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훈련 (1)
‘할 수 있어.’
풀창고는 잔뜩 쫄아붙은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리 팀 랭크 게임이라고 해도, 챌린저의 벽은 높다.
그런 벽을 천천히 기어올라온 자신이다. 실력 자체가 엄청나게 일취월장했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까닭에 풀창고는 처음으로 챌린저에 입성한 순간, 자신도 이제 BJ천마와 어느 정도 합을 겨룰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옛날이랑은 다를 거야.”
“당연히 달라야지. 한 달 전 그대로라면 특훈의 양을 배로 늘릴 거니까 그렇게 알도록.”
BJ천마의 말에 풀창고의 등에서 식은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냥 예전이랑 달라졌으니 만만하게 보지 말라는 말이었는데. 본의 아니게도 이 1:1에 걸려 있는 무시무시한 벌칙을 듣게 되다니.
> 달라진 모습 안 보여주면 죽을수도 있음 ㄷㄷㄷ
> 진짜 필사적으로 하자
“그러고 보니. 룰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군.”
“룰?”
“라인전이 시작되고 1분 이상 버티면 이번 특훈은 면제다.”
“면제?”
“그렇다.”
“진짜 면제? 아무것도 안 시키고?”
“본좌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물론 대회에서 이기고 싶다는 마음은 분명히 있다. 훈련을 하면 하는 만큼 대회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고.
그러나, BJ천마가 평소에 시키는 ‘훈련’이라는 것의 수위가 문제였다. 인간을 지렁이로 만드는 자격증이라도 있는 것 마냥 사람을 굴려대는 BJ천마의 특훈은 그 무슨 보상이 있어도 피하고 싶다.
화르륵!
훈련 면제라는 말에 풀창고의 눈이 타올랐다.
‘무조건 버틴다! 죽어도 버틴다!’
라인전 시작부터 버티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경험치를 내 줘서 레벨업을 너무 빨리 하게 해 줬다가는 그대로 킬을 따낼 수 있는 인간이 바로 눈 앞에 있는 BJ천마라는 인간이다.
그러니 초반에는 공격적으로 하는 것이 정답이다.
풀창고가 플레이하고 있는 레오니다스는 라인전에 매우 특화되어 있는 영웅이다. 거기에 평타 기반 캐릭터를 상대로는 그 상성이 압도적으로 좋다고 봐도 무방하다.
상성상 박정을 컨트롤하는 BJ천마와는 고양이와 쥐나 다름없는 상태.
거기에 유일한 변수라고 할 수 있는 정글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1:1 상황! 조금 불리하다 싶으면 포탑에 짱박혀서 버티면 아무리 BJ천마라고 해도 자신을 쓰러트리지는 못할 터다!
그러니 견제로 제대로 갉아먹기만 하면 자신의 승리는 보장되어 있다!
“이제. 미니언이 도착했으니, 라인전을 시작하도록 하지.”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라인전이 시작되자마자 BJ천마가 풀창고를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먹어라!”
[투창]
쉬이익! 레오니다스의 창이 BJ천마를 향해 날아들었다. 별 생각 없이 처음에 날린 견제타다. 맞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BJ천마의 접근을 막는 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쯧.
‘그런데. 왜 저 인간은 혀를 차고 있는 거지?’
달려드는 BJ천마가 달리는 기세를 전혀 줄이지 않은 채 도약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자신이 견제용으로 던진 창을 디딜돌로 삼아 한 번 더 도약했다.
푸욱!
박도가 레오니다스의 가슴을 관통했다.
“무게가 있는 무기를 던질 때에는 상대가 자신의 무기를 역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지. 대체 한 달 동안 뭘 배운 거야?”
풀창고는 억울했다. 1달간 그래도 꽤 많은 고수 플레이어들을 만났지만 이딴 식으로 싸움을 하는 사람은 듣도보도 못했다.
하지만 반론을 할 수는 없었다. BJ천마가 반론이란 게 들어먹히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수십 차례의 방송을 통해 검증된 사실이었으니까.
[퍼스트 블러드!]
“5초. 현재까지 최하점이군.”
‘애초에 내가 첫 타자잖아!’
> 아니 뭔 5초컷이 나냐 ㅋㅋㅋㅋㅋㅋ
> 실력차 극심하네 ㅋㅋㅋㅋ
> 근데 1분컷이라는 게 말도 안 되는 거 아니냐?
> 솔랭 챌 최상위권들도 정글 개입 없으면 BJ천마한테 3분도 못 버티는데 팀랭 챌 꼬랑지들이 어케 1분을 버텨
“···그게 무슨 소리에요? 챌린저들도 3분을 못 버티다니?”
풀창고를 비롯한 4명의 천마신교도들은 한 달 동안 팀플 랭크 게임에 미쳐서 살았다. 다른 사람의 방송이나 플레이를 볼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나마 다른 사람의 플레이를 보는 것은 공략을 보는 경우였는데. 애초에 BJ천마의 플레이는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뻔했으니까.
그런 까닭에 풀창고는 BJ천마가 챌린저에서 얼마나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왔는지 거의 알지 못했다.
“챌린저들도 3분을 못 버틴다고요?”
> 탱템 둘둘 두르고 온 극탱 캐릭터면 3분 버티나?
> ㄴㄴ 지난번에 2분 30초 컷당했잖아
풀창고의 입술이 꼭 깨물어졌다. 저 사악한 인간은 처음부터 자신들을 훈련에서 열외시켜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사람 나오라고 해.”
“알았어.”
“말 안 했는데 훈련의 강도는 오래 버틴 사람일수록 약하게 할 생각이다.”
“···뭐? 형! 처음엔 그런 말 없었잖아!”
“말하는 걸 깜빡했었군.”
BJ천마의 말에 풀창고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 5초면 꼴찌 확정 아님?
> 5초따리 얼굴 새파래짐 ㅋㅋㅋㅋㅋㅋㅋㅋ
> 풀창고 사망 예정 ㅋㅋㅋㅋㅋ
그 시각. 로비에 있는 천마신교도들은 하하호호 웃으며 시청자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따로 관전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BJ천마와의 1:1 싸움은 일종의 ‘테스트’이기에, 훈련 내용이 새어나가면 안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 진짜. 유채 보면 정글만 돈다니까? 아주 자기만 크면 전부인 줄 알아.”
“진짜. 바텀 갱을 엄청 안 오지.”
“그렇다고 미드 갱을 자주 가는 것도 아니고.”
“저저 바텀 듀오는 정글 욕할때만 쿵짝이 잘 맞아. 쓰레기들 같으니라고.”
> 우리정글뭐해!!!!!!!
> 우정뭐는 법칙입니다
오랜만에 주어지는 화기애애한 시간이었다. 그야 그럴 만한 것이, 근 1달간은 정말 글자 그대로 필사적으로 솔랭을 돌려대는 통에 시청자와의 소통은 최소화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제대로 된 소통을 하는 것은 실로 오래간만인 것이다.
그렇게 시청자들과 얼마나 소통을 하고 있었을까.
[풀창고가 로비에 입장했습니다.]
“오. 창고 형 왔네.”
안색이 파리해진 풀창고가 VR챗에 입장했다.
“잘 갔다 왔어?”
“얼굴 표정 봐. 털리고 온 게 확실하잖아.”
“뭐 어떻게 털렸길래 표정이 저래?”
“···다음 타자. 나오래. 다음 타자 누구야?”
“제로콜. 다녀와!”
제로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 나한테 조언해 줄 거 없어?”
“조언?”
“어. 천마 형이 어떻게 무빙 치니까 어떤 점을 파고들면 될 거라던가, 미션 내용이 뭐라던가 하는 거.”
조언이라는 말에 풀창고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풀창고는 어디 가서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을 거의 하지 않는 착하디착한 청년이었다.
지금 자신이 조언한다면 제로콜은 어쩌면 1분 가까운 시간을 버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면 제로콜이 오래 버틴다면 풀창고가 지옥에 갈 확률은 높아지게 된다.
선함과 악의 사이에서 갈등하던 풀창고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그런 거 없고. 최대한 공격적으로 해.”
“오케이. 공격적으로.”
가슴에 있는 양심의 삼각형이 풀창고의 양심을 마구 찔러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양심의 삼각형도 주인이 살아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을.
***
“5초, 4초, 7초, 9초.”
“······.”
“실력이 늘었다고 자신만만해 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군.”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챌린저를 달고 나서 꽤 자신이 잘한다는 자부심이 생겨났는데도 라인전에서 10초를 넘긴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결과를 받아들었기 때문이다.
> 앞사람이 뒷사람한테 그냥 타워에 쳐박혀 있으라고만 했어도 이 사단은 안 났을 텐데 ㅋㅋㅋㅋ
> ㅇㅈ합니다
풀창고의 조언을 듣고 공격적으로 했다가 4초컷을 당한 제로콜은 돌아와서 정유채에게 풀창고와 같은 조언을 했다.
그리고 정유채도 돌아와서는 똑같이 공격적으로 하라는 조언을 했다. 덕분에 BJ천마의 한 합을 받아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실로 증오의 연쇄.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상태였다.
> 지옥행 확정 ㅋㅋㅋㅋ
> 증오의 연쇄는 실존하며 그 시작점은 풀창고다···.
“미안···.”
풀창고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형. 얼굴 들어.”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겠다.”
“아니. 얼굴 가리지 말고 들어보라고!”
제로콜이 풀창고의 얼굴을 강제로 들자 나타난 풀창고의 표정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 ㅋㅋㅋㅋㅋㅋㅋ
> 어떡해··· (손을 치우자 나타나는 숨길 수 없는 미소)
> 아 모르겠고 내 밑에 한 명 생겨서 훈련강도 약해진다고 ㅋㅋㅋㅋㅋㅋ
> ??? : 아무튼 난 살았다 ㅋㅋㅋㅋ
> 근데 어떻게 10초를 아무도 못 버티냐
채팅창의 반응과는 달리 사실 단천은 꽤나 흡족한 상태였다. 단천이 라인전을 제안한 것은 단순히 얼마나 오래 버텼느냐를 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가지고 있는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가, 그리고 얼마나 자신감있게 플레이를 할 수 있는가를 보기 위해서였다.
‘죄다 빈틈을 보이자마자 바로바로 찔러들어오더란 말이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빈틈이 보이자마자 죽자사자 공격적으로 나온다는 것은 쉬이 하기 힘든 결정이다.
물론 만 점짜리 답안은 단천 자신이 만들어낸 빈틈이 의도적인 것을 알고 들어오지 않는다는 판단을 하는 것이겠지만. 정말로 그 정도가 되었다면 훈련 따위는 할 필요가 없었을 터였다.
‘확실히 실력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군.’
정유채를 제외한 세 명의 몸에는 슬슬 내공이 자라나고 있었다. 단천이 전수한 토납법 덕분이다. 그리고 몸의 반응으로 미뤄보건데 내공이 자라나는 속도도 매우 빠르다.
이유는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었다. 실전이나 다름없는 VR게임 덕분이다.
내공의 양과 실전이 거의 관계없다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상단전이 뚫린 지금 단천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무수한 실전은 결국 내공을 올라가게 만든다고.
실전이라는 것은 내공의 필요성을 신체에 인식시키는 것이고, 내공의 필요성을 느낀 신체는 자신의 몸을 서서히 변화시킨다.
그렇기에 실전은 알게 모르게 내공을 올라가게 만드는 데에 도움을 준다.
실제로도 지금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천마교도의 성장속도는 오성과 벌모세수를 받은 천하제일의 기재와도 비슷할 정도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이 정도라면 훨씬 더 확실하게 이길 수 있겠군.’
물론 아직까지는 총체적인 실력이 프로게이머에 비해서는 부족하다.
하지만, 그 갭을 메우는 데에는 닷새면 충분하다. 훌륭하고 전문적이며 체계적으로 사람을 굴릴 수 있는 천하제일의 교관이 있었으니까.
“너희들은 운이 좋다.”
BJ천마의 귀기어린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운 전혀 안 좋은 것 같은데.’
> 운이 좋군
> 운이 좋군(전혀 안 좋음)
> 운이 좋군(인생 망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