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베타 테스트 (4)
첫 번째 튜토리얼이 종료되었다는 메시지가 끝나자 BJ천마는 원래의 만신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군이 승리하고 돌아갈 다리를 불태우다니. 위연이 했을 짓을 하고 있군.”
> 스토리가 그런 걸 어떡해
> 못 이기는 걸 이기고 있으면 당연히 스토리가 이상해지지
단천을 쭉 지켜보던 박정이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훌륭하다. 아까의 전장은 네 덕분에 승리에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야수도 박정이 당신의 능력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너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뭐라고 생각하지?”
“더 강한 힘.”
“맞다.”
> 저 사람들한테는 전략 전술같은 건 없냐?
> 힘이 있으면 전략 전술같은 건 필요 없음
> 천마님 방송 처음 보냐? 힘만 있으면 세상 모든 일은 어떻게든 해결되는 법임;
> 힘으로 안 풀리는 일이 있다면 힘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박정과 BJ천마의 생각은 꽤나 닮아 있었다. 단순하기 그지없게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라니. 자고로 무인이라면 저런 마음가짐을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하는 법.
단천은 박정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강한 힘이 있어야만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더 큰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영웅이 가지고 있는 ‘궁극기’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궁극기라. 이를테면 구명절초와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기본적인 기술. 즉 ‘스킬’들을 몇 번 쓰며 느꼈겠지만.”
“본좌는 스킬 같은 것을 쓴 적 없다.”
“···그러고보니 그렇군.”
박정이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몇 번 긁었다.
“일단 스킬을 연습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군. 스킬을 쓰기 위해서는 다시 전장에 가거나 내 몸에 빙의해야 하는데.”
“또 그 귀찮은 잡졸들을 처치하는 건 본좌 쪽에서 사양하고 싶군.”
“그렇겠지. 그대의 능력은 하잘것없는 연습 따위는 시시할 뿐일 테니까. 무혼이여. 당신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어느 정도 알았다. 나, 야수도 ‘박정’은 그대를 내 무혼으로 완전히 인정하는 바다.”
[야수도 박정이 BJ천마를 인정합니다.]
[야수도 박정에게 빙의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게임에서 ‘야수도 박정’을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일반전 게임을 할 수 있습니다!]
메시지를 확인한 단천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 캐릭터를 쓰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튜토리얼’을 통해서 영웅에게 인정을 받는 과정을 치러야만 하는 모양이다.
“자연스럽게 캐릭터의 스킬에 익숙해지기 위한 과정이로군. 꽤나 머리를 쓴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 천마님은 스킬에 전혀 안 익숙해지셨는데요
“그거야 이제부터 배우면 되는 일이지.”
“스킬을 쓰는 법은 단순하다. 어떤 기술을 쓸 지를 머릿속으로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박정이 눈을 감자 검에 흰 색의 기운이 어렸다. 캐릭터 선택 창에서 봤던 ‘세게 베기’의 이펙트였다.
“자. 무혼이여. 이제 나의 몸에 빙의해 기술을 한 번씩 시연해 보도록 하거라.”
[야수도 박정의 몸에 빙의합니다.]
눈을 감았다 뜨자 단천은 야수도 박정의 몸 속에 들어가 있었다. 단천은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역시, 잘 단련된 육체라서 그런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움직일 수 있다.
“잘 만들어진 몸이군.”
기본적인 신체 스펙을 확인했으니 이제 스킬을 사용해 볼 때다. 단천은 손에 들려 있는 박도를 든 다음 머릿속으로 ‘세게 베기’를 떠올렸다.
우웅!
박정이 보여준 것처럼 하얀 기운이 검에 어렸다. 단천은 AOS의 스킬의 존재 자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의 ‘기술’을 흉내내는 것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까닭이다.
하지만 야수도 박도의 스킬은 기술이라기보다는 무기와 신체의 강화에 불과하다.
‘이 정도라면 써 줄 수 있지.’
[이 상태로 검을 내리치면 적에게 평상시보다 더 강한 데미지를 줄 수 있다. 다만 기술을 다시 쓰기 위해서는 ‘쿨타임’이 필요하니 이 부분은 주의하도록.]
박정의 기본적인 설명이 끝나자 BJ천마의 앞에 허수아비 하나가 나타났다.
[자. 저 허수아비를 상대로 기본 기술들을 시험해 보도록. 충분히 튼튼하게 만들어진 영웅용 허수아비이니 쉬이 부서지지는 않을···.]
서걱!
박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천의 검이 허수아비의 몸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그것도 어떤 스킬도 쓰지 않은 채로.
[···어떻게 한 거지?]
“별 것 아니다. 허수아비의 몸에서 약해 보이는 두 곳을 동시에 찢어갈랐을 뿐이다.”
[스킬을 연습하기 위해 만든 허수아비인데. 굳이 그렇게 했어야 했나?]
“네놈이 쉬이 부서지지 않는다고 호언하기에. 정말 그런지 확인해 본 것 뿐이다.”
> 그냥 미친 놈이잖아
> 잘 안 부서진다고 하는데 얼마나 해야 부서지는지 해 봐야지 ㅋㅋㅋㅋ
> 절대 안 부서진다는 프라이팬 부서질때까지 후려패는 타입 ㄷㄷㄷ;
> 호기심 해결 말랑튜브 느낌이네 ㅋㅋㅋ
> 안 부서진다는 프라이팬이 부서질 때까지 때려 봤습니다.tube
요약하면 호승심을 건드리기에 잘라 버렸다는 뜻이다. 박정이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 재밌군! 참으로 재미있어! 무혼들을 모두 당신같은 존재들인가?]
“아니. 본좌는 만인지상의 존재. 본좌와 같은 격의 무혼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도 될 터다.”
박정이 다시 한 번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보다. 허수아비를 베어 버렸으니. 이제는 어찌한다.”
[걱정하지 말도록. 허수아비는 다시 만들어낼 수 있으니.]
박정의 말이 끝나자 바닥에 쓰러진 허수아비가 사라지고, 다른 허수아비가 눈 앞에 새로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 이번에는 제대로 스킬을 써 봐라. 경험했다시피 허수아비가 상당히 허약하니 살살 다룰 수 있도록.]
단천은 그제서야 박도를 다시 움켜쥐고 세게 베기를 다시 시전했다.
우웅! 검에 다시 빛이 어렸다.
서걱!
적당히 힘조절을 한 단천의 검이 허수아비의 몸에 박혀들었다. 확실히 원래의 검격보다는 베는 맛이 굉장히 올라간 상태다.
굳이 따지자면 일반적인 검과 검기를 제대로 두른 검과의 차이 정도라고나 할까.
“이 기술이 제대로 박혀든다면 상대 입장에서는 꽤 큰 데미지를 입게 되겠군.”
[그렇지. 하지만 적도 나의 ‘세게 베기’를 당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쓸 테니 그리 쉽지 않은 일이 될 거다.]
세게 베기의 쿨타임은 10초. 1초 1초마다 생사가 오가는 전장에서는 실로 영원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 간격이었다.
> 개똥스킬이잖아
> ㄹㅇ;;
> 박붕아··· 넌 대체 무슨 업보를 쌓았길래 스킬셋이 이 모양이니···
벌써부터 박정에 대한 박한 평가가 채팅창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다른 집 캐릭터들은 온갖 미쳐날뛰는 스킬들을 퍼붓는데, 이런 단순하기 그지없는 스킬의 쿨타임이 10초라니. 평가가 박할 만도 했다.
하지만 단천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자고로 무기는 어떤 무기를 쓰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무기를 쓰는 자가 누구이냐가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무기로는 실격점을 줄 수밖에 없는 대검 달린 AK-74조차도 단천에게 들리면 흉악하기 그지없는 천하명검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의 세계인 것이다.
‘게다가. 이 기술은 보는 것보다 활용도가 더 크다.’
“이 기술을 취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으로 기술을 취소하면 된다.]
기술을 취소하겠다는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빛나던 박도가 그 빛을 잃어버리고 원래의 박도로 돌아갔다.
“재미있군.”
몇 번 세게 베기를 켰다 끄기를 반복하던 BJ천마의 박도가 다시 한 번 허수아비를 향해 움직였다.
이번의 검격은 ‘세게 베기’가 켜져 있지 않은 상태의 검격이었다.
서걱!
다시 한 번 허수아비의 몸이 베어졌다. 이전과 거의 다를 것 없는 상황이었지만.
[···세게 베기를 이렇게도 쓸 수 있었군.]
귀에 들려오는 박정의 목소리에서는 경악이 서려 있었다.
> ?
> 박붕이 왜 갑자기 호들갑 떠는 거임?
> 아무 것도 다른 거 없는 것 같은데?
놀라움에 찬 박정과는 다르게 채팅창에서는 물음표가 쉴 새 없이 떠오른다. 심지어 천마신교 예비교도들조차 의문을 가지고 있는 상태.
“제대로 비교할 수 있게 보여 줘야겠군.”
[누구에게 보여 준다는 말이지?]
“알 필요 없다. 이 허수아비. 두 개를 나란히 만들어놓을 수 있나?”
[할 수 있지.]
박정의 말이 끝나자 허수아비 두 개가 좌우로 늘어섰다.
“보여 주지. 이것이 지금 보여준 검격이고.”
서걱!
“이것이 원래의 검격이다.”
서걱!
완전히 같은 두 번의 검격이 두 허수아비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 뭐가 다르단 거임?
> 똑같잖아
> 아무것도 다른 게 없는데?
> 오히려 아무것도 다른 게 없어서 놀랍다 ㅋㅋㅋㅋ 자세가 거의 기계 수준임 ㅋㅋㅋㅋ
[대일밴드 님이 10,000원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근데 뭔가 잘린 부분의 깊이가 다른 것 같지 않음?]
“눈치챈 자도 있군. 정답이다.”
단천이 보여준 두 자세는 완전히 같은 두 동작이었다. 들어간 힘도 완전히 같다. 그러니 허수아비의 허리가 잘려나간 정도도 완전히 같아야 할 터. 하지만 허수아비의 허리춤이 잘려 나간 길이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한 쪽은 반 치도 제대로 잘려나가지 않은 반면, 나머지 한 쪽은 다섯 치도 넘는 길이가 잘려나가 있었던 것이다.
> 뭐고
> 어케 한 거임
[···공격을 하기 직전에 ‘세게 베기’를 사용한 거지.]
“그래.”
세게 베기를 사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면 상대는 세게 베기를 막기 위해 의식하게 된다.
그만큼 공격을 적중시키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공격을 하는 와중에 ‘세게 베기’를 발동할 수 있다면?
상대 입장에서는 평범한 일격이라고 생각했던 공격. 혹은 맞아도 된다고 생각한 공격에 당해서 쓰러지게 되는 것이다.
“소위 ‘허초’나 ‘환초’라고 하는 것이지.”
> 와
>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 아니 게임 오픈한 지 몇 분 됐다고 이런 고인물 테크닉이 나오는 거야 ㅋㅋㅋ
채팅창에서는 연이어 감탄이 터져나왔다. 이런 특수한 ‘테크닉’들은 캐릭터마다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이런 종류의 테크닉들은 공공연연히 캐릭터 기술의 일부로서 고인물과 그렇지 않은 유저들을 가르는 기준으로서도 작동하고는 했다.
하지만 이런 테크닉이 나오는 것은 게임이 나오고 충분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지, 오픈하자마자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BJ천마는 당연하다는 듯이 스킬을 보자마자 이런 테크닉을 만들어냈다.
> 미쳤다 진짜
> 나도 오늘부로 박붕이 하러 간다
> 아니 그건 에바고
> 아니 ㅈㄴ 좋아보이는 영웅들 많은데 이런 테크닉 있다고 박정 할 이유는 없지 ㅋㅋㅋㅋ
물론 이런 테크닉 하나가 생겨났다고 해서 박정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되지는 않았다.
단천은 굳이 이 부분을 실드치지는 않았다. 박정에 대한 평가는 BJ천마에 대한 평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후로 단천은 한두 번 ‘세게 베기’의 환초를 연습했다. 충분히 익숙해졌다는 판단이 들자 BJ천마가 박도를 거뒀다.
“이 정도 연습했으면 충분하다.”
[그래. 맞다. 그 정도 연습했으면 이제 처음 목표로 했던 궁극기의 사용을···.]
“이제 실전에서 적들을 도륙내 봐야겠군.”
[······.]
BJ천마의 말에 박정의 말이 멈췄다.
> 아 ㅋㅋㅋ 궁극기 그딴 거보다 일단 사람 써는 게 먼저라고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