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3:1 (3)
서걱! BJ천마의 검이 앞을 가로막던 원숭이의 몸을 반으로 갈랐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사냥이 너무 쉽군.”
물론 사냥이 쉽다는 것은 단천만의 생각이었다. ‘혹한의 성지’를 플레이해본 플레이어들은 죄다 몬스터들의 밸런스가 맞지 않다는 소리를 누구나 하고 있었으므로.
> 이 맵 해 봤는데 몬스터 사냥 개어렵던데
> 전반적으로 맵 밸런스가 이상하던데 이렇게 쉽게 사냥이 되냐
> 그것이 ‘컨트롤’이니까
> 천마님에게 하드 난이도는 응애난이도와 구별되지 않는다
그렇게 단천이 사냥이 쉽다는 불평을 하고 있던 중에, 메시지 하나가 더 올라왔다.
[얼음의 가호가 부여되었습니다. 공격력 +3%]
[공격에 냉기 속성이 추가됩니다.]
“얼음의 가호?”
단천은 검을 꺼내들었다. 확실히 박도 끝에 은은한 한기寒氣가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자 한기를 따라 공기가 얼어붙는다. 북해빙궁의 기운과 유사한 기운이다.
“재미있군.”
BJ천마의 몸이 미로의 앞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일정 거리 안으로 접근하자 얼음 몬스터가 깨어나 공격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BJ천마는 반응하지 않은 채 그대로 계속 뜀박질을 이어나갔다.
> 걍 무시하고 달리는 거임?
> 튀어봤자 몬스터들 끝까지 따라올건데;
크르르르!
뜀박질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 전체가 얼음 몬스터들로 가득찼다.
> 상대가 너무 많지 않음?
> 지금 레벨로 감당 되냐 ㄷㄷ;
가득 차 있는 몬스터들을 보고 채팅창에서는 걱정이 들끓었지만 정작 BJ천마는 태연했다.
“숫자가 이 정도는 돼야 상대를 할 만하지.”
한 마리씩 줄줄이 상대하는 것은 단천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
“어차피 상대해야 한다면 한 번에 몰아서 사냥하면 끝나는데. 구태여 한 마리씩 잡을 이유가 없다.”
> 대체 누가 그런 생각을 해
“본좌가.”
단천의 몸이 얼음으로 만들어진 몬스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어어!
얼음으로 만들어진 몬스터들의 팔다리가 BJ천마를 향해 뻗쳐들었다.
피할 곳 없는 맹공. 하지만 단천의 발걸음은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로웠다.
곤륜파의 비전신법인 유운신법이 BJ천마의 발에서 펼쳐졌다.
타다다닥!
물론 천공에서는 내공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유운신법의 표횰함은 재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상관없다.’
신법이라는 것은 내공만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내공이 없어도 그 안에 있는 묘리만큼은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이 경지에 달한 자의 발에서 펼쳐지는 신법의 묘리는 실로 절공이라고 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인 것이다.
구름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단천의 몸이 얼음으로 만들어진 몬스터들의 공격을 피해냈다.
> 어케 피했냐
“잘 보고 피하면 된다.”
> 어케 저걸 잘 보는 거냐고
“집중하면 된다.”
> 이해하려고 하지 마셈
> 그냥 인간 아니구나 하고 보면 편함
공격을 피해낸 단천의 박도가 몇 번의 선을 공중에 흩날렸다.
파바바박!
검이 스쳐지나갔지만 그 어떤 몬스터의 몸도 쪼개지지 않았다.
> ?
> 뭐한 거임?
“보면 안다.”
크워어어어!
공격이 빗나갔다는 것을 인지한 몬스터들이 다음 공격을 하기 위해서 자세를 고쳐잡았다.
아니, 고쳐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자세를 고쳐잡을 수가 없었다. 공격을 펼쳤던 몬스터들의 팔이 한 덩어리가 되어 엉겨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냉기를 사용해서 놈들의 팔을 모조리 기워붙였지.”
그워어어!
쩌저적! 쩌적! 몬스터들이 발악을 할 때마다 몬스터들의 몸에 만들어진 균열이 퍼져나갔다.
퍼석!
거미줄처럼 퍼져나간 균열의 중심에. 박도 한 자루가 박혔다.
쩌저저저적!
콰아아앗!
이미 커질 대로 커진 균열은 단 한 번의 단순한 공격도 견디지 못하고 모조리 부서져내리기 시작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6이 되었습니다!]
[궁극기를 습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리고 화면 가득 떠오르는 레벨 업 메시지.
> ㅅㅂ 내가 방금 뭘 본 거여 ㅋㅋㅋㅋ
> 와 이걸 이렇게도 사냥이 가능하구나
> 임기응변 지렸다 ㅋㅋㅋ
“간단한 거지. 머리를 사용하면 촌부도 일류 고수를 이길 수 있는 법이니까. 너희도 편하게 싸우고 싶다면 뇌를 쓰는 버릇을 들이도록.”
> ㅁㅊㄷ
> 이것이 진짜 재능···?
> 엄마 난 커서 천마가 될래요!엄마 난 커서 천마가 될래요!엄마 난 커서 천마가 될래요!엄마 난 커서 천마가 될래요!
“그럼. 지나가도록 하지.”
단천은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미로를 천천히 걸었다. 몬스터들을 몰아잡을 대로 몰아잡은 탓에 얼음 조각상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미로를 얼마나 걸었을까.
얼음으로 만들어진 수정구를 들고 있는 상용펀치가 보였다.
[빙결의 핵]
[폭발적인 빙결 능력치를 부여합니다!]
“굉장한 속도로 왔군. 아니면 혼자서 게임하는 쪽의 난이도가 더 낮은 건가?”
상용펀치의 옆에는 함께 왔어야 할 두 명의 플레이어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두 명은 어디에 있지?”
“컨트롤이 별로 좋지 않더군. 여기까지 오던 중에 죽었어.”
“함께 싸우다가 죽었다고?”
“별로 도움도 되지 않는 녀석들이었지.”
늑대인간 형상의 상용펀치가 그르륵거렸다.
> 죽었다고? 그냥 몬스터랑 싸우다가?
> ㅉㅉ 그냥 인증 도용이었나 보네
> 무슨 몬스터 사냥하다가 죽어 ㅋㅋㅋㅋ
채팅창에서 순식간에 비난 의견이 일어났지만 단천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잠깐 봤던 모습만으로도 그들이 최소한 프로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으니까.
“도움이 안 됐다라.”
“그래. 도움이 전혀 안 되는 놈들이었다. 그래서 혼자서 다 뚫고 여기 도착했다.”
> 그래도 쟤는 진짜인가 본데?
> ㅇㅇ 이러니저러니해도 천마님보다 빨리 여기 도착했으니까
> 이 정도 1:1이면 볼만할듯?
순식간에 채팅창에서 상용펀치의 실력에 대해서 추측하는 채팅들이 우후죽순 올라왔다. 대부분은 혼자서 여기까지 온다니 실력이 대단하다는 찬양글이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BJ천마보다도 먼저 중앙에 도착한 것이 바로 상용펀치였으니까.
단천의 눈은 상용펀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찬찬히 상용펀치를 바라보던 단천의 눈이 상용펀치의 손가락 밑에 있는 살점들에 가 꽂혔다.
“같이 몬스터를 사냥해서 전진하다가, 그들을 죽인 건 아니고?”
“그럴 리가.”
“그러면, 네 손가락 밑에 있는 살점은 뭐지?”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몬스터는 모조리 얼음으로 만들어진 조각상들. 적과 어떤 격전을 펼쳤든지 피와 살점이 묻어있을 수 없는 것이다.
> ???
> 뭐야 진짜네
> 같은 편 죽인 거임?
> 미친놈이네;;
채팅창에서 호의적이기 그지없던 채팅창의 의견이 바로 곤두박질쳤다.
상용펀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용펀치가 노린 것은 거의 1:1의 상황인데도 자신이 BJ천마보다도 먼저 중앙에 도착했다는 것을 BJ천마의 시청자들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시청자들에게 실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는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순식간에 허사가 됐다.
“쯧.”
이렇게 된 이상 1:1로 싸워서 BJ천마를 이기는 것만이 길이다. 그것도 최대한 동등한 조건을 연출해서.
상용펀치의 입이 열렸다.
“지금 레벨은 얼마지?”
“9.”
“나도 9인데. 우연이로군.”
상용펀치는 말을 마친 다음 자신의 상태창을 바라봤다.
[현재 레벨은 11입니다.]
지금 자신의 레벨은 11이다. 사냥 자체도 많이 할 수 있었거니와 마지막에 비밀가면과 여행하는코끼리를 처치한 덕분에 얻은 경험치 덕분이다.
고작 2레벨의 차이지만 11레벨 이전과 11레벨은 확연하게 달라진다. 11레벨을 기준으로 캐릭터의 최고 장점인 궁극기가 강화되기 때문이다.
‘이기기 편하겠군.’
상용펀치는 손에 들고 있던 수정구를 바닥에 놨다. 빙결핵의 능력치가 주는 능력치 상승은 실로 폭발적.
‘그런 능력치를 받고 BJ천마를 이겨 봤자 실력이 아니라 능력치빨이라는 소리가 나오겠지.’
최대한 동등하고 비슷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 상용펀치의 목적이었다.
“쓰지 않고 덤비면 후회할 텐데.”
“정정당당한 상황에서 1:1로 싸우고 싶으니까.”
“거짓말도 잘 하는군. 최대한 유리한 상황에서 싸우고 싶으면서.”
상용펀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BJ천마의 말이 실제로도 사실이었으니까. 상용펀치가 지금 플레이하고 있는 ‘웨어울’또한 그의 주력 캐릭터가 아니다.
주력캐가 아닌데도 웨어울을 구태여 상용펀치가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1:1에서 강하니까.
흡혈과 공격 속도, 1:1에 특화된 스킬과 능력치셋이 갖춰진 것이 바로 웨어울이었다.
“네놈이 이기고 싶어하는 마음은 잘 알겠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저 빙결의 핵을 사용해도 좋다. 쓴다고 해서 뭐라고 하지도 않을 테니.”
이죽거리는 말투가 아니다. 진지하게 ‘빙결의 핵’을 써도 자신을 이기지 못할 거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이다.
“내가 꽤 실력 있는 프로거든. 아마추어 이기는 데 추가 버프따위는 필요없다.”
“프로라는 이름에 자부심이 어마어마한 모양이군.”
BJ천마의 입에는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무릇 프로라면 직함이 아닌 실력으로 증명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듯한 비웃음이었다.
그 비웃음에 상용펀치의 열등감이 폭발했다.
“이 새끼가!”
[클로 슬래쉬]
웨어울의 길다란 손톱이 단천을 향해 휘저어졌다.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파공음.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이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심안을 가지고 있는 단천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단천의 발에서 유운신법이 펼쳐졌다. 둘 간의 거리가 좁혀지자마자.
퍼어억!
단천의 검이 상용펀치의 몸에 박혀들었다. 상용펀치의 몸에서 피가 솟아올랐다.
“이런 씨발!”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BJ천마는 꽂힌 검을 뽑아들고 여유롭게 뒤로 물러났다.
본래라면 계속해서 놈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공격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놈은 같은 편을 죽였다. 그 사실이 단천의 심기를 자극한 탓이다.
중원에서도 단천은 웬만한 일로는 분노하지 않았다. 그저 수련을 할 상대가 없거나 아침밥에 김치가 없다거나 서윤학이 백두산을 장백산으로 부른다거나 하는 중대한 일이 아니면 화를 내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런 관대하기 그지없는 단천이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동료를 죽이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 단천이 있는 곳은 무림이 아니었다. 함께하는 동료들도 등을 맞대고 싸워온 동문이 아니며, 잠깐 스쳐가는 인연에 불과한 것이 바로 팀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단천의 분노를 줄일 이유는 되지 않았다. 분노란 것은 감정. 천마라는 위는 상황과 조건을 따라 감정을 제어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으므로.
단천은 검에 묻은 피를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양 털어낸 다음 입을 열었다.
“다시 덤벼라. 격의 차이를 보여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