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랭크전이 끝나고 (3)
VR게임 채굴장은 MMORPG류 게임들의 아이템을 수집하거나 대신 게임을 해 주는 식으로 수입을 만들어내는 장소다.
그런 곳에서 전대 천하제일인인 백건이 굴렀다니. 상당히 의외다.
“그런 곳에서 잘도 일했군. 그보다, VR게임 채굴장은 불법 아닌가?”
“그 때 당시에는 불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어느 정도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고 나서는 도망쳤지만.”
“도망친다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건 똑같은 것 같은데.”
“PK를 해서 악 성향 유저들에게서 뜯어낸 아이템들을 현금화했지.”
“현금화도 불법인데.”
“그때는 불법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오면서 불법 채굴장의 VR기기도 다 부숴놓고 나왔지.”
“그것도 불법이잖아.”
“당시에는 불법인 걸 몰랐다. 악행을 저지르는 놈들을 처리했으니 협狹을 행한 것이기도 하고.”
그냥 본인이 몰랐다는 걸 핑계로 불법을 막 저지르고 다닌 것 뿐 아닌가?
단천은 눈앞에 있는 백건이 정상인들이 없는 정파인들 가운데서도 상당한 싸이코라는 것을 알아챘다. 하여간 천하제일인이라고 자칭하는 놈들은 자신 말고는 죄다 정신머리 한 모퉁이가 망가져 있다.
“그렇게 나온 돈으로 방을 얻고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알아봤지. 이 세계에 무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림인들은 사실 돈을 잘 버는 족속들이 아니다. 무공 말고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번다면 더더욱 그렇다.
특히 한국은 치안이 안정된 도시다. 자경단 짓을 하면서 돈을 버는 무림인이 돈을 벌 방법은 전무하다고 봐야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무에 대한 지식을 사용할 수 있는 게 어떤 게 있을지를 꽤 오래 고민한 결과가 바로 프로 게이머였지.”
“괜찮은 선택이었군. 돈은 많이 벌었나?”
“어마어마하게.”
프로 게이머라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다. 과거 스포츠의 시장을 빠르게 대체한 것이 바로 VR게임 시장계였으니까.
백건은 그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티어에 들어가는 게이머다. 그러니 자신의 눈 앞에 앉아있는 백건이 어마어마한 부자라는 결론이 나온다.
“남는 돈 있나?”
“있어도 마교 졸개에게 줄 돈은 없지.”
“그런 말 하는 놈들 치고 본좌에게 상납하지 않은 놈들이 없는데.”
“천마의 위에 올랐던 것이 맞나? 예의를 차리라고 수하들이 뭐라고 했을 것 같은데.”
“가끔 그런 말을 하는 놈들이 있었지. 금세 조용해졌지만.”
“간언을 하는 충신들은 어느 시대건 있기는 한 모양이군.”
충신은 무슨. 사람 귀찮게 하는 놈들이었는데.
“아무튼, 프로로서 첫 우승을 하고 난 다음날에. 낯선 곳, 아니. 낯익은 곳에서 편지가 왔다.”
백건이 탁자 위에 편지를 꺼내 올렸다. 한지로 만든 편지에 적혀 있는 것은 중원의 글자들.
그리고 붉은 도장으로 찍혀 있는 밀봉인蜜封印에 선명하게 적혀 있는 네 글자.
천마신교天魔神敎.
단천의 눈이 찍혀 있는 도장을 바라봤다. 천마신교의 인장은 쉬이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런 인장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이곳에 온 천마가 본좌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군.”
“처음 봤을 때는 네놈이 이 편지를 보낸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렇지는 않겠지.”
“본좌는 편지 따위 보내지 않는다. 보낼 시간에 찾아가는 게 빠른데 구태여 편지를 보낼 이유가 없지.”
직접 찾아가는 게 해결도 더 빠르고 이런저런 시비를 걸기도 훨씬 좋다.
“편지의 내용은?”
“만날 생각이 있다면 찾아오라는 말이었지.”
“찾아갔나?”
“나는 마교의 놈이 오란다고 오고, 가란다고 가는 자가 아니다.”
백건의 말에 단천은 호쾌하게 웃었다. 백건은 천하제일인이다.
세상을 전부 자신의 발 아래 놓았던 인간. 그런 에고를 가진 인간이 천마신교의 인장을 본다고 해서 따라갈 리가 없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백건이 나와 있는 것도 순수히 그가 나오고 싶어서였다. 나오고 싶지 않았다면 결코 나오지 않았을 터.
“천마. 너에게는 이런 편지가 오지 않았나?”
“아니. 안 왔다. 암습 시도 비스무리한 것이 있기는 했지만.”
“암습?”
“내 수하의 무공인 뇌명검을 사용해서 게임 상에서 나를 이겨보려고 했지. 실패했지만.”
“뇌명검? 그 반쪽짜리 무공 말인가?”
“본좌의 수하가 완성했다. 물론 본좌의 상대는 되지 않았지만.”
백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이 완성되는 것과 승부는 별개니까. 완성된 무공이 강하다고 해도 결국 무공, 사용하는 자가 강해야만 적을 이길 수 있다.
“하긴, 네놈 같은 괴물을 이기려면 무공의 완성 정도로는 택도 없지. 최소한 신화경에 발이라도 디뎌야 할 테니.”
“네놈은 신화경에 도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군.”
“신화경 초입에서부터 세 발자국 정도는 걸었다고 할 수 있지.”
“별 것 아니군. 본좌는 신화경에서부터 열 발자국 정도는 걸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열다섯 보 정도 걸었던 것 같군.”
“열 발자국은 본좌의 경공으로 열 발자국을 말함이다.”
“나 또한 허공답보를 쓰고 걸어간 열다섯 보다.”
“그리고 본좌의 천마군림보는 한 걸음으로 천만 리를 나아가지.”
파지지직! 둘 간의 진지하기 그지없는 눈빛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천하제일인 두 명의 말싸움 치고는 저렴하기 짝이 없는 말싸움이었지만 아쉽게도 그것을 지적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먼저 백기를 든 쪽은 백건 쪽이었다. 단천이 가지고 있는 내공을 끌어올려 백건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땀을 흘리던 백건이 길게 한숨을 뱉어냈다.
“후우. 됐다. 됐어. 네놈과 말싸움해서 무에 쓴다고. 논검이라면 모를까.”
“본좌는 논검으로도 중원에서 불패였다.”
“하는 꼬라지 보니 논검도 어떻게 했을지 눈에 선하군.”
“그런데 왜 무공은 배우지 않은 거지?”
만약 무공을 배웠다면 지금 단천의 압박에 무슨 반응이라도 했을 터. 하지만 백건에게서는 그런 반응조차 전혀 없었다.
내공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몸이었던 것이다.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평범?”
“무의 끝을 보겠다고 평생을 살다 보니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 뿐이다. 한 번의 생이 더 주어졌으니.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까닭에 마교에게서 연락이 왔는데도 무시한 거고.”
이를테면 금분세수. 완전한 은퇴라고 할 수 있었다. 금분세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백건은 새로운 몸을 얻었고, 내공을 아예 버렸다는 것 정도.
“놈들과는 관련되고 싶지 않았다. 게임은 재미있으니 소일거리로 하고 있지만.”
“이해가 가질 않는군. 관여되기 싫다고 해 놓고서는 본좌와는 왜 싸운 거지?”
“호승심.”
백건은 BJ천마를 보고 한 눈에 그가 중원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BJ천마와 관계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호승심이라는 것은 쉬이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상을 찾아보면 볼수록. 한 번 붙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더군.”
“그래서 찾아왔다?”
“네놈의 플레이에는 사람을 도발하는 뭔가가 있다.”
“본좌의 무공이 위대하기는 하지.”
“···아무튼. 그래서 찾아왔다.”
“결과는 쳐발렸지만.”
백건의 머리에 가느다란 힘줄이 돋았다. 놈은 인간으로서 사람을 도발하는 능력 또한 중원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 도발에 넘어갔다가는 또 되도 않는 말싸움에 휘말릴 것이 분명하다.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
후우.
쌀쌀해진 날씨에 백건은 손을 폈다. 한냉불침의 몸을 가지고 있던 과거에는 추위를 느끼지도 못 했는데. 이 몸은 계절이 바뀌는 것을 잘도 알아챈다.
천마는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간 다음이었다. 수련을 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중원에서의 이야기라도 좀 해 볼만 하건만. 그냥 가나.”
놈은 무공이 전혀 필요없는 세상에 오고서도 자신을 끝없이 담금질하고 있었다.
자신도 한 때는 저럴 때가 있었다. 침식을 잊고 무공에 열중하며 더 강해지는 것만을 목표로 하던 때가.
한때는 그런 것들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려고 했었다.
21세기에서 평범함이 주는 안락함은 크디크다. 돈만 있으면 상상하는 모든 것들을 얻을 수 있다. 구태여 몸을 학대하고 자신을 수련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즐거운 인생을 영위할 수 있다.
“머저리같은 놈 같으니라고. 이런 것들을 죄다 쓸모없는 양 수련이나 하다니.”
무공이 더 필요없는 세상에서 무공을 죽자고 수련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백건은 입을 열어 단천에게 욕을 한 사발을 했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
그런데 왜 자신의 심장은 계속해서 뛰고 있는가.
“···쓰읍.”
그 이유는 자신도 안다. 후회가 남기 때문이다. BJ천마와의 전투에서 최선을 다했을지언정, 이 세계에서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반면 BJ천마는 이 세계에서조차 자신을 내려놓지 않고 수련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중원에서 온 다른 천마가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마 중원에서 온 자가 없더라도 놈은 수련을 했을 터다. 이 세상이 아니었어도 수련을 했을 테지. 세상에 자신 혼자뿐이었더라도 수련을 했을 테고.
BJ천마는 오롯이 자신의 완성을 위해. 저 하늘 끝 너머에 닿기 위해서 아직까지도 정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백건 자신의 과거의 모습이기도 했다.
긴 시간을 서 있던 백건의 입에서 긴 숨이 튀어나왔다.
“많이 늦었는데.”
백건 자신의 몸은 이미 스물이 넘은 몸뚱아리다. 내공을 쌓기에는 최악인 몸. 벌모세수를 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영약을 구해 줄 사람도 없다.
원래의 무공을 되찾는 것은 요원하다못해 불가능한 길이다.
그런데도 무공을 다시 수련하고 싶다는 생각이 백건의 머릿속을 온통 채우고 있었다.
늦었지만 다시금 이 몸으로 무공을 펼치고 싶다. 원래의 경지에 조금이라도 다다르고 싶다.
그리고, 자신을 이긴 인간과 다시금 겨루고 싶다.
“싸가지없는 후배 놈 같으니라고.”
감히 선배를 상대로 오만하게 이겨먹다니. 거기에 가르침을 주는 것은 선대의 고인이 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감히 나에게 가르침을 주다니 용서가 안 돼.”
선배가 돼서는 후배에게 가르침을 받다니. 거기에 심지어 그 후배라는 놈은 마도의 지존인 천마라니.
“나는 백건! 중원무림 그 어느 곳에서도 적수를 찾지 못했던 천하제일인이다! 네놈을 따라잡는 데는 찰나도 걸리지 않을 거다!”
백건은 전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제대로 뛰지도 않은 탓에 금방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어지럽고 구역질이 났지만 계속해서 달렸다.
내공을 받아들일 몸을 빠르게 만들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을 수련해야 할 터였다. 아마도 게이머로서의 생활은 은퇴해야 할지도. 하지만 괜찮았다.
저 멀리 벌써 가 버린 후대의 천하제일인에게 다가서려면 그만큼 노력을 해야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