 인간 폼을 오갈 수 있는 변신형 영웅이다.
강한 대쉬능력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거리를 한 번이라도 주는 순간 큰 데미지를 입고 낭패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은 라온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마탄의 사수 레이나」는 토끼가면이 서포터로 사용은 하고 있지만 엄연히 원거리 딜러 캐릭터다. 원거리 딜러의 후반 폭발력은 어마어마하다.
대쉬를 일순간 잘못해서 공격이 빗나간다면 반대로 죽는 것은 라온 자신이 될 터였다.
서로가 서로를 일순간에 죽일 수 있는 상태.
> 왜케 서로 재냐?
> 그냥 싸우면 안 됨?
물론 이 상황을 알지 못하는 채팅창에서는 불만이 터져나왔지만.
‘게임을 꽤 아는 사람들이라면 결코 지금 상황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지.’
풀창고는 그렇게 생각하며 옆을 바라봤다. 제로콜도, 정유채도 숨을 죽이면서 이 긴장되는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암.”
그런데. 바로 그 옆에서 길다란 하품 소리가 터져나왔다.
“왜이렇게 서로 재냐. 그냥 바로 싸우지.”
“형은 여기서 하품이 나와?”
“아니. 그냥 갖다 박으면 되는 것을 답답하게 시간을 끄는군.”
“그럼 불리해지잖아.”
“불리하면 불리해진 상황에서 싸워서 이기면 될 것 아니냐.”
‘말을 말아야지.’
상대가 참호를 다 파놓고 대기를 하고 있어도 돌격을 할 인간 상대로 대화를 해 보려고 한 것 자체가 무리수였다.
이런 상황이 되는 것은 천공의 제작진들도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한 장치또한 마련되어 있었다.
[바닥이 떨어져내립니다!]
메시지가 뜨자마자 라온과 토끼가면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지직!
라온과 토끼가면이 이전까지 밟고 있던 타일이 부서지며 한없는 땅끝을 향해 추락했다.
천공 격투장에서 전투를 위해서 마련된 장치는 바로 바닥이 점진적으로 부서져내리는 시스템이다.
가만히 있으면 떨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고 시시각각 전투를 할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드는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발판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유리한 것은 원거리 딜러인 토끼가면 쪽이다.
[마탄환]
타타타탕! 격투장에 설치된 지형지물 사이로 토끼가면의 총알이 빗발쳤다.
탄도의 방향은 단순히 체력을 깎아내려는 것이 아닌 접근은 막기 위한 방향으로만 쏠려 있다.
소위 ‘니가와’라고도 불리는 극도의 아웃파이터 스타일.
“어차피 시간만 끌면 내가 유리하단 거지!”
“야! 발판 다 없애지 마! 발판 없으면 우리가 불리하잖아!”
토끼가면을 향해 풀창고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천공 격투장의 발판은 다음 전투에도 이어진다. 격투장이 꽤 넓기는 하지만 발판이 줄어들면 근접 영웅들이 그만큼 불리해지는 것이다.
팀원을 위해서라면 최대한 발판을 적게 써야만 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발판을 소모하지 않고 죽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은 상황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 지금의 ‘천공 격투장’이건만···.
“내 알바야!”
“뭐, 뭐?”
“그딴 건 몰라! 여기서 지면 천마 사부가 나 죽인다고 했다고! 필사적으로 이기고 봐야지!”
“따, 딱히 죽인다곤 안 했어! 지옥훈련을 한다고 했을 뿐이지!”
“똑같은 거잖아!”
말을 내뱉은 토끼가면은 발판을 있는 대로 밟아 가며 계속해서 라온을 향해 사격을 이어나갔다.
와지직! 지지지직!
토끼가면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발판이 삽시간에 줄어나갔지만. 토끼가면은 전혀 상관치 않는 표정이었다.
> ㅋㅋㅋㅋㅋㅋ
> 와 여기서 지면 지옥훈련임?
> 평소 훈련이 지옥훈련 아님?
“평소 훈련은 일반 훈련이다.”
> 그걸로도 죽으려고 하던데??
> 풀창고 얼굴 홀쭉해진 거 봐 ㅋㅋㅋㅋ
> 평소에 수련 받는 풀창고는 그래도 해 볼 만한 거 아니냐?
“그럴 리가. 일반 훈련이 끝나자마자 바로 지옥 훈련을 해야 하는데.”
“···형. 지옥훈련 동안에는 일반훈련은 안 하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일반 훈련은 일반 훈련이고. 지옥 훈련은 지옥 훈련이지.”
“···농담이지?”
풀창고의 물음에도 BJ천마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다. 농담인지 아닌지도 알아차릴 수가 없다.
‘죽는다.’
그냥 일반 훈련으로도 생사를 오가는 고통을 겪는데. 그걸 다 하고서 지옥훈련을 한다고?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스틱스 강을 반쯤 건너갔다 오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 느낌은 남아 있는 제로콜과 정유채도 마찬가지였다.
와직! 와지직!
이 순간에도 바닥에 있는 발판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토끼가면은 전혀 게임을 빨리 끝낼 생각이 없었다. 발판도 충분하니 최대한 상대를 갉아먹고 확실하게 이기겠다는 마음가짐.
이 상태라면 토끼가면이 이겨도 발판이 심각하게 많이 줄어들어 있을 게 확실했다.
남아 있는 세 명의 눈이 한층 더 다급해졌다. 이렇게 된 이상···.
“라온 선수! 빨리 저 악당을 죽여주세요!”
“빨리 죽여! 대쉬하라고!”
“방금 킬각 나왔잖아!”
> ㅋㅋㅋㅋㅋㅋㅋㅋ
> 아니 결승전인데 그래도 같은 편은 응원해야지
“응원이고 뭐고! 지면 죽는다고!”
“죽고싶지 않아! 라온 파이팅!”
“니가와충에게 참교육을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결승전에서 상대편이 빨리 아군을 죽이기를 바라는 진귀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바라보던 라온은 짧게 고개를 흔들었다.
“···팀원들과의 유대가 참으로 돈독하네요.”
“목숨이 걸려 있는 상황이라서. 어쩔 수 없죠. 일단 저라도 살고 봐야지.”
라온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서포터를 바라봤다. 아마추어라고 해서 무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8강과 4강에서 보여준 극강의 라인전은 이미 봐 왔으니까.
방심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무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진입각이 나오지 않는다.
‘거리 조절이 엄청나게 까다로워.’
라온도 여러 프로들을 상대해 왔지만 이 정도로까지 깔끔하게 거리 조절을 하는 프로는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완벽하게 라온의 사거리를 캐치하고 그 안팎을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실력.
“대단하네요. 여기서 안 만났으면 아는 스카우터한테 말해서 프로 제의 했을 정도야.”
[거미 폼]
말을 마치자마자 라온의 몸체가 거미 형상으로 변환됐다.
[고치 탄환]
‘궁극기!’
촤자자작!
라온이 몸에서 수없이 많은 거미줄을 분사해냈다. 사냥꾼의 덫은 거미줄을 맞는 상대에게 이동속도 감소를 부여하는 스킬이다.
한수아의 눈은 자신의 눈 앞에 펼쳐져 있는 탄환의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석적인 대처라면 탄환 몇 발을 맞으면서 거리를 벌리고 슬로우의 지속시간이 끝나는 것을 대기하는 것.
몸에서 뿜어내는 실로 만들어진 탄환의 수가 엄청나게 많은지라 피해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불가능해야 하는데.’
왜인지 보인다. 탄환을 피할 수 있는 경로가. 그저 착각일 뿐인가? 혹은 적의 함정?
‘어떻게 해야 하지?’
들어갈지 말 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 한수아의 머리에는 BJ천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해.’
‘실패하면?’
‘실패를 안 하면 되지.’
뭔 헛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당당하던 그 표정을 떠올리자 긴장감이 확 풀렸다.
‘그래. 실패 안 하면 되지.’
한수아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고치 탄환 사이로 밀어넣었다.
촤자자자자작!
수없이 많은 실로 된 탄환이 화면을 뒤덮었다. 토끼가면의 몸이 완전히 가려졌다.
> ㅁㅊ
> 왜 앞으로 나감?
> 급발진 아님?
> 아니 VR겜에 급발진이 어딨어!
> 결승이라고 이기기 힘들어 보이니까 걍 던진건가??
> 아니 진짜 어이가 없네;
채팅창의 모두가 한수아가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했다는 말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아. 지금 화면이 완전히 가려졌습니다! 다른 화면으로 전환을 하겠습니다!]
쏟아졌던 고치들이 카메라를 완전히 가려진 탓에 일시적으로 화면이 보이지 않는 상황.
하지만 게임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있었다.
“이겼다.”
“그래도 1승은 먼저 챙겨가네.”
“최대한 많이 이겨 놔야 BJ천마를 이길 수 있어.”
첫 게임의 승리를 예감한 레인보우 셔벗에서는 승리를 확신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망했네.”
“일단 한 명은 사망 확정이고.”
“남은 두 명까지 죽으면 나 혼자만 살아남는 건가···.”
반면 천마신교의 분위기는 살짝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옆에서 같이 오래 지냈는데. 사람이 죽는 걸 보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네요.”
> 안 죽었어 ㅋㅋㅋㅋㅋ
> 제로콜아; 게임 진걸로 사람은 안 죽어;;
“이 게임 지면 죽어요··· 사람은 게임을 지면 죽어···.”
채팅창의 분위기도 토끼가면이 살아남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토끼가면의 옆에서 시종일관 게임을 봐 온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지금 토끼가면의 플레이는 말도 안 되는 짓이었으니까.
불만과 의아함이 뒤섞여서 장내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확실히 실력이 늘긴 했군.”
그러나 단 한 명. BJ천마만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지금 화면이 전환됐습니다!]
> ???
> 뭐고
> 뭐 어케된거임??
화면이 전환되자. 놀라움과 경악에 휩싸인 채팅이 수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전환된 화면에서는, 토끼가면이 살아 있었다. 그것도 옷에 실 하나 붙이지 않은 멀쩡한 몸 상태다.
그리고 토끼가면의 총구는 라온의 머리에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죽어!]
탕! 탕! 탕! 타아앙!
토끼가면의 총알이 거칠게 불을 뿜어냈다.
[퍼스트 블러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