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탑 (2)
> 와 그냥 한방에 죽네
> 역시 천마님이시다 ㅋㅋㅋ
> 아니 상대가 딱 봐도 뉴비인데 찬양 에반데 ㅋㅋㅋㅋㅋ
> 피곤H면 프로명이잖아
> 야 프로명 쓰면 다 프로냐?? 딱 봐도 아이디 선점한 뉴비잖음
“프로건 아니건 큰 차이는 없다 본좌의 앞에서는 똑같이 하늘 아래의 미물일 뿐이니까.”
> 그건 맞긴 해
[미니언이 생성됩니다.]
단천이 채팅창과 대화를 하고 있는 사이에 미니언이 생성되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죠죠웨건 님이 10,000원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미니언 : 라인에서 일정 시간마다 리젠되는 공성 NPC들.]
> 고마워요 죠죠웨건!
> 어허 설명 안 해 줘도 천마님은 다 알고 계시는 것을!
앞과 뒤에서 파랑, 붉은 색의 옷을 입고 있는 병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라인의 한 중간에서 부딪힌 병사들이 칼과 화살을 들고 싸움을 시작했다.
“저것들이 미니언인가 보군.”
단조롭고 기계적인 움직임만을 반복한다. 실로 조악하기 그지없는 움직임들이다. 모델링만 사람이지 인형이나 다름없는 움직임.
단천은 금세 미니언들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 빨리 치셈 뭐함
> 막타 치면 경험치 더 많이 들어옴
> 경험치 줄줄 새욧!!!
미니언들은 그냥 죽었을 때도 경험치를 주지만 막타를 치면 더 큰 경험치와 보상을 준다.
그러니 시청자들이 미니언을 때리지 않는 BJ천마에게 미니언을 잡으라는 조언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조언이라는 것은 듣든 말든 듣는 자의 자유지만.
“저런 잡스러운 것을 죽이는 데 심력을 낭비하는 게 더 큰 손해다.”
> ······
> 그럴 수 있지
“이 새끼···!”
“좀 덜 잡스러운 놈이 왔군.”
부활한 피곤H가 다시 라인으로 돌아와 씩씩대고 있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표정이다.
“전력의 차이를 느꼈다면 탑의 자리를 내어놓는 것이 올바른 일인데 다시 돌아오다니. 범우한 자로고.”
> 탑라이너니까 탑이 자리에 맞는 데 아니냐?
> 어허 천마님이 탑에 계신데 누가 감히 탑에 섬??
> 가슴이 웅장해지는 탑신병자다 ㄹㅇ···
“분노하지 마라. 항거할 수 없는 강자에게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
“운 좋게 한 번 이겼다고 나대지 마!”
빠득.
피곤H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탑솔러는 전 포지션 가운데에서 1대 1을 하는 능력치가 가장 많이 필요한 라인이다. 피곤H는 프로 탑솔러다. 어디 가서 탑 라인의 일기토에 패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피곤H는 눈 앞의 뉴비에게 패했다. 그것도 화려한 스킬이나 컨트롤이 아니라 간단하기 그지없는 공격 한 방에.
‘운이 나빴던 건가.’
아니다.
BJ천마라는 인간. 분명히 천공의 무협 모션캡쳐에 참여한 인간이다. 그러니 자신의 스킬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던 거다.
게다가 공격을 피하는 움직임은···.
‘등골이 서늘할 정도였어.’
상대의 움직임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최상위권 프로의 그것과도 맞먹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기억이 맞다면 BJ천마는 AOS를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소문은 사실인 게 확실했다.
눈 앞에 있는 경험치 덩어리인 미니언들을 치고 있지 않았으니까.
‘뉴비가 확실하다.’
피지컬 자체는 인정한다. 하지만 AOS는 단지 피지컬만으로 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닌 것이다.
슈슈슉! 피곤H의 창끝이 빠르게 미니언들의 몸을 찔렀다. 빠르게 올라가는 경험치 바. 그리고 들려오는 레벨업 사운드.
[레벨 업!]
화르륵!
레벨이 오르자 피곤H의 몸에서 레벨 업 모션이 타올랐다. 반면 눈 앞에 있는 BJ천마의 몸에서는 레벨 업 모션이 올라오지 않았다.
킬 경험치를 받고서도 미니언 경험치를 제대로 챙기지 않은 까닭이다.
‘이겼다!’
AOS에서 레벨은 절대적인 지표 중 하나다. 능력치와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이 레벨에 따라 강화되기 때문이다.
특히나 레벨 1과 2는 그 격차가 더욱 도드라진다. 레벨 19와 20간의 차이가 능력치의 격차가 5%라면, 1과 2의 경험치 차이는 2배 가까운 차이가 나기 때문.
“뒈져!”
피곤H의 창이 다시 한 번 BJ천마를 향해 날아들었다. 처음 모션보다 훨씬 더 빨라지고 강맹해진 공격이었다.
피곤H는 BJ천마의 몸이 꿰뚫리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BJ천마의 몸은 창에 꿰뚫리지 않았다.
그저 이전처럼 기묘하기 그지없는 방식으로 움직여 창의 공세를 다시 한 번 여유롭게 피해냈을 뿐.
“본좌의 동작이라 그런가. 확실히 상대하는 게 쉽지만은 않군.”
피곤H가 방금 사용한 기술. 양가창법의 유성비流星飛는 파훼가 간단한 무공이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상대의 노림수와 움직임도 예사로운 편은 아니다. 전문적으로 오랫동안 무공. 혹은 몸의 움직임을 수련해 온 움직임이다.
‘무림으로 따지면 이류에서 일류 정도쯤이려나.’
이류나 일류의 움직임에, 사용하는 초식은 단천 자신이 사용하는 초식.
꽤 재미있는 조합이다.
“이 새끼가! 으라아아아!”
단천이 흥미로워 하고 있는 도중에 다시 한 번 피곤H가 기합을 끌어올렸다.
쉬이이익!
첫 초식인 유성비와 다르게 뱀처럼 창이 움직이며 단천을 향해 날아왔다.
뱀처럼 상대방을 따라가는 창으로 반드시 상대의 목숨을 끊는다고 해서 ‘절명사’라고 불리는 초식이다.
“훌륭한 동작이로고.”
> 자화자찬
> 아니 자기 얼굴에 금칠하고 있네 ㅋㅋㅋㅋ
단천의 몸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피곤H의 창끝이 먹이를 잡아채는 뱀처럼 튀어오르며 BJ천마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즉. 아래에서 위로 튀어오른다는 뜻. 위에서 찍어내리는 중검을 쓰기에 가장 적합한 상황이다.
BJ천마의 박도가 창을 향해 떨어져내렸다. 그리고 동시에 취해지는 ‘세게 베기’.
파아앙!
큰 충격과 함께 피곤H의 창이 튕겨져 나갔다.
레벨의 격차가 만들어내는 차이보다 BJ천마가 만들어낸 중검의 묘리와 ‘세게 베기’가 주는 힘이 더 컸던 것이다.
“이게 무슨···!”
“뭐기는.”
푸욱!
“실력 차이라는 거지.”
[BJ천마가 졸려H를 처치하셨습니다!]
***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두 번째 킬이 난 이후부터는 레벨조차도 BJ천마가 더 우세해진 탓이다.
레벨이 우세할 때에도 이길 수 없었던 상대를 레벨이 불리한 상황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BJ천마가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BJ천마가 학살 중입니다!]
졸려H는 라인에 돌아올 때마다 계속해서 BJ천마에게 킬을 헌납했다.
라인 최전방의 성채도 이미 박살나서 라인전이 압살당했다고 해도 무방한 상태.
라인전은 완전히 끝났다. 아니, 끝났어야 했다.
“돌겠네 진짜···.”
졸려H는 탄식했다. 애저녁에 끝났어야 할 라인전이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은 탓이다.
라인전이 끝나지 않은 이유는 BJ천마가 계속해서 탑에 붙박이처럼 붙어 있기 때문이었다.
보통 이 정도로 라인이 터졌으면 다른 라인으로 가서 영향력을 퍼트리는 게 정상이다.
“야! 너는 다른 팀원들 도우러도 안 가냐?”
AOS는 1:1 게임과 5:5 게임의 양상을 모두 띈다. 초반의 라인전이 끝나면 자신의 영향력을 퍼트려서 온 맵을 장악하는 게 보통의 플레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BJ천마는 내려갈 생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우직하기 그지없게 탑 라인을 끝까지 밀어젖힐 뿐.
“야! 개자식아! 왜 안 내려가! 좀 다른 라인으로 내려가라고!”
“내려가? 왜 본좌가 내려가야 하지?”
졸려H의 말에 BJ천마가 무슨 헛소리라도 듣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곳은 탑이다. 최고의 자리라는 뜻이지. 패배한 네놈이 내려간다면 모를까. 본좌가 내려갈 이유는 하등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로 진지하기 그지없는 표정과 말이다.
“진짜 미친 놈이네···.”
졸려H가 프로 탑솔러로 살아오며 수많은 탑들을 봐 왔지만 그 중에서도 저 인간은 독보적인 수준이다. 실력적인 면으로나, 멘탈적인 면으로나.
탄식을 터트리는 졸려H의 귀로, 희소식이 들려왔다.
[탑님. 탑갱 가도 돼요?]
가장 자유롭게 맵을 돌아다닐 수 있는 정글러가 갱킹을 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라인이 패퇴해서 밀려난 만큼 BJ천마는 깊숙히 들어와 있다.
갱킹에 더욱 쉽게 노출되는 위치인 것이다.
‘1대 1은 몰라도 갱킹으로 2:1을 한다면 승산이 있어.’
“네. 지금 당장 달려오시면 됩니다.”
[호응하시면 들어갈게요.]
호응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BJ천마가 졸려H를 보자마자 달려들었으니까.
“나이스 호응!”
BJ천마의 공격이 터져나오자마자 바닥에서 얼음이 튀어나오며 BJ천마를 덮쳤다.
콰드드득!
빙결계 마법이 BJ천마가 있는 주변을 온통 얼어붙였다.
“와우. 호응 좋았어요! 얼어붙었으니까 이제 연계해서 데미지만 주면 될···.”
쉬이익!
정글러의 말이 다급하게 끊겼다. BJ천마 쪽의 정글러인 ‘트롤하지마’가 나타난 것이다.
“아이씨. 역갱 제대로 왔···.”
서걱!
말을 이어나가던 정글러의 말이 그대로 끊어졌다. 그리고 올라가는 킬 로그.
[BJ천마가 천재마법사 님을 처치하셨습니다!]
“분명···얼렸는데···.”
“살기를 그렇게 내어놓는 암습이 통할 것 같으냐. 당연히 피했지.”
혀를 차며 말을 끝낸 BJ천마는 박도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BJ천마가 졸려H를 처치하셨습니다!]
‘됐다!’
순식간에 두 명을 처치해버린 BJ천마를 향해 트롤하지마는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처음에 실언을 해서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지만, 이번에는 적이 온 갱킹을 제대로 맞받아쳐서 대박 ‘역갱’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제 화해의 제스쳐만 취하면 된다!
“BJ천마님! 나이스 역갱이었네요!”
트롤하지마는 애써 지은 밝은 표정으로 파이팅 모션을 취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잔뜩 찌푸려진 BJ천마의 표정이었다.
“비겁하게 암습을 하지 마라. 네 덕분에 상황이 간단하게 끝나 버렸잖나.”
“간단하게 끝나면 좋은 거 아닌가요?”
트롤하지마의 대답에 BJ천마가 ‘진심이냐’라는 표정으로 화답했다. 싸늘하기 그지없는 반응이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퍼스트 블러드가 났을 때 제대로 킬 로그도 보지 않고 막말한 것은 분명 자신이 잘못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체 뭘 잘못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이 저 미친개한테 뭔가를 잘못했구나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을 뿐.
“앞으로는 탑에 얼씬도 하지 말도록.”
“···네.”
트롤하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탑에는 저런 인간들이 언제나 넘쳐났다.
‘그냥 탑이랑은 상종을 하지 말자. 앞으로는 절대 말도 섞지 말고, 갱도 가지 말고, 주변에는 얼씬도 안 하는 거야.’
세상에 이유없는 탑 혐오자가 한 명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
콰아앙!
[승리하셨습니다!]
상대의 넥서스가 터지며 승리 메시지가 올라왔다.
“빡캐리 감사합니다!”
“버스 잘 타고 가요!”
“캐리 감사합니다!”
“수고.”
팀원들의 감사하다는 팀원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왜인지 정글러였던 트롤하지마의 반응이 싸늘하기 그지없었지만 단천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세상에는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도 가끔은 존재하는 법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승리 메시지를 뒤이어 올라오는 KDA(킬/데스/어시스트) 창.
[42킬 0데스 0어시스트]
무려 42킬이라는 숫자를 기록하고 있는 BJ천마의 KDA창.
> KDA 이거 맞냐 ㅋㅋㅋㅋㅋ
> 혼자서 무슨 FPS 킬뎃 기록하고 있네 ㅋㅋㅋㅋ
> 아니 저건 FPS여도 핵 소리나오는 킬뎃이잖아
> 정보) 천마님은 밥 먹듯 하시던 KDA다
채팅창에서 터져나오는 탄성에 단천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AOS가 어렵니 복잡하니 하더니. 그냥 다 죽이면 이기는 건 똑같군.”
역시 만류귀종이라고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