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모션 캡쳐 (1)
하인라인 사의 CEO. 이태흠은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니터 안에 보이는 것은 창을 들고 있는 캐릭터, ‘조운’의 스킬 모션이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창술마다 피어나는 백색 기운들이 눈을 즐겁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조운이 창을 휘두르는 모션이었다.
화려하면서도 절제되어 있고, 깔끔하기 그지없는 달인 그 자체인 모션.
“···이것도 완벽하군.”
더 이상 조정이 필요없을 정도로 완성되어 있는 모션이다. 이태흠은 바로 다음 모션으로 넘어갔다. 창도, 검도, 활도, 모조리 만족스럽기 그지없는 모션들이었다.
기존 PC 게임 시장이 VR게임시장으로 변화하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쿼터뷰나 탑뷰 등 3인칭 시점 중심이던 게임들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자연스럽게 가장 큰 시장이던 AOS또한 VR게임이 되며 1인칭 위주의 게임으로 변화했다.
1인칭으로 게임이 변화하면서, 스킬 모션에 대한 수요는 커졌다.
스킬의 모션은 완벽하면 할수록 좋다.
그리고, 지금 이태흠의 눈 앞에는 그 완벽한 모션이 있었다.
BJ천마의 스킬 모션은 완벽 그 이상의 것이었다. 소위 세계에 있는 달인들의 모션은 ‘따위’로 만들어버리는 모션 캡쳐들.
‘무조건 잡아야 해.’
김태흠은 직감할 수 있었다. BJ천마라는 인간은 반드시 잡아야 하는 인간이다.
다소 싸가지가 없고, 다소 회사의 기둥뿌리를 뽑아가고, 자신의 주식을 다소 강탈해가기는 했지만···.
“아오. 또 두통이.”
김태흠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아무튼, 그런 BJ천마에게 보낸 추가 모션 캡쳐 관련 답변이 도착했다.
대답은 ‘휴방일 언제라도 가능’. 몇 주간 연락을 하나도 받지 않았던 걸을 생각한다면 특이한 일이었다.
모션 캡쳐와 추가 리터칭만 끝나면 출시 일정을 잡을 수 있으니. 하인라인 측은 메일이 도착하자마자 다음 날로 일정을 잡았다.
“BJ천마님이 모션 캡쳐 스튜디오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그래. 눈 밖에 안 나도록 최대한 조심하도록.”
기업을 운영하면서 수없이 많은 건드리면 안 되는 인간을 겪어왔지만, BJ천마는 그 중에서도 수위를 달리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저놈의 모션 캡쳐만 아니었다면 절대 다시 연락을 하지 않았을 텐데.
김태흠은 눈을 질끈 감은 다음, 비서에게 다시 강조해 말했다.
“절대. 절대 하인라인 사 직원이 눈 밖에 나지 않을 수 있게 하도록.”
진심이 담긴 명령이었다.
***
“BJ천마님 맞으십니까?”
“맞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스튜디오에 도착하자마자 깔끔한 복장을 한 남자가 단천을 에스코트했다. 이전에 받아왔던 취급과는 다르게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에스코트다.
‘확실히 교육이 잘 됐군.’
아마 원래도 이렇게 깍듯한 자세는 아닐 테고. 자신에 대한 신신당부가 위에서 내려온 것일 테지.
이래서 윗머리를 제대로 조져 놔야 된다는 거다. 장강수로십팔채의 채주들을 박살내 놓고 나서 공짜로 배를 타고 어디든 유람을 갈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에스코트를 받아 단천이 도착한 곳은 VIP실이었다. 커다란 방 안에는 휴게 공간을 비롯해 술, 음식이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실로 호화스러운 휴게 공간이다.
‘시종은 없나.’
중원에서는 구태여 시종을 쓰지 않는 단천이었지만. 중원에서는 이런 곳에는 으레 있는 시종이 보이지 않았다.
“추가로 필요한 게 있으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뭔가 필요한 것 있으시면 AI를 통해 명령하시면 최대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AI가 있었군. 하긴 음성 인식이 되는 AI는 대부분 시종이 하는 일을 대체할 수 있을 터이니 구태여 시종은 필요 없는 것이다.
뭐. 그래봤자 시종보다 더 나은 정도일 뿐이겠지. 겨우 AI로는 단천의 만능 잡일꾼이던 서윤학만큼의 전문성은 보여줄 수 없는 것이다.
“음료는 뭐가 있지?”
[각국의 특색있는 음료수와 술이 모두 구비되어 있으며, 마실 음료에 따라 최적의 온도로 보관되고 있습니다.]
단천은 맛있어 보이는 음료수 하나를 선택했다. 냉장고 앞에서 음료수가 잔에 따라서 간식과 함께 나왔다.
“오.”
완벽한 수준의 온도다. 같이 나온 간식도 정갈하기 그지없다.
단천은 머릿속의 평가를 수정했다. 고작 서윤학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는 수준의 완벽한 서빙이다.
서윤학이 들었다면 잠깐 서운해하다 ‘저는 지존의 시종이 아닙니다!’ 라고 외쳤을 생각이지만. 아쉽게도 서윤학은 이 자리에 없는 것이다.
“그보다, 추가 모션 촬영이라.”
하인라인 사의 말로는 단천 자신이 보냈던 모션 캡쳐의 해상도를 조금 더 높이고 싶다고 했다. 추가로 나중에 나오게 될 캐릭터들의 모션도 같이 캡쳐하고 싶다나.
“귀찮긴 하지만. 돈을 꽤 주니까.”
게다가 자신의 모션이 게임의 표준 스킬이 된다는 것 자체도 꽤 마음에 들었다. 이를테면 무공 비급에 나와 있는 삽화가 된다는 느낌이랄까.
모션 캡쳐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다. 시간이 남는다면 역시나 수련이다. 아쉽게도 스튜디오 주변에는 외공을 수련할 만한 곳이 없다. 그러니 남는 것은 내공 수련뿐.
단천은 마시던 음료수를 끝까지 비워낸 다음 가부좌를 틀고 앉은 다음 내공을 끌어올렸다.
‘내공의 양이 꽤 많이 늘었어.’
환골탈태를 하고 남았던 천년하수오의 기운과 꾸준히 이어진 수련으로 단천의 몸 안에는 이미 1갑자 가량의 내공이 모여 있었다.
채 3달도 되지 않는 시간동안 1갑자나 되는 내공을 모았다는 것을 중원인들이 알면 기절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단천 입장에서는 무덤덤했다.
단천은 신화경의 경지에 발을 디딘 인간이었다. 검으로 하늘을 자르고, 산을 짓뭉개는 수준의 초월적인 무위를 가지고 있던 인간 입장에서는 1갑자나 0갑자나 거기서 거기였으니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1갑자라는 내공이 의미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천마신공을 쓰려면 최소한 2갑자의 내공이 필요하지.’
중원에서 최강의 무공이라고 꼽히는 천마신공에 입문하기 위해서 필요한 내공의 양이 2갑자다.
그러니, 1갑자를 모았다는 것은 천마신공에 입문하기 위한 내공의 절반을 마련했다는 뜻.
천마신공.
천마신교의 교주에게만 허락되는 천하에 다시 없을 신공이자, 단천을 신화경의 경지로 올린 무공이기도 했다.
물론 다른 무공으로도 신화경의 경지에 오를 수도 있을 터다. 실제로 달마나 장삼봉도 천마신공이 아닌 다른 무공으로 신화경의 경지에 올랐으니까.
그러나 구태여 이미 아는 길이 있는데도 다른 길로 갈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내공이 부족하다는 건데···.’
1갑자나 되는 내공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질 일이 없는 것이다. 단천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단천에게 인기척이 느껴졌다. 분명 혼자여야 할 방 안에, 자신 말고 다른 한 명이 더 있었다.
정확히는, 음료수가 나오는 냉장고 앞에. 고등학생쯤 돼 보이는 여자애가 서 있었다.
“우와··· 그냥 누르니까 음료수가 나오네.”
이미 그녀 앞에는 뽑아 마신 음료수가 다섯 잔이나 쌓여 있었다. 그런 주제에 한 잔을 더 뽑아서 자연스럽게 마시고 있다.
단천은 여자애를 바라봤다. 음료수를 받아들고 빙글빙글 돌면서 음료수를 마시던 여자애의 눈이 단천과 마주쳤다.
“아! 일어나셨구나! 꼼짝도 안 하고 계시길래 혹시 죽으신 거 아닐까 했는데. 조금만 더 늦었어도 119에 신고했었을 거에요.”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엄청 멋져보이는 방이 있길래 구경해 보려고 들어와 봤죠!”
보통 그런 걸 상관 안하고 들어오나 싶긴 했지만 단천도 조금 심심하던 차였다.
“그보다. 스튜디오에는 무슨 일로 들어온 거지? 그냥 스튜디오가 멋져 보여서 들어온 건가?”
“그딴 이유로 들어올 리가 없잖아요. 제가 무슨 도둑도 아니고.”
허가도 안 된 방에 막 들어온 시점에서 이미 충분히 도둑인 것 같은데. 심지어 음료수도 다섯 잔이나 마셨고.
“이름은?”
“네?”
“이름이 뭐냐고.”
“···아! 이름! 제 이름은 수아에요. 한수아.”
한수아는 이름을 묻는 질문을 오랜만에 들어보는 사람인 것처럼 반응했다.
“그래. 스튜디오에는 무슨 일로 왔지?”
“스튜디오에 모션 캡쳐 일정 잡혀서요. 오빠는 무슨 일로 온 거에요?”
“같은 이유로 나도 여기 왔다.”
“어느 모션 캡쳐요? 저 말고는 모션 캡쳐 다 끝났을··· 아! 오빠가 천공 ‘무협’세계관 모션 주인공이구나. 와! 누군가 엄청 궁금했는데! 반가워요!”
한수아가 단천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붕붕 흔들었다. 낯가림이라고는 전혀 없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아니, 낯가림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에 대한 경계가 전혀 없다.
‘무슨 개방도같은 성격이로군.’
물론 한수아의 외면은 멀쩡하기 그지없다. 다만 그 친화력이 비슷하다는 말이다. 처음 본 사람에게도 가볍게 접근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세상 모든 것들을 자유롭게 쓰고 주는.
“그보다. 무슨 모션 캡쳐를 하러 온 거지?”
“맞춰 보실래요? 힌트! 무협은 아니에요!”
“그야 당연히 아니겠지.”
이런 퀴즈라면 단천은 자신이 있었다. 단천의 눈이 빠르게 한수아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내렸다.
‘호오.’
그냥 서 있을 뿐인데도 자세가 굉장히 안정되어 있다. 몸의 중심도 굉장히 잘 잡혀 있고. 이 세상에 오고 처음으로 보는 제대로 된 자세다.
그리고 손에 잡혀 있는 굳은살까지 보자 정답이 나왔다.
“총을 쓰는 건가?”
“와. 한 방에 맞추네. 솔직히 대답해 봐요. 저 알죠?”
“모른다.”
“연기 아니고요? 와. 표정 보니까 진짜 저 모르는 모양이네요. 와. 충격.”
한수아가 정말 충격이라도 받았다는 듯이 눈을 깜박였다.
“그러면 제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에 대해서 지금부터 설명을─!”
그렇게 한수아가 잔뜩 폼을 잡으려면서 자신이 누군지 설명을 하려는 순간. 바깥에서 고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한수아! 어디 갔어! 수아야! 한수아! 촬영이 눈앞인데 어딜 간 거야!”
방음 처리가 잘 되어 있는 듯 한수아에게는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기감이 발달한 단천에게는 똑똑히 들렸다.
“그보다. 네 촬영 시간이 눈앞 아닌가?”
“어··· 그런가요? 아앗! 진짜다! 저 나가 볼게요! 음료수 잘 마셨어요!”
시간을 확인한 한수아가 허둥지둥 방을 나섰다. 한수아가 사라지자 VIP라운지는 또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역시 조용한 건 별로군.’
이렇게 조용해지자 괜히 보냈나 싶다. 단천은 바깥으로 사라진 한수아를 다시 떠올렸다. 자신이 유명하다는 듯이 허세를 부렸는데. 아무리 떠올려도 누군지 모르겠다.
애초에 그녀의 나이대에 뭔가 활약을 할 시기에 단천은 병원에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천이 그녀에게 완전히 흥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천음절맥이라. 꽤 희귀한 몸을 타고났군.”
천음절맥은 스무 살을 넘기기 힘든 병이지만, 그래 봤자 자신이 신경쓸 만한 일은 아니다.
단천은 가부좌를 틀고 다시금 내공 운행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