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완승 (2)
[맵 : 붉은 숲]
[챔피언 픽이 완료되었습니다!]
보통 게임에서 밴픽이 상대와 아군이 번갈아서 진행되는 스네이크(snake)룰로 진행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재의 대회는 스네이크는 물론이고 밴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의 대회는 최대한 게임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었으니까.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픽을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기를 최대한 뽐내는 데에 주안점이 있는 것이다.
“이건 우리 입장에서는 호재라고 할 수 있지.”
애초에 BJ천마, 토끼가면과 풀창고는 한 영웅만을 주구장창 플레이하는 원챔프 플레이어다. 물론 다른 팀원들의 챔피언 풀도 그리 넓지 않다. 많은 챔피언을 해 보지 못한 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지만 다른 AOS를 질릴 만큼 하면서 AOS라는 게임 자체에 대한 이해도가 엄청난 프로들과 스트리머는 시작점이 다르다.
물론 스트리머들의 편의를 봐 주기 위해서 이러한 룰을 만든 것은 아닐 테지만.
[BJ천마가 「야수도 박정」을 선택하셨습니다.]
[풀창고가 「불멸의 방패 레오니다스」를 선택하셨습니다.]
···
[픽이 완료되었습니다!]
순식간에 픽이 완료되었다. 거의 순식간에 완료된 픽에 채팅창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 ?
> 좀 생각은 하고 밴픽하면 안됨?
> 아니 뭐 닷새동안 같은 챔피언으로 계속했는데 이제와서 바꾸는 것도 이상하긴 함
물론 대회장에 있는 BJ천마 팀은 채팅을 볼 수가 없는 상태라서 채팅이나 관객들이 플레이어에게 영향을 끼칠 수는 없는 상태였지만.
[이제 밴픽 완료를 보시고 승/패를 예측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테크니컬 지니어스에서 협찬해 준 VR캡슐을 비롯해서 푸짐한 경품이 준비되어 있으니, 많은 승패예측 부탁드리겠습니다!]
> 오
> 승패예측 열렸네
> 상품 ㅁㅊㄷ ㅋㅋㅋㅋㅋㅋ 어케 단순 승패예측 상품이 하이엔드 VR캡슐???
> 요새 TG에서 천공에 꽤 많이 투자하더라
> BJ천마가 쓰는 기기도 TG잖음
> 오늘 대회장에도 개인 기기 들고왔더라
[미션맨 님이 100,000원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BJ천마가 대회장에까지 직접 가져올 정도로 성능이 좋은 TG! 여러분도 써 보는 것은 어떨까요?]
> 응 안써 그거 써도 난 어차피 브론즈야
> 일반인이 쓰기엔 좀 비싸긴 하더라
> 프로들 쓰는 기기도 많은데 굳이 BJ천마가 쓰는 거 쓸 이유는 없긴 하지
> 미션무룩···
> 근데 미션맨은 왜케 TG에 집착함 ㅋㅋㅋ누가 보면 TG 사장인 줄 알겠네 ㅋㅋㅋㅋ
미션맨이 당분간 TG홍보를 이 계정으로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을 먹는 사이, 승패예측이 완료되었다.
[승패예측 완료]
[천마신교 승 : 9%]
[다크호스 승 : 91%]
> 1대 9네 ㅋㅋㅋㅋ
> 이거 맞냐?
> 천마신교 놈들 맨날 BJ천마가 최강인듯 말하더니 상품 걸리니까 진심인거 보소 ㅋㅋㅋㅋㅋ
보통 돈이 걸리지 않은 승패예측에서는 팬심이 매우 크게 관여한다. 하지만 지금의 승패예측은 큰 상품이 많이 걸려 있는 상태.
즉 돈이 걸린 상태다.
당연히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 천마신교가 겜 이기려면 탑이 이겨야 되는데 ㅋㅋㅋㅋㅋ
> 탑 챔프랑 선수보셈
> 못 이겨 ㅋㅋㅋㅋㅋ
채팅창에서 ‘이성적’인 채팅이 수없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
[게임이 시작됩니다!]
첫 번째 대회 맵으로 결정된 것은 「붉은 나무숲」. 평균적인 맵에 비해서 라인 간의 거리가 아득히 긴 탓에 라인전이 극도로 중요한 맵이다.
“어차피 본좌가 있으니 게임의 승리는 결정되어 있다.”
“진짜 오빠 그 자신감은 볼 때마다 대단하긴 하다.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거야?”
“실력.”
“······.”
“하지만 놈은 본좌에게 도발을 몇 번이나 했다. 겨우 게임을 이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라인전을 확실히 밟아 버리도록.”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볼 게.”
“좋다. 최선을 다하면 결과에는 후회가 없을 테니까.”
“와. 웬일로 천마형이 그런 말을 해? 형 성격이면 라인전 지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할 것 같은데.”
“이 세상을 떠날 때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라인전에 최선을 다하도록.”
“아니. 그렇게 말하면 라인전 지면 죽여버리겠다고 말하는 것 같잖아.”
“······.”
“그, 그렇지? 그냥 열심히 하라고 응원한 것 뿐이지?”
“최선을 다하도록. 삶의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지 않도록.”
풀창고는 BJ천마의 눈을 바라봤다. 언제나처럼 농담기 없는 진지한 눈이다.
오싹함이 네 명의 등골로 스쳐지나갔다. 물론 BJ천마가 정말로 사람을 죽이진 않겠지만.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은 확실해 보였다.
경고를 끝낸 단천은 라인을 걸어 탑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나라도 이겨서 살아남자···.’
네 명의 머릿속에 완전히 똑같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탑에 도착한 단천은 검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을 풀었다. 스코어보드를 열어 상대 탑을 찾아볼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애초에 누가 오건 베어 버리면 되는데 상대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상대 탑의 닉네임이 뭐라고 했더라.’
듣자마자 잊어버렸다. 누가 상대건 큰 의미는 없었다. 단천의 머릿속에는 원거리 딜러인 ‘블랙호스’를 찢어죽일 생각뿐이었으니까.
놈을 죽이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탑을 떠나야 했다. 물론 만족스러운 결정은 아니다. 탑이야말로 자신이 있어야할 곳이기에. 한시라도 탑을 비워야하는 현 상황이 만족스러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단천이 짓고 있을 때.
탑으로 익숙한 닉네임이 보였다.
[블랙호스]
“······.”
“당황했나? 당황했겠지.”
블랙호스가 입꼬리를 올린 채 붉은 안경을 치켜세웠다.
놈이 지금 골라 놓은 캐릭터는 「붉은 안경 베이드」. 주 무기를 석궁으로 쓰는 원거리 캐릭터다.
원래는 바텀의 원거리 딜러 포지션만으로 쓰이는 캐릭터인데, 지금 탑에 나타난 것이다.
“완전히 밟아 주지.”
기세등등해하는 블랙호스를 바라보는 BJ천마의 입꼬리가 서서히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사냥감이 제 발로 나타나 주다니. 이것보다 기분좋은 상황은 없을 테니까.
***
[미니언이 생성됩니다!]
미니언이 생성된다는 메시지를 본 풀창고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긴장 풀고 게임합시다. 굿 게임.”
풀창고의 맞상대 라이너인 라온은 픽 웃으며 풀창고에게 말을 건냈다. 자신도 처음 프로게이머와 라인전을 하게 됐을 때 저만큼 바싹 얼어붙어 있었다.
긴장한 탓에 제대로 스킬샷도 못 쓰고 쳐발려버렸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라온은 풀창고를 도닥였다.
상대는 어차피 스트리머들이 모인 게이머들일 뿐이다. 자신들이 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니 조금 마음을 풀고 상대를 도닥여주는 정도는 해 줄 수 있다.
라온의 위로가 먹혀들었는지 풀창고의 몸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시작된 라인전.
‘가볍게 견제부터 해 볼까.’
라온의 캐릭터는 거대한 닻을 무기로 삼는 「심해의 신 타우리스」다.
타우리스의 스킬인 닻 투척은 초반에 상대에게 적중하면 킬각이 나오는 그랩류 스킬.
스킬이 맞지 않으면 맞지 않는 대로 다음 쿨타임까지 사리면 되고.
라온은 가벼운 마음으로 풀창고를 향해 닻을 조준했다.
쉬이익!
[닻 투척!]
거대한 닻이 풀창고를 향해 날아들었다. 날아드는 닻을 본 풀창고의 눈이 번뜩였다.
타앗!
풀창고의 몸이 공중으로 도약해 닻 위에 착지했다.
“어?”
라온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풀창고가 던진 창이 라온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다.
[크리티컬!]
푸화악!
‘이, 이런 미친!’
제대로 크리티컬이 터져나온 스킬샷을 맞자마자 라온의 눈이 치켜떠졌다. 눈 앞에서 바들바들 떠는 토끼인 줄 알았는데. 살벌하기 그지없는 무빙과 스킬샷이다.
‘일단 거리를 벌려야─!’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닻을 밟으면서 거리를 좁힌 풀창고가 이미 눈 앞까지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젠장!”
이미 크리티컬을 한 방 먹어서 체력이 빈사가 된 상태. 이 상태로 평타만 한 대를 허용해도 그대로 죽고 만다.
다행인 것은 지금 풀창고가 타워 안 사거리에 들어와 있다는 점! 닻을 회수해서 CC를 한 번만 건다면 같이 죽을 수 있다!
“먹어라!”
[심해 타격]
라온의 닻이 풀창고를 향해 날아들었다. 전면부를 거의 모두 뒤덮을 정도로 범위가 넓은 스킬샷이다.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이 정도의 범위 스킬은 프로라고 해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쉬이익!
풀창고의 몸이 연체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라온의 스킬샷을 피해버렸다.
그리고 날아오는 방패가 라온의 얼굴에 격중했다.
쾅!
[퍼스트 블러드!]
터져나온 퍼스트 블러드 음성에. 풀창고는 눈을 깜박였다.
“어?”
풀창고의 눈이 꿈벅였다. 지금 자신의 상태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내가 퍼블을 땄어?”
그것도 프로 상대로?
긴장에 떨면서 라인전에 돌입했던 것은 기억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라온의 스킬샷을 피한 것도. 그리고 스킬샷을 적중시킨 것도.
모조리 기억난다.
기억이 나기는 나는데. 자신의 생각대로 몸이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생각보다도 앞서서 몸이 움직였다는 느낌.
본능적이기 그지없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와.”
풀창고는 멍한 눈으로 자신이 들고 있는 창과 방패를 바라봤다.
“이게 먹히네.”
닷새 간의 지옥훈련동안 풀창고는 라인전에서 최강인 BJ천마를 상대로 라인전을 주구장창 해 왔다.
라온의 불행은 자신의 앞에 선 풀창고가 그런 지옥같은 라인전을 닷새나 해 왔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아주 자그마한 실수만 있어도 킬이 나는 괴물과 싸워온 사람을 상대로 별 생각 없이 스킬샷을 던졌으니. 역으로 킬이 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
와아아아아!
퍼스트 블러드가 터져나오자 거대한 탄성이 터져나왔다.
퍼스트 블러드가 나온다면 당연히 BJ천마가 먼저 터트리거나, 그게 아니라면 팀 다크호스쪽에서 퍼스트 블러드를 딸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그 결과가 정 반대로 터져나온 것이다.
> 와 저거 뭐냐 ㅋㅋㅋㅋㅋㅋㅋ
> 그냥 스킬샷 한 번 실수했더니 그대로 따버리네 ㅋㅋㅋ
> 상대가 아무 생각 없었던듯? 레오니다스 상대로 저렇게 쉽게 라인전 하는 거 아닌데
> ㅅㅂ 프로끼리 라인전도 아닌데 잠깐 방심할 수도 있지
> 근데 다른 라인은 안 그럴 거임
[제로콜이 맨큐를 처치했습니다!]
[제로콜이 솜명봉을 처치했습니다!]
[더블 킬!]
그 말이 터져나오자마자 바텀에서 터져나오는 더블 킬.
> 와 ㅅㅂ 라인전 겁나 파더니 1렙에 게임이 터지네
> 아직 모름 정글러 개입하면 라인전 양상이 아예 달라지니까
[정유채가 날_다를 처치했습니다.]
그리고, 정글에 인베를 들어간 정유채마저 상대 정글러인 날_다를 상대로 솔로킬을 터트렸다.
실로 전방위적으로 동시에 라인전이 박살이 났다고 할 수 있는 상황.
> 미쳤다 ㅋㅋㅋㅋㅋㅋㅋ
> 이게뭐고 ㅋㅋㅋㅋㅋㅋㅋㅋ
> 어떻게 닷새 가르친걸로 라인전이 이렇게 됨???
> BJ천마 그는 신인가?
> 아직,,,아직 아님,,, 탑 라인전 안 끝났음,,,
순식간에 반쯤 박살난 게임에.
화면에 비쳐지는 블랙호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