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모션 캡쳐 (4)
“살기 싫다.”
공터에서 제로콜은 슬픈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이토록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까닭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오늘이 BJ천마와의 수련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운동이라는 것은 오래 하면 할수록 그에 맞게 쉬워지고 그만큼 익숙해지기 마련인데. BJ천마와의 운동은 전혀 쉬워지지도, 익숙해지지도 않았다.
BJ천마는 대체 어떻게 제로콜 자신의 몸 상태를 아는지 기가 막히게 죽을 정도로 힘든 정도로 제로콜을 몰아붙였다.
“내게 삶은 죽음이다···.”
제로콜은 그렇게 우울하게 중얼거리다 문득, 지금이면 도착해 있어야 할 BJ천마가 도착해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에는 제로콜 자신보다 먼저 와서 수련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제로콜이 도착한 지 5분이 지났는데도 BJ천마가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오늘은 설마. 쉬는 날인 건가?”
말을 하자마자 제로콜의 얼굴에 생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로콜이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하려는 순간.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럴 리가 없지.”
하늘이 무너져도 수련을 빼 먹는 일은 없다는 게 BJ천마의 지론이었다. 제로콜의 얼굴이 순식간에 헬쓱해졌다.
죽은 생선 눈으로 세상을 관조하던 제로콜의 눈이 문득 BJ천마의 옆에 있는 사람에게 향했다.
“오셨어요. 형. 옆에 있는 분은 누구에요?”
마스크를 쓴 채 모자까지 써 놓은 채라 제대로
얼굴을 구별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만으로도 왜인지 익숙한 느낌이 든다. 어쩌면 착각일지도.
눈만으로 사람을 알아보려면 웬만큼 유명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안 되니까.
“너랑 같이 수련하게 될 사람.”
“···저랑 같이 수련을 한다고요?”
“그래.”
표정을 보니 전혀 농담이 아니었다. 제로콜은 비장한 표정으로 새로 나타난 희생양의 귀에 속삭였다.
“혹시 잡혀오신 거라면 당근을 흔들어주세요.”
“···당근이 없는데요? 그리고 저 잡혀온 거 아니에요.”
“혹시 뭔가로 협박당하고 있나요?”
“아뇨. 협박같은 거 안 당했는데요.”
“혹시 전생에 뭔가 커다란 죄를 저지르셨나요?”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지옥에 자진해서 들어올 리가 없다.
“천마 형의 이목을 타이밍 봐서 끌 테니까 그 사이에 도망치세요.”
제로콜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을 단천은 실눈을 뜬 채 바라봤다. 자신이 무어 그리 대단한 것을 시켰다고 매번 이런 엄살인지.
“어이. 잡담 하지 말고 마보자세부터 시작해.”
단천의 말에 제로콜이 바로 마보자세를 취했다. 처음에는 죽는 소리를 하더니 이제는 마보 자세가 꽤 익숙해졌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 것이다.
그러니 적응을 한 만큼 고통을 추가해 줘야 하는 법.
단천은 가지고 온 추를 제로콜의 허벅지에 매달았다.
“이게 뭐에요.”
“수련용 근성추. 잔말이 많은 걸 보니 여유가 있는 걸로 느껴지기에.”
“제기랄···.”
제로콜이 피눈물을 흘리며 고통에 슬퍼하는 동안 단천은 한수아와 함께 공원의 휴게용 정자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대로 놔둬도 돼요? 제대로 안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허투루 했다가는 다 티가 난다. 그러면 몇십 배로 고생하는 것을 스스로도 아니, 제대로 할 수밖에 없지.”
“이제 전 뭘 하면 되죠?”
“가부좌를 틀고 앉도록.”
“가부···.”
가부좌를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에 많다는 것은 익숙해졌다. 단천은 익숙한 손으로 한수아의 몸을 움직여 강제로 가부좌를 틀었다.
“···이 자세 너무 불편한데. 다른 자세 하면 안 돼요?”
“그러면 저기 있는 제로콜처럼 마보자세 하던지.”
멀찍이서 들려오는 제로콜의 구슬픈 신음소리를 들은 한수아가 조용해졌다.
“근데 저는 저런 수련 안 해도 되나요?”
“안 해도 된다.”
한수아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운동선수다. 아무리 사격을 위주로 했다고는 해도 이전까지 해 온 운동량 자체가 제로콜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평소에도 운동을 계속 해 온 사람과 하루종일 VR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다르다. 게다가 지금 한수아의 몸 상태는 단순히 신체적인 수련을 해서 될 상황이 아니기도 했다.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단전을 만드는 일. 단천은 한수아의 어깨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뭔가 느껴지나?”
“···뭔가 따뜻한 느낌이 드는데요. 한겨울에 따뜻한 차를 마셨을 때의 느낌이랄까.”
역시 천음절맥이라 그런지 내공의 존재를 단숨에 파악한다. 하늘이 내린 무재武材라는 말은 허투루 나오는 말이 아니다.
“지금부터 이 기운이 몸을 도는 순서와 위치를 잘 기억하도록.”
단천은 한수아의 신체에 내공을 한 바퀴 돌렸다. 혈맥이 많은 부분 끊어져 있어 대부분의 내공이 흘러내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천의 내공은 거침없이 한수아의 몸을 흘러지나갔다.
“기억했나?”
“네. 근데. 대부분의 기운이 몸에서 새 나가는 느낌인데. 원래 그런 거에요?”
“네 몸이 정상이 아니라서 그렇다. 점차 나아져갈 테니 걱정하지 마라. 내공이 흘러가는 경로를 기억했다면 다음은 호흡과 심상이다.”
단천의 입에서 구결이 흘러나왔다. 지금 터져나오는 단천의 구결을 소림의 사람이 들었다면 기겁을 했을 것이다.
단천이 말하는 구결은 다름아닌 소림의 정종무학인 달마역근경이었으니까.
단천이 모든 구결을 암송하고 나자, 한수아의 입이 벌려졌다.
“···방금. 뭐라고 한 거에요?”
물론. 달마역근경의 구결을 말해준다고 해서 한수아가 이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단천이 말한 것은 다름아닌 중원어. 한국인인 한수아가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방금. 중국어로 말한 거에요? 아닌데. 중국어랑 살짝 다른데.”
“···문제로군.”
단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중원어를 한국어로 하나하나 변환해서 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무공이라면 어느 정도 해석이 가능할지는 몰라도 역근경은 난해하기 그지없는 무공이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단어들이 사용되는 역근경을 한글로 번안한다는 것은 아무리 단천이라고 해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단천이 고민하고 있는 동안, 한수아가 뭔가를 꼼지락거리며 휴대폰에서 앱 하나를 켰다.
[우주의 모든 언어! 파파괴!]
휴대폰 화면에서 귀여운 앵무새 한 마리가 휴대폰에서 퍼드득대며 날아가자. 화면에 ‘번역할 언어를 말씀하세요!’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파파괴?”
“다시 말해 봐요.”
말 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천은 달마역근경의 구결을 입 밖으로 말했다.
“天下功夫出小林···.”
[천하의 공부가 모두 소림에서 시작될 것이다. 역근경은 본승이 만들어낼 심공 가운데 가장 난해하나 여기에 이른 자에게는 그만큼의 성취가 있을···.]
단천의 입에서 가벼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말을 할 때마다 휴대폰에서 적절하기 그지없는 번역의 구결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21세기의 기술력이라는 것은 이런 데까지 발전했던가.
“···고대 중국 허난어? 중국어면 중국어지 고대 중국 허난어는 대체 어디서 배워온 거에요? 아니. 그보다, 허난이 도대체 어디야?”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문장에 집중하도록. 달마역근경은 끊어진 혈맥조차 잇고, 신체를 회복하는 희대의 신공이다. 제대로만 익힌다면 네 몸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거다.”
의문을 제시하던 한수아가 바로 입을 다물었다. 하긴, 지금 중요한 건 BJ천마의 정체가 뭐냐가 아니라 그녀의 수련이었다.
한수아는 파파괴에서 흘러나오는 문구들에 정신을 집중하며 호흡을 이어나갔다. 문구에 따라 호흡과 정신을 하나로 만들자, BJ천마가 어깨에 손을 댔을 때처럼 몸 안에 따스한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달마역근경은 가르치는 자가 있어도 배우는 것이 힘든 내공심법이다. 그런데 한수아는 구결만을 알려 줬을 뿐인데도 서툴지만 역근경을 따라하고 있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집중력이다.
‘절실함 때문이군.’
단순히 살고 싶다는 절실함으로 나오는 수준의 집중력이 아니다.
한수아는 다시 ‘사격’을 하고 싶어하고 있었다. 살고 싶다는 절실함보다 더 커다란 집념.
그 어떤 생물도 생존보다 우선하는 문제는 없다. 오직 인간만이. 그리고 그 인간들 중 극소수민이 죽음보다 큰 무언가를 좇는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 인간은.
“반드시 강해진다.”
중원에서도 단천은 이런 재능들을 결코 지나치지 못했다. 이런 재능들은 조금만 물을 줘도 나중에는 크나큰 거목으로 자라난다.
물론 적당한 보상이야 받았지만. 고금제일인인 단천과의 인연은 물질적인 보상으로 환산되는 수준 이상의 기연이었다.
─ 아니. 주군! 북해빙궁의 소궁주를 왜 도와 주신 겁니까! 소궁주가 주군의 기연을 받고 이미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버렸잖습니까!
─ 언제나 말하지 않습니까! 저희 천마신교를 제외한 모든 자들은 잠재적인 적이라고! 지금 주군은 적을 키우신 겁니다! 이렇게 지존이 오지랖 부리고 다녀서 정, 사, 새외 전부가 절대고수 천지가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재밌어진다니!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재밌어진다니! 그게 천마신교의 교주로서 하실 말입니까아아아!
단천이 이런 씨앗에 물을 줄 때마다 서윤학이 게거품을 물며 주화입마에 들었지만.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것이다.
단천은 손을 들어 집중하고 있는 한수아의 백회혈에 손을 올린 다음 내공을 끌어올렸다.
***
“후우우.”
한수아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둑했던 주변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집중을 할 수 있는 것은 사격을 할 때를 제외하고서는 완전히 처음 있는 일이다.
‘몸이··· 상쾌해.’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상쾌함이다. 흐려져 있던 시야까지 얼마간 돌아와 있었다.
그 어떤 치료도 무의미하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태다. 한수아는 몸을 일으켜 팔다리를 움직였다. 팔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자신을 괴롭히던 통증까지도 사라져 있었다.
“깨어났나.”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한수아가 고개를 돌렸다.
“진짜 몸이 좋아졌어요. 말도 안 될 정도로.”
“치료가 통했다니 다행이군. 앞으로도 빼 먹지 말고 매일 수련하도록.”
말 하지 않아도 잘 하겠지만. 단천은 굳이 그렇게 말했다.
“근데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네요.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다. 어차피 제로콜의 수련도 이때쯤 끝나니까.”
한수아는 제로콜의 훈련을 먼발치에서 바라봤다. 태릉촌에서 하는 것과도 비견되는 수준의 고강도의 트레이닝이었다. 그런 훈련을 몇 시간이나 지속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고강도의 운동을 이 시간이 될 때까지 한다고요? 괜히 저 배려 안 해 주셔도 돼요. 저도 그 정도로까지 눈치가 없진···.”
“저기 오는군.”
“와요? 뭐가요?”
한수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저 멀리서 거의 기어오다시피 다가오는 제로콜이 보였다.
“죽···여···줘···.”
“···진짜 이 시간까지 한다고요?”
한수아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상태가 안 좋은데. 119 불러야 되는 거 아니에요?”
“걱정마라. 저 정도면 놔 두면 낫는다.”
주르륵. 제로콜의 눈에서 뜻 모를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