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1위 쟁탈전 (4)
천하제일인은 천하에 하나뿐이다. 그러니 천하통일을 하고 최강의 자리에 올랐다면 기뻐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천하제일이 끝은 아니다.
“흐음.”
“또 뭐가 불만이십니까 지존.”
서윤학이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단천을 노려봤다. 평생을 바로 옆에서 모셔왔는데도 불구하고 서윤학이 모시는 지존이 벌이는 짓들은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본좌에게 천하제일인이라는 이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천하제일인 이상의 이름이 세상에 뭐가 있습니까.”
“고금제일인이 있지.”
“지존은 고금제일무림인이시옵니다.”
“입 발린 소리 하지 말고.”
“진심입니다.”
“본좌가 초대 천마와 붙으면 누가 이길 것 같으냐?”
“지존이 이기겠죠.”
“달마와는?”
“지존이 이기시겠죠.”
“장삼···.”
“달마를 이기시는데 장삼풍도 못 이기실까.”
서윤학은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즉답했다. 얼마 전까지는 반신반의했다. 아무리 단천이라도 초대 천마나 달마와의 승패는 장담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것도 며칠 전까지의 일이다.
서윤학의 눈 앞에 있는 인간은 얼마 전에 천마신궁에 떨어지는 성城만한 운석을 글자 그대로 증발시켜버린 인간이다.
그러니 초대 천마건 달마건 단천을 이길 리가 없다.
···그리고 운석을 증발시키는 초월적인 무위를 가진 인간 앞에서 그 인간이 최강이 아니라고 말할 만한 담력이 서윤학에게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본좌와 생각은 똑같아서 다행이로군. 생각이 다르다면 납득시켜주려 했는데.”
“납득이요?”
“그래. 네가 입뿐만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뼛속부터 골수까지 납득할 때까지 계속해서 대련을 해 줄 생각이었다.”
서윤학이 등으로 식은땀을 흘리거나 말거나 단천은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
“그렇다곤 해도, 붙어보고는 싶단 말이지.”
“누구와요?”
“전대의 천하제일인들과.”
초대 천마, 달마를 비롯한 이전의 천하제일인들도 궁금했을 것이다.
자신이 정말로 고금제일인인지. 예전의, 그리고 미래의 천하제일인이 얼마나 강한지.
서윤학은 단천의 등을 바라봤다. 천하제일을 이루고 난 자의 등은 의외로 외로워 보였다. 가장 위에 선 자의 고독함이랄까.
어쩌면 저런 고독감 때문에 중원에서 별별 기행을 다 벌이고 다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조금 더 잘 해 드려야겠군.’
서윤학의 다짐을 뒤로하고 곰방대를 뒤적거리던 단천은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말인데.”
“······? 이 대화의 어디에서 ‘그래서 말인데’가 나오는 겁니까?”
“천하제일인들의 영혼을 초혼招魂해서 강시를 만든 다음에 싸워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냐?”
“안 됩니다!”
서윤학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오늘은 사람 죽여팰 것 같은 선공을 안 하길래 이 인간이 조금 철이 들었나 싶었는데.
철이 들기는 개뿔. 평소의 5배는 미친 소리를 하기 위한 착실한 기초공사였던 것이다.
“아니, 잠깐이라도 생각을 해 보면 안 되냐?”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달마의 유해야 어디 있는진 모른다 치자. 근데 초대 천마의 유해야 천마총에 확실하게 있잖아. 그 유해 잠깐만 빼서 한 판만 붙어 본 다음에 몰래 갖다 넣어놓으면···.”
“안 됩니다! 안 된다고! 어디 가! 안 된다고 이 미친 자식아아아!”
***
단천은 과거에 있었던 자그마한 소요를 떠올리며 웃음지었다.
‘운이 좋군.’
물론 눈앞에 있는 백건이 천하제일인중 최고라고 불리는 천마나 달마급은 아니다.
그러나 백건 또한 엄연히 한 시대를 좌지우지했으며, 천마를 패퇴시킨 시대의 무인.
살면서 백건과 합을 나눠볼 수 있는 순간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비록 이곳이 중원도 아니고, 서로가 가지고 있는 무위또한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즐겁지 아니한가.’
카가가강!
단천의 검과 백건의 몸이 수차례 맞부딪혔다. 단천의 강화된 공격에는 방어 태세 스킬로 받고, 빨라진 속도에는
같은 속도 증가 스킬로 되받는다.
중원에서의 공수와는 형태는 다르지만,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
“좋군.”
미니언이 생성된지는 꽤 오래 지났지만 백건도, BJ천마도 미니언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BJ천마야 미니언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오래된 일이었지만.
백건조차 미니언을 건드리지 않는다.
아니,
‘건드릴 수가 없는 것이겠지.’
단천은 미니언과의 거리를 계속해서 유지하며 백건을 압박하고 있었다.
미니언의 경험치를 챙기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동작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불필요한 동작이 한 순간이라도 생기는 순간은 바로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미니언을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 근데 백건은 왜 미니언 안 먹냐?
> 천마님이 안 먹으니까 정정당당하게 자기도 안 먹는 거지 ㅡㅡ
> 역시 진짜 ‘탑’들간의 싸움이다
> 가슴이 웅장해지는 싸움이다···
> 그냥 미니언 먹으라고 미친놈들아
물론 채팅창에서는 이런 고도의 수싸움은 보지도 못하고 백건을 ‘진짜 탑’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해 대고 있었지만.
카가가각!
숨쉴 틋 없는 공방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쉽사리 우세를 점하는 것이 쉽지 않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기본기로군.’
하긴. 기본기가 부실한 놈이 천하제일의 자리를 움켜쥐었을 리가 없다.
만약 여기가 중원이었다면 둘 사이의 우열이 나오기 위해서는 사흘 밤, 사흘 낮으로도 부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중원이 아닌 ‘영혼의 제단’ 이었다.
[남아 있는 영생의 조각이 적습니다!]
[영혼의 세계가 뒤흔들립니다!]
[곧 라인이 합쳐집니다!]
쿠구구궁!
거대한 소리와 함께 지축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흔들림에 계속해서 이어지던 둘의 전투가 일시적으로 멈췄다.
콰과광!
흔들리던 바닥이 유리처럼 부서져내렸다. 그리고 부서진 바닥들이 모여들며 하나로 재구축되기 시작했다.
[라인이 합쳐집니다.]
[50초 뒤부터 미니언들이 재생성됩니다!]
영혼의 제단은 서로간의 영혼의 수가 일정 이하가 되면 하나의 라인으로 합쳐지는 형태의 맵이다.
라인이 합쳐지며 다른 라이너들도 속속 라인에 모습을 드러냈다.
“죽은 사람 있나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명. 다 살아는 있네.”
“아이씨. 나는 목숨 하나밖에 안 남았어. 바텀 상황 별로 안 좋아요.”
“탑은 어떻게 됐어?”
“서로 못 죽였다. 시간만 더 있었다면 본좌의 완벽한 승리였을 텐데.”
“까비. 땄으면 그대로 게임 셋인데.”
“와. 지렸다. 어땠어요? 싸움 보고 싶었는데. 겜 하지 말고 방송이나 볼걸.”
“나는 정글돌면서 시간 날 때마다 구경했다. 진짜 개꿀잼이더라.”
> 갱을 하라고 구경하지 말고 ㅋㅋㅋㅋㅋ
“갱을 하라고! 구경하지 말고!”
“상대편 정글도 구경하더만 뭘.”
“갱 안 오더라니 정글러 두 마리가 죄다 트롤이었네.”
“야 너희라도 똑같았을걸?”
“그건 맞긴 해.”
> 엌ㅋㅋㅋㅋㅋ
> 다 똑같네 ㅋㅋㅋㅋㅋ
> 아니 천마 VS 백건을 어케 구경안하고 배기쉴?
팀원들도 게임에 제대로 집중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결국 게임은 두 탑솔러 사이에서 결정된다는 것이 모두의 생각이었기에.
“최대한 백건한테 안 죽을 수 있게 싸워봅시다.”
영혼의 제단에서 더 이상 부활이 불가능한 마지막 죽음을 맞이하면, 그 순간 가지고 있던 능력치가 마지막 일격을 가한 상대편에게 모조리 흡수된다.
이 ‘영생의 조각’을 누가 먹느냐에 따라 게임의 판세가 아예 달라질 수도 있는 게임이 바로 영혼의 제단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진짜 게임이 시작된 상황이건만
BJ천마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BJ천마는 날카로워진 눈으로 합쳐진 라인에 생겨난 아군과 적군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본좌의 탑에 버러지가 여덟이나 더 추가됐군.”
“···천마님. 여기 탑 아닌데요? 라인 다 합쳐졌잖아요.”
“본좌가 가는 곳이 바로 탑이다.”
“······그러니까 여기가 탑이라고요?”
“그렇다. 탑에 얼씬거리는 벌레가 이리도 늘어나다니. 불쾌하다.”
‘어쩌라고.’
> 명언 ㅁㅊㄷ
> 포브스 선정 가장 멋있는 대사 : 내가 가는 곳이 바로 탑
> 이정도면 탑신병자의 신기원 아니냐?
> 갈!! 천마님께 탑신병자라니!! 천마님이 정상이고 세상이 비정상인 것을!!!
불쾌하다면 다 쳐죽여버리면 된다. 단천은 눈을 들어 탑에 있는 적들을 노려봤다.
백건을 바로 죽이는 것은 가장 어려운 길이다.
가장 죽이기 편한 것은 물론 새로 생겨난 적들부터다.
“일단은 저 놈들부터 다 죽이도록 하지.”
“‘일단은’이라니. 누가 들으면 우리까지 다 죽이려는 걸로 들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일단은, 저 놈들부터 다 죽이도록 하지.”
“······.”
> ㅋㅋㅋㅋㅋ
> 탑에 오는 놈들은 다 죽일 수밖에 없다
> ??? : 저희는 천마님 편인데요?
> 예외를 둘 수는 없다
> 공명정대 그 자체 ㅋㅋㅋㅋㅋㅋㅋ
채팅의 분위기가 한 층 가벼워지고, 팀원들의 분위기가 살짝 무거워진 상황.
“아무튼, 영혼의 제단은 한타가 필수적인 맵이니까 한타 구도나 좀 짜 보죠.”
한타라는 말에 단천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그러고 보니. 천마님은 한타 해 본 적은 있나요?”
BJ천마는 탑의 붙박이 지박령이다. 게다가 탑에 갱을 오는 것은 물론이고 팀원이 오는 것 자체도 불쾌해하는 탓에 BJ천마가 한타를 하는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즉 BJ천마의 한타능력은 미지수인 상황.
그런데 지금은 그런 BJ천마가 강제로 한타를 강제당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번 영혼의 제단에서는 어떻게 하셨어요?”
“라인이 합쳐지자마자 모조리 대가리를 쪼개 버렸지.”
“···그렇군요.”
결국 한타를 안 해 봤다는 말이다.
한타를 거의 해 보지 않았다는 BJ천마의 말에 팀원들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상대편의 에이스인 백건은 한타능력에서도 그 능력이 엄청나다.
반면 자신들의 편에 있는 BJ천마는 한타를 해 본 적이 없는 플레이어인 것이다.
“이기기 힘들지도.”
“그래도 열심히 해보죠. 혹시 모르는 거니까.”
헛소리를 지껄이는 팀원의 말에 단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단천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비단 대인전만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대다의 대인전에서도 불패였던 것이 바로 자신, 단천이었다.
“이번 전술. 본좌가 짜도록 하지.”
“괜찮을까요? 한타 안 해 보셨다면서요.”
“괜찮다.”
단천의 눈이 빠르게 팀원들과 적의 캐릭터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열 명의 캐릭터들은 1개월간의 게임을 하며 머릿속에 모조리 들어와 있는 상태. 단천은 머릿속으로 어떻게 팀원이 움직여야 될지를 떠올렸다.
단천은 눈을 감았다. 깊은 심상 아래에서, 열 명의 캐릭터가 전투를 시작했다.
“믿고 해도 괜찮을까.”
“어차피 랭크 마지막 판이잖아. 1위 걸려있는 사람이 전략 짜는게 제일 깔끔하고 좋지.”
“나는 이거 이겨야 10위라니까? 내 10위도 이번 판에 걸려 있어!”
“그럼 천마님이 전략 다 짜면 그대로 움직여주는 걸로.”
“이야기 좀 들어!”
“확실히 그게 깔끔하겠네요.”
“2위까지만 기억하는 빌어먹을 세상···.”
팀원 한 명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세상은 가장 높이 있는 자들만을 기억한다.
1위인 임요환과 2위인 홍진호만을 기억하는 냉혹한 것이 바로 세상인 것이다.
애매한 서열 10위따위는 누구도 관심없는 것이 바로 세상의 법칙.
그렇게 팀원 한 명이 세상의 순위제에 대해서 근본적인 우울함을 내뱉어나가고 있는 중에. 드디어 BJ천마의 눈이 뜨여졌다.
“지금부터. 전략을 설명하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