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랭크전이 끝나고 (1)
[「야수도 박정」이 첫 번째로 승천합니다.]
[「야수도 박정」의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메시지가 떠오르며 장소가 바뀌었다. 초갓집과 그 뒤로 산이 보이는, 단천 또한 본 적 있는 낯익은 장소다.
과거 박정이 살았던 집.
다만. 과거에는 피로 만들어진 발자국들이 찍혀 있었다면, 지금은 집 뒤의 굴뚝에서 연기가 솟아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
박정이 느릿한 걸음으로 천천히 자신의 집을 향해 다가섰다.
박정은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열어젖혔다. 그리고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여보. 오셨어요?”
“···왔소. 내가. 내가 여기에 왔소.”
“뒤에 있는 분은···?”
“내 친구일세.”
“그렇군요. 아, 내 정신 좀 봐. 손님이 오셨으니 식사를 조금 더 준비해야겠네요.”
“굳이 먹을 필요 없다.”
“아뇨. 남편 친구분을 어떻게 빈 속으로 돌려보내겠어요.”
박정의 아내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이어 나온 상은 대단할 것이 딱히 없었다. 나물 세네 가지와 보리가 반쯤 섞인 밥.
하지만 박정의 눈은 밥을 먹는 내내 젖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자 해가 산에 걸려 있었다. 단천은 집 안에 들어가는 대신 집 위에 앉았다.
오랜만의 해후다. 그런 둘 사이에 구태여 끼어들어 있을 생각은 없었다.
서산마루에 걸린 해가 완전히 사라지고 밤이 저물고 나자 박정이 집 밖으로 걸어나왔다.
“잘 됐나.”
“그래. 잘 해결됐네. 무혼이여, 고맙네.”
“···그럼 이제 소원도 해결됐고, 천공에는 크게 볼일이 없어지는 건가?”
박정이 천공에 들어온 이유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소원이 완전히 이루어졌으니. 더 이상 그가 천공에 있을 이유도 사라진 것이다.
“아니. 천공에는 계속 있을 걸세. 그러기 위한 허락도 받았고.”
“왜지?”
“새 소원이 생겼으니까.”
“새 소원?”
“천공의 최강자가 되는 것.”
박정의 눈에는 확고함이 가득 차 있었다.
“무혼이여. 그대의 마지막 전투를 보며 나도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들었네.”
“그런가.”
“지금은 그대가 있어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강이라고 하기에 많이 부족하네.”
단천은 부정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박정은 자신이 아니라면 천공의 왕좌에 결코 앉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니. 나는 앞으로 더욱 강해지고 싶네. 다른 영웅들에 비해서도 떨어지지 않도록.”
[「야수도 박정」의 추가 능력치 상승이 해금되었습니다!]
[모든 플레이어들이 야수도 박정의 능력치를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 추가 능력치 상승?
> 대충 룬 시스템이라고 보면 됨
> 추가 캐릭터 육성 요소네
> 이게 1위 달아야 오픈되는구나;;
추가 능력치 상승을 본 채팅창이 한 차례 끓어올랐다. 추가 능력치 상승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캐릭터의 능력치를 올리고 분배할 수 있는 컨텐츠다.
이 능력치 분배에 따라서 캐릭터가 원래 가지고 있던 한계점을 메우거나, 가지고 있는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기도 하다.
추가적으로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면 연구를 통해 박정을 사용할 수 있는 길도 넓어질 터.
게다가 박정과 같은 기본 능력치에 영향을 많이 받는 영웅은 다른 영웅에 비해서 그 성능의 향상폭이 컸다.
즉, 이전의 박정이 사용할 만한 구석이 없는 캐릭터였다면 지금은 연구를 통해서 충분히 성능을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셈.
> 오늘부로 박정 연구 들어간다
> 당분간 랭크 탑에서 박정만 보일 예정;
> BJ천마님··· 제발 천공 플레이를 그만둬 주세요··· 탑에 미친놈들이 네다섯 배는 늘었어···
당분간은 탑에 야수도 박정이 점령하다시피할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탑이 아닌 플레이어들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리기는 했지만.
***
[야수도 박정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영원의 레코드에 스토리가 기록되었습니다.]
[게임 로비로 돌아갑니다.]
해후가 끝나고 난 단천은 만신전의 로비로 다시 돌아왔다. 박정 또한 돌아와 있었다.
“이걸로 박정의 소원은 끝났고. 본좌의 소원만이 남았군.”
하지만 자신의 소원은 어떻게 이뤄지는 것인지는 아직까지 모호하다. 홈페이지에나 랭크 설명 창에도 소원을 어떻게 들어주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는 것이 없었고.
설마.
“···소원창···?”
물론 아무 반응도 없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소원창 ㅋㅋㅋㅋㅋㅋㅋ
> 뜨겠냐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기껏 고민해서 하는 게 ‘소원창’ ㅋㅋㅋㅋㅋㅋㅋ
> 뭔가 궁금하다 싶을때 상태창 부르는게 국룰이긴 함
단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소설 여기저기에서는 상태창이니 소원창이니 붕태창이니 부르면 나오는 게 상태창이었는데, 중원도 그렇고 게임도 그렇고, 상태창이 제대로 나타나는 경우가 별로 없다.
하여간, 소설 작가들이란 게 경험 없이 글을 적다 보니 현실 고증이 개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는 상태창을 부르지 말아야지.
그렇게 단천이 속으로 상태창을 남용하는 웹소설 작가들을 씹어대는 중.
[GM프라우드 님이 파티 요청을 하셨습니다.]
화면에 파티 요청 메시지가 떠올랐다.
[거절하셨습니다.]
“쯧.”
가뜩이나 심란해 죽겠는데 파티 요청 장난질이라니.
21세기에 돌아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휴대폰에 매일같이 날아오는 스팸 메시지로 이골이 날 대로 난 단천이다.
이런 허접한 낚시에 낚일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낚시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GM프라우드 님이 파티 요청을 하셨습니다.]
[거절하셨습니다.]
[GM프라우드 님이 파티 요청을 하셨습니다.]
[거절하셨습니다.]
[GM프라우드 님이 파티 요청을 하셨습니다.]
[거절하셨습니다.]
“거 참 끈질기군.”
> ?? 왜 계속 파티 거절함?
“본좌가 모르는 사람이다.”
> 저거 GM아님?
“GM? 게임 마스터를 말하는 건가? 사칭범이겠지.”
> 낚시 아님 ㅋㅋㅋㅋㅋ
> 앞 글자로 GM 넣는건 운영진밖에 안 됨
> 애초에 파티 요청도 친구사이에만 되잖아
> 파티요청 됐다는 건 GM이라는 거지
GM이었군.
[GM프라우드 님이 파티 요청을 하셨습니다.]
[수락하셨습니다.]
“아. 이 사람 왜 이렇게 수락을 안 받··· 아, 안녕하세요!”
“반갑다.”
“아. 몇 번 파티 요청을 했는데 안 받으시더라고요.”
“바쁜 일이 있었다.”
“그, 그렇군요. 천공의 첫 번째 랭크게임 1위를 축하드립니다!”
프라우드가 뻘쭘함을 숨기기 위해서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축하의 목소리를 냈다.
물론 BJ천마가 저런 액션에 반응해줄 이유는 없다. 단천은 무심하게 프라우드의 움직임을 바라봤다.
“······조금은 반응해 주시면 안 될까요?”
“싫다.”
> 단호박
> 아니 사람 민망하게 ㅋㅋㅋㅋㅋ
“그래서. 왜 온 거지?”
“네? 아, 네. 다름이 아니라 랭크 게임 1위 달성자분들께는 저희가 소원을 하나 들어드립니다. 이 소원이 어떤 것인지 듣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렇군.”
이 소원을 들어 주는 알고리즘이라는 게, 직접 만나서 대화로 듣는 방식이었던 모양이다.
“본좌의 소원은 하나. 본좌만을 위한 스킨이 주어지는 것이다.”
“오. 스킨 제작 의뢰로군요. 캐릭터는··· 당연히 「야수도 박정」이시겠죠?”
“그렇다.”
> 오오
> 스킨 제작이 목표였구만
> 나만의 스킨 이거 못 참거든요 ㅋㅋㅋㅋ
“그래서. 스킨 컨셉은 어떤 겁니까?”
단천은 눈을 감았다. 천공을 시작하고부터 이 순간을 꽤나 오랫동안 그려 왔었다. 어떤 스킨을 만들어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화하지 않았다.
> ㄷㄱㄷㄱㄷㄱ
BJ천마의 입이 열리는 것을 시청자도, 프라우드도, 그리고 옆에 서 있는 박정또한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봤다.
“일단. 검이 광선검이어야 한다.”
“아, 네! 그 정도야 물론 해 드릴 수 있지요!”
프라우드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BJ천마가 최상위권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천공 운영진 측에서는 BJ천마가 스킨 제작을 요청할 때의 가능성또한 생각하고 있었다.
거의 BJ천마의 상징이 되어 버린 것이 바로 광선검이다. 이 정도는 당연히 들어줄 수 있는 범위의 소원인 것이다.
“그 외에, 박정의 옷차림에 대해서는 뭔가 요청 사항이 있으실까요?”
“있지.”
“네. 그럼 말씀해 주신다면 최대한 반영을 해 보겠···.”
“로봇.”
“···네?”
“야수도 박정의 몸이 완전한 로봇이 되는 스킨이었으면 한다.”
> ???
> ??
> 로봇이요?
로봇이라는 말에 프라우드의 등에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스킨 제작이라는 것은 기존 세계관에 최대한 가까운 스킨부터 내는 것이 관례다.
게다가 박정은 무협 세계관의 캐릭터. 그런 캐릭터의 스킨이 다짜고짜 ‘로봇’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당장 BJ천마의 옆에 서 있는 박정또한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던가.
“···로봇?”
“그래. 로봇.”
박정은 천공의 전투를 겪으며 로봇을 본 적이 있었다. 피와 살로 만들어지지 않았는데도 움직이는 금속 덩어리에 불과한 물건이 바로 로봇이었다.
“나는 로봇이 되기 싫다!”
“박정. 너는 늙은 솔개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나?”
“늙은 솔개 이야기?”
“한 때 창공을 날았던 솔개의 부리는 무뎌져 더 이상 사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늙은 솔개는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지. 하나는 그대로 굶어 죽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절벽에서 떨어져 자신의 부리를 부러뜨리는 것이지.”
“···그럼 죽을 것 같은데.”
“아니. 그렇지 않다. 절벽에서 떨어져 온 몸이 산산조각난 솔개는 미친 기계공학자를 만났고, 그 덕분에 온 몸이 강철로 만들어진 기계 솔개로 다시금 태어나 영원히 창공을 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무슨 미친 이야긴데.’
프라우드, 박정, 시청자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거나 말거나 BJ천마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져나갔다.
“요는, 기계로 된 몸을 얻는다면 너는 지금보다 한층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실 이 짧은 이야기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그 외에도 꽤 많았다. 자신의 몸을 모조리 부술 수 있는 절벽에서 떨어져야만 기연을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이라거나.
실제로 단천은 이 이야기를 토대로 중원에서 가장 산세가 험악한 화산의 절벽들에서 서윤학을 밀어보기까지 했었다.
운이 없었던 탓에 기연을 얻진 못했지만.
“중요한 것은 이 짧은 우화가 확실한 교훈을 전해준다는 점이다. 옛 말에 틀린 말은 없는 법. 강철의 몸을 가지면 강해질 수 있다.”
“아니. 강해질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방식으로는 강해지고 싶지 않···.”
“본좌가 보증하지.”
“······.”
박정의 눈이 흔들렸다. 자신 눈 앞에 있는 BJ천마라는 무혼은 남의 말을 아주 조금이라도 듣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게다가 자신은 BJ천마에게 무엇으로도 다 갚지 못할 신세까지 지지 않았던가.
영혼을 모조리 다 팔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졌거늘. 이 정도라고 못 해 주겠는가.
“···그래. 기계로 된 몸도 나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럼. 본인의 동의까지 떨어졌군.”
박정 스스로가 거부한다는 명분이 사라졌다. 거기에 이미 상부에서도 최대한 BJ천마의 요구사항을 들어 주라고까지 지시가 내려온 상황.
GM프라우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공룡변신 모드도 있었으면 좋겠군.”
“······.”
> 그게 제일 큰 거잖아 ㅋㅋㅋㅋㅋㅋㅋㅋ
> 별 거 아니라는 듯이 공룡변신 끼어넣는 빌드업 미쳤다 ㅋㅋㅋㅋ
> 광선검쓰는공룡변신로봇?? 이거 못참거든요???
> 나도 랭크1위해서 광선검쓰는공룡변신로봇 받을래!!!!
거절하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멀리 와 버렸다.
“···말씀대로 반영하겠습니다.”
프라우드는 하늘을 쳐다보며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을 누군가에게 욕설을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