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하프타임 (4)
일정 게임 플레이가 없으면 듀오 플레이를 할 수 없다는 메시지에 단천의 사고가 잠시 정지했다.
> 그러고 보니까 레일 서바이버 듀오 하려면 일정 이상 해야 되지
레일 서바이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핵 사용 플레이어들 때문에 크게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이런 핵을 사용하는 방식은 단순히 한 아이디로 핵을 사용하는 방식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핵 제제가 어느 정도 실효를 거두자 한 명은 새 아이디로 핵을 사용하고 나머지 한 명은 핵 사용자의 버스를 타는 방식으로 점수를 올리는 방식. 소위 ‘핵 버스’가 판을 치기 시작했다.
함께 계속해서 게임을 돌린다면 모를까 한두 판만 핵을 사용하는 것이라면 함께 플레이한 듀오 플레이어를 제재하는 것은 까다롭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심지어는 핵 유저들끼리 합쳐서 노멀 게임을 학살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 그래서 일정 시간, 일정 판 수 이상 안 하면 듀오 못함ㅋㅋㅋ
“쯧. 본인들의 무능을 플레이어들의 불편으로 전가하다니. 제대로 돼먹지 못한 게임사로군.”
단천은 가볍게 불평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원래 생각해 뒀던 듀오 플레이를 할 수가 없다. 광선검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것도 힘들어졌다.
“어쩔 수 없군. 혼자서 게임을 해 보도록.”
“혼자서요? 저 이 게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데요?”
“괜찮다. 처음 게임을 해 본 본좌도 바로 1등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게임이니까.”
> 안 간단하다고 ㅋㅋㅋㅋㅋ
> 절벽에서 그대로 내던져버리는 사자식 교육법 ㄷㄷㄷ
> 그러면 죽어요
물론 한수아 혼자서 플레이하는 것을 구경만 할 생각은 아니었다. 레일 서바이버의 다양한 모드 가운데 관전 모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음성과 플레이를 연결합니다. 노멀 모드 플레이만 가능합니다.]
“아. 아. 들리나?”
“깜짝이야! 옆에 있는 줄 알았잖아요!”
> 엌ㅋㅋㅋㅋ
> 반응 하나하나가 죄다 뉴비 그 자체
놀란 토끼처럼 폴짝 튀어오르는 한수아의 모습을 보고 채팅창에서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그러면 한 판 해 볼게요.”
[한수아가 게임 검색을 시작합니다.]
[게임 검색이 완료되었습니다!]
빠지지지직!
게임 검색이 완료되자 한수아의 몸이 전기로 변환됐다.
“우와아아앗! 제 몸이 전기로 변하고 있어요!”
“진정하도록.”
“몸이 전기로 변하고 있다고요! 이거 그 버그인가 뭔가 하는 거죠! 살려줘! 도와줘요! 멈춰!”
한수아가 꽁지에 불 붙은 사슴처럼 BJ천마 주변을 뱅뱅 돌았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아까는 토끼더니 지금은 사슴이네 ㅋㅋㅋㅋ
[게임이 시작됩니다.]
파지지직!
한수아의 전기화된 몸이 도약해 지상을 향해 떨어져내렸다.
“이제 어떡해요!”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다.”
“아닌 것 같은데! 저기 다른 사람들 엄청 활발하게 움직이잖아요!”
“산처럼 경거망동하지 말도록.”
한수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자신을 도와줬고, 자신의 마음의 사부고, 좀 더 만나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지!’
어린 나이지만 한수아도 사격 방면에서 나름대로 경지를 이뤘다면 이뤘다고 할 수 잇는 사람이다.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이 그녀에게도 있는 것이다.
“간다!”
화아아악!
한수아의 몸이 전기 구체들이 많이 가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파지지지직!
바닥에 착륙하자마자 먼저 도착한 다른 플레이어들이 눈에 보였다. 아무 무기도 없이 팬티만 입고 있다.
“···변태들?”
“평범한 풀창고들이다. 시작점에서는 다 저러니 침착하도록.”
> 평범한 풀창고는 또 뭔데 ㅋㅋㅋㅋ
> 평범한 풀창고 맞긴 해
그나마 여성형 캐릭터는 남자 캐릭터보다는 상황이 더 나았다. 기본적인 탱크탑과 반바지 정도는 챙겨 줬으니까.
‘아무튼! 지금은 변태들 몸 상태에 신경쓸 시간이 없어!’
게임은 이미 시작됐다. 한수아의 머릿속에는 ‘게임은 이겨야 한다’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 즐긴다는 표정 0
> 와 이렇게 보니까 진짜 프로는 생각부터 다르네
> 게임 이기려고 작정함
> 한국인은 게임을 이기는 게 즐기는 겁니다만?
> 뭐야 평범한 한국인이잖아
“이제는 어떻게 해요?”
“바닥에 있는 보급품들을 확인하도록.”
한수아의 손이 보급품을 빠르게 확인했다.
“오! 옷이다!”
“옷은 아무 쓸모없다.”
“어떻게 사람이 팬티만 입고 다녀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내다버린 인간도 아니고!”
> 풀창고 의문의 극딜맞는 중
보급품은 옷을 제외하고는 권총 한 자루가 전부였다. 한수아는 빠르게 옷을 입은 다음 권총을 집어들었다.
탕! 탕! 탕!
순식간에 쏘아진 세 발의 총성.
[한수아님이 전원꺼진전원주택 님을 처치하셨습니다.]
[한수아님이 반성문은영어로글로벌 님을 처치하셨습니다.]
[한수아님이 일하는도비님을 처치하셨습니다.]
> 와
> 돌았네 ㅋㅋㅋ
> 사격실력 어디 안 가는구만
순식간에 킬 메시지들이 올라갔다. VR게임과 실제 사격은 어느 정도 궤를 같이 한다. 적들과의 거리가 채 20미터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사격을 그토록 오래 한 한수아가 사격에 실패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인 것이다.
“흐음.”
세 명을 세 발로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한수아는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모로 꺾었다.
> 뭐 이상한 거 있음?
“아! 아니에요! 엄청 재밌네요 이거! 여러분들한텐 의외일 수 있겠지만 저는 실제로 사람 쏴 보는 건 처음이거든요!”
> 그게 왜 의외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ㅋㅋㅋㅋ
> 당연히 처음이어야지 ㅋㅋㅋㅋ
> 처음이 아니면 여기가 아니라 교도소에 있어야됨
“아! 그, 그렇네요!”
한수아는 머쓱하게 웃고는 바로 아이템을 능숙하게 파밍했다. 총기를 줍고 재빠르게 장전하는 일련의 숙련된 움직임들은 기계 그 자체였다.
“아쉽게도 광선검은 안 나왔군.”
“광선검이요? 이 게임 광선검도 있어요?”
“이 게임에서 최강의 무기라고 할 수 있는 무기다.”
> 믿지마셈 개구라임
> 랭크 1위가 가장 애용하는 최애 무기(왜곡없음)
> 랭크 1위 손에 들리면 30킬 기본으로 하는 개사기템(왜곡 없음)
“와. 그 정도면 광선검은 정말 좋은 무기인가 보네요.”
> 야 이 사기꾼들아 ㅋㅋㅋㅋ
> 왜곡만 없지 날조잖아 ㅋㅋㅋㅋ
> 채팅창에 기자 꿈나무들 천지 ㄷㄷㄷ
>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한수아는 이 레일 서바이버라는 게임이 꽤 마음에 들었다. 물론 총을 마음껏 쏴 볼 수 있는 레일 서바이버도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레일 서바이버는 리듬에 맞춰서 총을 쏘는 것 뿐. 장전도 다양한 상황도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반변 레일 서바이버는 사격을 다양한 상황에서 해 볼 수 있다.
그녀의 눈은 레일 서바이버에 흥미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제 어느 길로 가는 게 유리해요?”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곳이 법이며 길이다.”
“역시 그렇죠.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게 가장 중요한···아니. 멋진 말 하지 말고 공략을 해 달라고요!”
> 케미 미쳤네 ㅋㅋㅋㅋ
> 합방 ㄹㅈㄷ ㅋㅋㅋㅋㅋ
한수아는 BJ천마를 타박하며 주변 지형을 빠르게 훑었다.
“저쪽으로 가면 되겠네요.”
그녀는 거의 야수와 같은 본능으로 시가전에 유리한 장소를 찾아내 움직였다.
> 오오
> 꿀포인트로 그냥 움직이네
> 그냥 본능으로 하는데?
“역시. 본좌의 가르침이 빛나는군.”
> 뭘 가르쳐줬는뎈ㅋㅋㅋㅋ
> 인생에 대한 진리를 가르쳐주긴 했지
> 인생수업은 게임에 도움이 된다··· 메모···.
물론 시가전에 유리한 장소인 만큼 다른 플레이어들도 자리를 잡기 위해 움직이고 있엇지만.
탕!
탕!
탕!
한수아는 몇 번의 사격만으로 다른 유저들을 시체로 만들어버렸다.
> 크
> 이게 ‘프로’다
> 진짜 도대체 왜 은퇴한다고 했던거임?? (진짜모름)
“이게 실력이라는 거죠!”
“무기는 별로지만, 실력은 마냥 나쁘진 않군.”
> 천마님 아직도 광선검 영업중 ㅋㅋㅋㅋㅋ
> 영업 안 된다고 돌아가 ㅋㅋㅋㅋ
“영업이 아니라 사실만을 말하고 있는 것 뿐이다.”
“앗! 적이다!”
타앙!
이번에도 여김없이 한수아의 사격은 적의 몸을 뚫어넘겼다.
> ㅗㅜㅑ
> 백발백중 한수아! 백발백중 한수아!!!
채팅창에서 다시 한 번 환호성이 터져나왔지만, 단천의 눈은 채팅창이 아닌 한수아의 움직임을 모조리 보고 있었다.
처음도 그렇고, 이번 사격에서도 한수아의 고개는 갸우뚱거렸다.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이.
***
탕!
[사망하셨습니다.]
[최종 킬수 : 17킬]
“우아아! 아쉽다!”
>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17킬ㅋㅋㅋ
> 분해하는 한수아 커엽ㅋㅋㅋ
[수리수리마한수아 님이 170,000원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채팅창에서 감탄이 터져나왔다. 비록 몇 판 동안 우승을 하지는 못 했지만 한수아의 사격실력 하나만큼은 충분히 검증됐기 때문이다.
시청자 수는 10만명대. 초대형 스트리머들도 쉬이 넘기기 힘든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게임 스트리밍 판이 커지면서 이쪽만을 전담하는 기사들도 꽤 나가는 편이다.
그러니 아마 기사도 여기저기에 나갈 테고, 자연스럽게 한수아에 대한 관심도도 어느 정도 확보될 것이 자명했다.
게다가 가장 긍정적인 것은 한수아가 자신의 실력을 매우 확실하게 보여줬다는 점이다. 이로써 한수아가 실력이 부족하다는 논란은 어느 정도 불식될 것이다. 물론 VR게임과 실제 사격은 같을 수 없다는 말은 계속 따라붙긴 하겠지만.
‘그 정도쯤이야 대회 성적으로 증명해주면 되는 거지.’
이를테면 BJ천마의 방송은 한수아의 복귀를 돕는 부싯돌 역할을 하는 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가장 이득을 많이 챙긴 것은 BJ천마였다. 한수아의 인지도로 인해 발생하는 기사, 관심, 시청자 수는 오롯이 BJ천마의 것이었으므로.
그보다, 시간이 꽤 많이 지났다. 슬슬 방송을 마무리해야 할 타이밍이 됐다.
“재밌게 즐겼나?”
“네! 와. VR게임이라는 거. 엄청 재밌네요. 실제 사격 연습도 되는 것 같고요. 집에 들여다 놓고 종종 저도 해 봐야겠어요. 아! 앞으로 나올 하인라인 사의 게임인 ‘천.공’도 재밌을 게 분명하니까 꼭! 해봐야겠어요!”
> 마지막 멘트 무엇 ㅋㅋㅋ
> 자본주의가 만든 멘트
> 100% 안 한다 이건 ㅋㅋㅋㅋㅋ
“아니에요! 진짜 해 볼 거거든요?”
> 응 안믿어
> 네 다음 거짓말쟁이
> 자본주의식 광고 ㅋㅋㅋㅋ
“말대로 ‘천공’은 게임성은 잘 모르겠지만 본좌의 모션캡쳐만은 완벽 그 자체이니, 한 번 해 볼 만한 가치는 분명히 있을 거다.”
“···그, 그렇게 말 해도 돼요?”
“안 될 건 뭔가. 사실만을 이야기하는데. 게임도 안 나왔는데 게임이 재밌을 지 아닐지는 본좌가 판단할 수 없지.”
> 자본주의 개무시하는 멘트
> 역시 천마님이시다
> 모션캡쳐는 내가 했으니 완벽하고 게임은 내 알 바 아니다
> ㅆㅇㅈ ㅋㅋㅋㅋㅋ
“그, 그럼! 천공에 나오는 제 모션들도 엄청 잘 나왔으니까! 천마 사부 모션보다 더 잘 나왔···.”
“무인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으니까! 아아아아아! 방금 천마 사부가 손가락으로 찔렀어요!
대체 어딜 찌르신 건데 이렇게 아픈 거에요!”
“곡지혈이다. 시력에 매우 좋은 혈도지.”
> 실시간 언론 탄압
“아무튼! 제 모션 나온 천공도 잘 부탁드려요!”
한수아가 손을 붕붕 좌우로 흔드는 것을 끝으로, 한수아와의 합방은 종료되었다.
“으아. 끝났네요!”
방송을 끝낸 한수아가 캡슐 안에 들어가 있어 굳어있던 몸을 폈다.
“그래. 수고했다.”
“으으으! 좋아! 저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 다음 대회는 꼭 봐 주세요! 우승할 거니까 꼭 보세요!”
“이대로는 우승 못 할 것 같은데.”
“···뭐라고요?”
단천의 말에 한수아의 눈썹이 꿈틀댔다.
“이대로는 우승 못 할 것 같다고.”
“사부. 암만 그래도.”
“내 말이 틀렸나?”
단천의 말에 한수아는 입을 다물었다. 한수아에게서는 반론이나 분노에 담긴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다음 대회에서 우승하기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한수아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