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코인이 뭔데 (3)
“내 이름은 앤더슨이오. 보시다시피 금속 성형 및 가공 일을 하는 사람이외다.”
단천의 추궁과혈이 끝나자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앤더슨이라고 소개했다. 고분고분하기 그지없는 태도다.
“처음부터 이러면 얼마나 좋아.”
“···그러게 말이오.”
“괜히 서로 시간만 낭비하고. 심지어 본좌는 시간을 낭비했지만 네 입장에서는 본좌의 추궁과혈로 건강해졌다. 그러니 본좌만 손해를 본 셈이지.”
“······.”
납득이 전혀 안 된다는 표정을 짓던 앤더슨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눈 앞의 미친놈과 정상적인 대화를 하겠다는 생각을 털어넘겼다.
“아까 말했다시피 지금 무기를 만드는 일은 하고 있지 않소.”
“이유는?”
“이유는···.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지.”
“인정?”
“그렇소. 인정. 보다시피 나는 동양인이 아니오. 미국에서 나고 자랐지.”
“그런데도 한국말을 굉장히 잘하는군. 다소 격식을 차린다는 느낌은 있지만.”
앤더슨은 전형적인 라틴 계통 남자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가 만드는 무기와 구조물들은 서양 무기가 아닌 동양의 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어 공부를 굉장히 오래 했어서 그럴 거요. 무협지를 좋아하거든. 그래서 한국에 정착했지.”
“정통 무협지를 보려면 중국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닌가? 거기가 본토인데.”
“떽! 걸핏하면 마을 단위로 사람들을 몰살하는 중국 무협이 어디 무협이라고 참칭한단 말인가! 무협의 발원지는 중국이었을지언정 지금의 중국 무협은 무협이 아니란 말이오!”
앤더슨의 호통을 들은 단천의 고개가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확실히 작금의 중국무협은 협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여기서 중국 무협이 근본이라는 소리를 했다면 정신을 차리게 하는 정신개조혈을 눌러 주려고 했는데. 그래도 기본적인 정신머리는 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내가 처음으로 무협지에 입문한 것은 한국에서 온 한인 친구에게 무협지를 빌리면서부터였지.”
대부분 그렇게 시작한다. 단천도 무협지를 읽기 시작한 것은 옆 침대의 아저씨가 읽고 있는 사조영웅전을 빌려서 읽으면서 무협에 입문했으니까.
“무협의 세계는 방대하고 심오하더군.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나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역시나 무기였소. 나는 곧바로 무기를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았소. 처음에는 즐거웠지. 무기들을 만들며 어떻게 더 좋은 무기를 만들지, 어떤 재료를 쓰고 어떻게 단조해야 할 지를 배우려 대학도 재료공학을 전공했소. 하지만 즐거움은 그리 길지 않았지.”
“평가 때문인가?”
“···바로 그렇소. 내가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무기를 만들건, 사람들의 눈에 내가 만든 무기는 그저 서양인이 오리엔탈리즘에 취해 만든 특이한 무기 이상이 되지 못했소.”
앤더슨은 휴대폰을 꺼내 기사를 내밀었다.
[휼륭하기 그지없는 오리엔탈리즘의 향연!]
기사 안에 보이는 무기들은 중원에서도 꽤 괜찮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수준의 무기들이었다. 서양의 영향이라고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순수한 동양의 미학을 담고 있는 무기들.
그런데도 그가 받은 평가라고는 그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소리뿐.
“게다가 무기를 만드는 것 자체도 우스운 일 아니오? 더 이상 검, 창, 도와 같은 무기를 쓰는 사람도 세상에 없는데 말이오.”
“그야 그렇지.”
“그리고··· 세상에 무공은 실존하지 않소. 그러니 내 무기들도 쓸모없는 셈이지.”
앤더슨의 눈은 죽어 있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에는 열심히 하다 보면 진짜 무림인을 만날 수 있을까 했는데, 그렇지도 않더군. 당연한 일이지. 세상에 정말로 무공이란 게 존재할 리가 없으니까. 너무 오래 망상에 젖어 산 셈이야. 그러니 이제 꿈 같은 건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 학생들이나 가르쳐 볼까 하는 참이오.”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졸업하고 재료공학 쪽에서 발표한 논문이 꽤 괜찮은 평가를 얻었거든. 칼텍에서 교수 제안이 들어왔소.”
칼텍이라. 들어본 적도 없는 학교 이름이다. 단천은 구석에서 버려져 있는 무기들을 돌아봤다. 이름도 없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살아가기에는 아쉽기 그지없는 재능이다.
물론 스스로가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은 바에야 딱히 단천이 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았다. 대장장이로서의 자존심이나 긍지가 남아 있는 상황이라면 잘 설득해서 무기를 만들도록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장장이로서의 자아가 아예 죽어버린 사람에겐 단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아무리 단천이라도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렇게 단천이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먹은 찰나. 앤더슨의 푸념이 단천의 귀로 들려왔다.
“내 목표는 천하제일의 무기 장인이 되는 것이었소. 하지만 코쟁이로 태어난 양키에게는 너무 커다란 목표였던 게지.”
“···천하제일이라.”
픽. 단천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뭐가 우습지?”
“천하제일을 목표하는 자가 그렇게 쉽게 포기한다는데. 우스울 수밖에.”
“뭐라고?”
“천하제일을 목표하는 자가 그리도 쉽게 포기하는 것이 우습다고 했다.”
단천의 말에 앤더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단천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의 평가에 휘둘려서 천하제일이라는 이름을 포기한 자가 천하제일을 입에 담는 것이 아니다.”
단천은 짜증이 나 있었다. 지금 단천은 21세기의 한국에 와 있었다. 무공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무공 수련을 거의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 바로 지금의 21세기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단천은 계속해서 무공을 쌓아 나가고 있었다. 비록 육도천이라는 존재가 있기는 했지만, 육도천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계속해서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중원에 가기 전에도 단천은 무공에 대해서 언제나 생각해 왔었다. 몸뚱아리도 비루하고 내공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 때에도 단천은 진지하게 몰두했다.
누군가 비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롯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만이었다.
“세상에 무공이 없으니, 그리고 검을 쓸 사람이 없으니 무기를 만드는 것이 의미없다고?”
마주할 자가 없다는 것은 정진을 그만둘 이유가 되지 않는다. 단천 자신에게는 최소한 그랬다. 또한 중원에서 자신의 곁에 있던 자들도 모조리 그랬다.
“세상에 혼자 남아도 수련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자만이 무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천하제일을 입에 담는다는 놈이, 남의 평가에 꺾인단 이유로, 무기를 써 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무기 만드는 것을 그만둬? 그런 자에게는 천하제일을 입에 담을 자격조차 없다.”
“궤변이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무기에는 아무 가치도 없어!”
“세상의 그 누구도 몰라도, 너 스스로가 알지 않는가.”
“······.”
“네가 검을 두드리고, 검을 만들고, 만족스러운 검을 벼려 냈다는 것을. 세상 그 누가 보고 있지 않아도 너 자신만은 보고 있다.
그러니, 무인이 없는 세계의 천하제일인, 고금제일인또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무의 끝에 가 도달하는 것을 인정할 자가 없다는 것이, 무의 끝을 보는 것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니까.”
단천의 말에 앤더슨의 몸이 떨렸다. 눈 앞의 청년이 하는 말은 궤변에 불과했다. 세상천지에 혼자 남아 있는 것에 가치가 존재할 리가 없다.
‘하지만. 이 박력은 무어란 말인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은 고작 스물을 조금 넘겼을 법한 청년이다. 그런데도 그에게서 뿜어져나오는 박력은 실로 엄청났다.
마치 앤더슨이 무협소설에서 자주 봐 왔던···.
“···천마?”
“그래도 보는 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군.”
“그렇다는 것은 무공도···.”
앤더슨의 눈에 자그마한 반짝임이 보이고 있었다. 조금마한 불꽃만 있다면 활활 타오를 수 있는 열정.
단천은 바닥에 있는 검을 잡아들어 내공을 불어넣었다.
우웅.
두 자가 넘는 길이의 검기가 부러진 검의 끝에 너울거렸다.
“검기···?”
“그래. 네 말대로 검기다.”
“무공이 정말로 있다고?”
검기를 본 앤더슨의 눈에 열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
“정말로 세상에 무공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앤더슨은 산타할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어른의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자네는.”
“맞다. 완전히 홀로인데도 계속해서 무공을 수련하고 있지.”
앤더슨은 단천을 바라봤다. 눈 앞의 청년도 자신과 같은 신세였다. 세상에 무공을 쓰는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유일한 무공의 사용자. 다른 점이 있다면 앤더슨 자신이 쓸모없다면 포기했다는 것과 달리 그는 혼자 남았음에도 계속해서 정진해 오고 있다는 것.
“···내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군.”
단천은 자신이 말한 것을 그대로 실행하고 있었다. 앤더슨은 말도 안 되는 말이라고 중얼거리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더 부끄럽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해야겠지.”
“안다니 다행이군.”
“끝까지 한 마디를 좋은 말을 안 해 주는군.”
“본좌에게 좋은 말을 듣고 싶다면 최소한 천하제일의 자리에 오르고 말을 하도록.”
앤더슨은 껄껄 웃었다. 하긴, 남이 좋은 말을 해 주냐 아닌가가 무에 중요하던가.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을.
“자네의 무기를 내가 만들어줘도 되겠나?”
단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의 표시였다.
일어나서 단천의 몸에 다가선 앤더슨은 단천의 몸에 줄자를 이리저리 대어 보기 시작했다. 팔과 다리의 길이를 측정해 어떤 무기가 어울릴지를 측정하는 과정이었다.
“무기는 어떤 무기를 쓰지?”
“검.”
“물론 그렇겠지.”
앤더슨은 널부러져 있던 종이에 무기를 그리고 지우기를 한참을 반복했다. 그렇게 무기를 떠올리고 그리는 것을 한참을 반복하던 앤더슨은 마침내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무기를 그려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모양은 어떤가?”
“잘 잘리면 괜찮다.”
“이런 썩을 놈의 자··· 그놈의 침은 왜 또 꺼내드는 건가?”
“정신교육이 좀 필요한 게 아닌가 싶어서.”
앤더슨의 동공이 공포로 잠시 떨렸다. 말이 안 통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던 탓이다.
“무기는 언제쯤 나오지?”
“대략 두어 달쯤 걸릴 걸세.”
“······.”
“침을 그렇게 들어 보여도 두 달 걸리는 게 사흘로 줄어들고 그러지는 않아!”
“······.”
“위협적으로 노려봐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걸세!”
쯧. 단천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면 검술 수련은 꽤 오래 못하는 건가.”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세.”
앤더슨이 벽면에 있던 버튼을 누르자 벽면 한 곳에 있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고 드러난 곳은 거대한 병장기창이었다.
“호오.”
“마음을 접으면서 만들었던 무기들을 죄다 보관해놨던 곳이 바로 이곳일세. 쓸 만한 검들을 몇 자루 챙겨가서 쓰면 될 걸세.”
단천은 지체없이 병장기창에 달려가 눈에 보이는 검들을 모조리 집어들기 시작했다.
“아니. 몇 자루만 집어가라고! 이 빌어먹을 자식아!”
수십 자루 검을 집어드는 단천을 향해 앤더슨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물론 단천은 앤더슨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