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스토리 모드 (1)
“어이가 없군.”
게임이 종료되고 만신전에 돌아오자 박정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봤나?”
“내 몸을 사용했는데 못 봤을 리가 없지! 정말 말도 안 되는 무위야! 심지어 궁극기도 사용하지 않은 채로 이런 도살극을 벌이다니. 살다 살다 이런 건 처음 보는군!”
> ㅇㅈ
> 쌉인정
[야수도 박정이 당신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야수도 박정이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합니다.]
“그대에게 흥미가 생겼다. 나와 잠시 이야기를 하지 않겠나?”
“사내 놈끼리 무슨 이야기.”
“그··· 너는 궁극기의 사용법도 배워야 하지 않나?”
“필요 없다.”
BJ천마는 매몰차게 이야기를 거절했다. 애초에 저런 대화를 하지 않고도 게임을 할 수 있다. 그러니 굳이 이야기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이다.
궁극기?
“본좌의 존재 자체가 궁극이거늘. 무슨 궁극기 타령이더냐.”
> 패기샘 폭발 ㅋㅋㅋㅋ
> ‘본좌의 존재 자체가 궁극’
> 패기 명언집에 명언 1개 추가 ㅋㅋㅋㅋㅋ
> BJ천마 패기 명언집 (총 12832page)
BJ천마의 반응에 박정의 몸이 살짝 움찔거렸다. 설마하니 자신과 이야기를 하는 것을 거절할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그럼. 계속해서 도살극을 진행해 볼까.”
BJ천마는 다시 게임을 돌리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일반 게임]
[랭크 게임]
“그러고 보니 방금 한 게임은 일반 게임이었지.”
단천의 목표는 물론 일반게임이 아니라 랭크 게임. 그것도 랭크 게임의 1위가 목표였다. 레일 서바이버에서도 그랬듯이. 자신이 최강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랭크 게임 실행.”
[랭크 게임을 실행할 수 없습니다.]
“뭐?”
단천은 랭크 게임 버튼을 바라봤다.
랭크 게임은 누를 수 있다는 듯 초록색 버튼으로 활성화되어 있다. 반면 ‘랭크 게임’버튼은 회색으로 물들어서 비활성화되어 있었다.
[랭크 게임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최소 1명의 영웅의 스토리를 완료하셔야 합니다!]
> 다른 AOS도 랭크 하려면 일정 이상 게임을 해야 함
> 숙련도가 일정 이상 되면 랭크가 해금되지 보통?
> 캐릭터 숙련도도 없는 놈들이 랭크 오면 민폐니까 당연하지
FPS는 스킬이나 게임에 대한 숙련도 없이 직관적으로 할 수 있는 게임인 까닭에 랭크 게임에 대한 진입 장벽이랄 게 딱히 없는 경우가 많았다. 어뷰징이나 핵 사용으로 인해 플레이타임을 강요하는 레일 서바이버 정도가 그 예외에 속할 뿐이었다.
반면 AOS는 게임 내에서 배워야할 것이 산더미처럼 많다. 라인 유지, 갱킹 타이밍, 베이트와 한타 포지셔닝, 맵 숙련도 등.
이러한 수없이 많은 진입장벽들이 있는데도 뉴비에게 랭크를 열어주면 게임이 아수라장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
자연스레 랭크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게임수를 채우거나, 숙련도를 증명하는 시스템이 AOS에는 존재하게 됐다.
“확실히. 게임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인간이 랭크에 오는 것은 민폐가 되기 쉽지.”
납득한 단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 왜 본인은 포함 안 되는 것처럼 이야기함 ㅋㅋㅋㅋㅋ
> 당신도 AOS 전혀 모르잖아
> 너같은 사람 오지 마라고 막아놓은 거라고 ㅋㅋㅋㅋ
[천마강림 님이 87,000원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갈!!! 천마님이 방금 판도 초하드캐리로 게임 끝내셨는데 악의적인 선동을 하는 무엄한 자들아!!]
> 이거맞다
> 42킬 0데스 0어시가 장난으로 보이냐?
> 게임을 모르는데 어떻게 하드캐리 하냐고 ㅋㅋㅋㅋ
> 게임 모름(빡캐리는 함)
채팅창에서 자그마한 소요가 진압되는 사이에 BJ천마는 짧게 머리를 긁었다.
“이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로군.”
> 스토리 완료하라는데 왜 해결방법이 두개가 되냐
“하인라인 사장 놈에게 전화를 걸어서 해결하는 방법도 있지.”
> ??????
> 해결방법의 상태 무엇
> 하인라인 사장이랑 친하신가 봐요
“친하다기보다는, 안면이 있지.”
채팅창의 천마신교 예비교도들은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실제로 BJ천마는 김태흠과 통화를 통해 이 상황을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화를 하고, 랭크 게임을 열어달라고 하고, 다시 게임에 접속해서 랭크 게임을 시작하는 게 더 귀찮다.
“쯧. 그냥 스토리를 진행하는 게 좋겠군.”
“오. 드디어 이야기를 할 생각이 든 건가!”
BJ천마가 대화를 하겠다는 말을 하자 박정이 반색을 표했다.
“최대한 빨리 이야기하도록.”
“네가 꽤나 성미가 급한 사람처럼 보이니, 요점만 이야기하지. 우선 이 몸의 궁극기를 써 봐야 하네.”
“궁극기라.”
그러고 보니 게임 안에서도 다른 캐릭터들이 조금 더 위협적인 스킬을 쓰는 것을 몇 번 봤었다.
“무혼이여. 궁극기를 쓰기 위해서는 레벨이 6 이상이 되어야만 하네.”
화르르륵!
박정의 몸에서 불꽃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레벨 업의 이펙트였다. 이펙트가 다섯 번 반복되고 나자 박정은 박도를 꺼내쥐었다.
“자. 이제 본좌의 몸에 들어와 보게.”
[야수도 박정의 몸에 빙의합니다.]
[궁극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다음에는?”
[마음 속으로 궁극기를 사용하겠다고 생각하면 된다.]
“간단하군.”
일반 스킬을 사용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방법이다.
[궁극기 : 몸에 힘주기가 발동되었습니다!]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박정의 몸 이곳저곳에서 실핏줄이 돋아났다. 단천은 검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확실히. 몸이 일시적으로 빨라지는군.”
근력, 체력, 순발력을 비롯한 전반적인 신체능력이 모두 향상됐다.
> 너무 심심한 궁극기네
> ㄹㅇ
> 캐릭터 궁극기 치고는 너무 별 거 없다.
채팅창에서 궁극기가 심심하다는 채팅이 꽤 올라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다른 캐릭터들의 궁극기는 엄청난 이펙트를 동반하는 경우가 대다수였기에, 단순히 능력치만 올라가는 게 끝인 박정의 궁극기는 별 게 없어 보이는 게 당연했다.
그런 부정적인 여론이 채팅창에 올라오고 있을 때. 단천의 입이 열렸다.
“한 번. 제대로 움직여 볼까.”
단천의 손에 잡힌 박도朴刀가 강맹하게 주변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검의 움직임은 춤추듯이 움직이는 단천의 발걸음과 합쳐져서 주변에 중후한 검광을 아름답게 흩뿌렸다.
다른 궁극기처럼 화려한 이펙트는 없었지만. BJ천마의 검무는 그 자체만으로도 화려한 이펙트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ㅗㅜㅑ
> 이 궁극기 어디서 배우나요??
> 못배워···
> 네?
> 못배운다고···
> 걍 BJ천마 움직임이 궁극기 이펙트인데?
시청자들은 BJ천마의 움직임에 매료돼 있었다. 평소에 BJ천마가 보여주는 공격들은 대부분 경쾌하고 빠른 움직임을 보여줬었다.
하지만 지금 보여주는 박도는 걸음걸음이 무겁고 웅혼한 느낌을 뿜어낸다.
화려한 이펙트에 눈이 길들여져 있던 시청자들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는 색다르기 그지없는 맛인 것이다.
[몸에 힘주기의 지속 시간이 만료되었습니다.]
검무가 끝나는 순간에 맞춰서 궁극기의 지속 시간이 만료되었다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이 정도인가.”
[···대단하군. 정말로.]
“나쁘지 않은 궁극기다.”
그냥 이펙트와 데미지만 올라가는 궁극기라면 단천은 굳이 궁극기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초식의 처음과 끝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상황에 맞는 유연한 대처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박정의 궁극기는 능력치를 일시적으로 올려 줄 뿐인 궁극기다. 초식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궁극기.
단천 자신에게 딱 맞는 궁극기라고 할 수 있었다.
[궁극기 습득이 완료되었습니다.]
[야수도 박정의 스토리가 오픈되었습니다!]
궁극기의 지속 시간이 끝나자 빙의가 풀리며 스토리 모드를 진행할 수 있다는 문구가 떠올랐다.
“나의 기술에 대한 이해도는 이미 충분한 것 같군.”
> 시작하자마자 이해도가 충분하다고 하는거 맞냐
> 아니 근데 저 정도 보여줬으면 나라도 이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할듯
> 시작부터 이해도 만렙 ㄷㄷㄷ
“콜로세움. 그러니까 무혼들이 ‘랭크’라고 부르는 전투를 하기 위해서는 영혼과 무혼 사이의 깊은 이해가 필요하지.”
“그 콜로세움을 주최하는 자들은 어디에 있지?”
“저 천상 너머에 있다.”
“아쉽군.”
가까운 데 있었다면 놈들을 협박해서 랭크에 들어가는 건데. 저 멀리 하늘에 있다고 하니 쫓아가서 조져 버릴 방도가 없다.
“운이 좋은 녀석들이군.”
“그게 무슨 뜻이지?”
“별 뜻 아니다. 그러면, 너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내 과거의 이야기를 들어야겠지.”
“역시 그런가.”
“그럼. 이야기를 들을 준비는 됐나?”
[야수도 박정의 스토리를 진행하시겠습니까?]
“그래.”
[스토리 모드를 시작합니다.]
온 세상이 환하게 점멸했다.
***
전환된 장소는 익숙한 지형의 산이었다. 단천 자신도 중원을 통일한 후 고향 생각에 자주 왔었던 산이기도 했다.
주변을 확인한 단천은 팔다리를 바라봤다. 단천 자신의 몸은 아니었다. 근육과 키로 확인하건데, 이 몸은 과거 박정의 몸이다.
“아무래도 이야기를 그냥 듣기만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군.”
그나마 다행이었다. 앉아서 남의 이야기를 한참동안 듣고 있는 것은 단천의 성미에 맞지 않았으니까.
겸사겸사 시청자들도 지루해할 테고.
그렇게 자신의 몸을 확인하고 있는 BJ천마의 귀로 박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장백산에서 태어났다.]
“장백산이 아니라 백두산이다.”
[···뭐?]
“장백산이 아니라 백두산이라고.”
[아니. 장백산이 장백산이지.]
“백.두.산.”
중원에서도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꽤 있었다. 구파일방, 사대세가, 사흑련, 새외, 장강수로십팔채와 녹림. 거기에 일반 민중들까지.
백두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거의 단천 혼자뿐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국경분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옛날인 까닭에 장백산과 백두산이 혼용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단천은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부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남들이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부르는 것을 좌시할 생각또한 전혀 없었다.
단천은 백두산을 백두산으로 부르기 위한 사회운동에 착수했다.
자고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했던가.
그러니 시작은 가장 가까운 천마신교부터였다.
─ 지존. 장백산을 백두산이라고 부르라뇨? 그건 동이족들이나
부르는 이름··· 아악! 아아악! 장백산이 아니라 백두산! 백두산입니다! 저희 부모님도 백두산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다음은 구파일방, 사흑련, 새외 순으로 단천은 ‘백두산’이라는 명칭이 완전히 정착되도록 운동을 이어 나갔다.
─ 문서에 적혀 있는 장백산을 죄다 백두산으로 바꾸라고? 제갈세가에 있는 문서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 알 바 아니라고? 이 빌어쳐먹을 악적 자식아! 이제는 하다 하다 되도 않는 걸로 시비를 걸어대는구나! 오냐! 오랜만에 계급장 떼고 한판 붙자! 개자식아!
제갈운과 제갈세가의 사소한 반동 행위도 있었다. 하지만 정의는 승리하는 법이라던가. 결국 평소처럼 패퇴한 제갈운은 얌전히 장백산을 백두산으로 바꾸는 데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단천의 노력의 결과 중원, 최소한 무림에서만큼은 장백산을 입에 담는 미친 놈은 완전히 박멸됐다.
비로소 ‘백두산’이라는 당당한 이름이 완전히 정착된 것이다.
한 명의 작은 움직임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때에 단천은 깨달았다.
그리고 이 ‘장백산 백두산으로 부르기 운동’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장백산이 아니라 백두산이다. 알겠나.”
[···그래. 나는 장백··· 백두산에서 태어났다.]
BJ천마의 반쯤 뒤집어진 눈에 박정이 빠르게 수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