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전쟁의 서막 (2)
크웨에엑!
쿵! 끔찍한 비명소리를 내며 트롤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단천은 무감각한 표정으로 그람에 묻은 끈적한 피를 닦아냈다.
“잘 들고, 잘 베어진다. 부러진 직검처럼 거리를 신경써 가며 벨 필요도 없고. 꽤 마음에 드는군.”
> 아니 무기를 처음부터 바꾸셨어야죠 ㅋㅋㅋ
> 무게추를 뗀 BJ천마 ㄷㄷㄷㄷ
> 사냥해야 한다고 무기 안 바꾼게 ㄹㅈㄷ
채팅창을 가볍게 무시한 단천은 주변의 소리를 들었다. 몬스터들의 둔탁한 발걸음소리나 비명소리, 병장기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다.
전투가 끝났다는 뜻이다.
“전투가 끝난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산맥의 가파른 지형은 수련에 도움이 된다. 기사들에게도 좋은 수련이 될 테지.”
지금 BJ천마가 이끄는 기사 부대는 인간의 영토가 아닌 몬스터들의 거주지인 우라누스 산맥을 관통해 돌파하고 있었다.
실로 파죽지세와 같은 기세였다.
“사냥이나 전쟁이라기보다는, 거의 도살에 가깝군요.”
브라딘의 평가였다. BJ천마는 전쟁을 선포하자마자 최소한의 인원만을 남긴 채 기사단을 이끌고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몬스터들은 인간이 거주지를 뛰쳐나와 공격할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들은 몬스터들과 고대신들에게 있어서 사냥감에 불과했으니까.
물론 두 마리의 고대신이 사냥당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 남아있는 ‘사냥감’이라는 관념 자체는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이 뿌리박힌 관념은 인간들과 마주한 지 오래된 몬스터들일수록 더욱 강해진다. 일방적인 학살을 계속해왔으니. 인간을 먹잇감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뿌리박힌 관념은 그대로 놈들의 약점이 된다.
먹잇감이라고 얕잡아보는 순간. 놈들은 기사단과 단천의 검에 모가지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 상황이 영원하지는 않을 터다. 그러니 더욱 빨리 움직여야만 했다.
“휴식을 짧게 취한 뒤 다시 움직인다. 놈들의 방심이 길게 이어지지는 않을 거다. 그 사이에 최대한의 이득을 얻어야겠지.”
“이런 종류의 전쟁에 익숙하신 모양이군요.”
“꽤 익숙하지.”
> 근데 왜 익숙한거임?
> 레일 서바이버 많이해서 그런 거 아님? 레서 팀플겜이잖아
> 팀플겜이면 뭐함 혼자서 다해쳐먹었는데 ㅋㅋㅋㅋㅋ
> 다른 팀이 하는 팀플 보고 배운거겠지
> 혼자서 다 해쳐먹는 줄 알았더니 지휘도 개쩜;
채팅창에서도 감탄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BJ천마가 보여주는 대부분의 모습은 압도적인 무위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무력과 더불어서 부대를 전두지휘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철하고 빠른 상황판단과 효율적인 움직임은 그동안 BJ천마가 지휘를 하지 않았던 것이지,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님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뭐. 이 정도쯤이야.’
일신의 무위가 신화경에 가까워진 순간부터는 진형이나 전장의 지휘와는 동떨어진 채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반백년 정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천이 마냥 절대적인 무위만을 믿고 모든 일을 해 온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신화경 이전에 단천이 겪었던 대부분의 싸움은 전력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싸워왔었다.
특히 그가 평생 몸담아왔던 곳은 다름아닌 혈귀단. 전투의 최전선에서 목숨을 바쳐 싸우는 부대.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연히 군재軍材가 뛰어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단천에게는 상단전이 열리면서 얻게 된 초인적인 직감또한 존재했다.
이 직감을 바탕으로 군사로서 가장 필요한 위기를 피해내고, 상대를 급습할 수 있었다.
> 이번에도 뒤에서 전투 시작했지
> 사냥도 딱 잡기 좋은 숫자만 골라서 하고
> 판단력 미쳤다 ㄷㄷㄷㄷ
‘기습은 취향이 아니기는 하지만.’
혈교나 다름없는 몬스터들을 하나하나 제대로 상대하다 보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그냥 강한 적들만 찾아 사냥하겠다는 처음 생각이 아니라. 놈들을 모조리 도륙내 버리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상태.
그리고, 이 결심은 곧바로 성과로 나타나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동안 수십 개의 몬스터 무리. 숫자로만 쳐도 기백을 한참 넘어가는 몬스터들을 일방적으로 도륙내고 있었으니까.
“기사들이 돌아왔습니다. 주군.”
“왔나.”
기사들은 피로 온 몸을 도배하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대부분의 피는 몬스터들의 것이었지만 기사들의 피 또한 섞여 있었다.
기사들은 기진맥진해 있었다. 물론 기사들의 BJ천마에 대한 충성심은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충성심으로 모든 것을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이은 전투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 언뜻언뜻 보인다.
슬슬 동기부여를 해 줘야 하는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주군. 기사들이 꽤 지쳤습니다. 이제 회군하는 것이···.”
“회군이라.”
회군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기사들의 눈에 생기가 돈다. 한계가 꽤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스컬 윙을 불러줄 테니 재정비가 필요한 기사들은 휴식을 할 수 있도록 회군하도록. 그걸로 평가를 종료할 테니.”
“···평가?”
“평가라니요?”
평가라는 말에 기사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평가라는 말인가.
“이야기 안 했던가. 이번에 질 좋은 금속과 희귀한 금속들을 대량으로 구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 최고의 장인이 이 금속들을 제련하고 있는 중이지.”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아무래도 질 좋은 금속들의 양이 한정돼있다는 점 말이다. 당연히 만들어지는 무기 간에도 서열이 나뉠 테지.”
“그야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렇지. 그 까닭에 지금의 전투들을 기반으로 해서 무기와 방어구를 차등지급할 생각이다.”
무기와 방어구의 차등 지급. 이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기사들의 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재정비를 하고 싶은 기사들은 스컬 윙에 탑승하도록.”
“어이! 잭슨! 어깨가 탈구됐다고 징징거렸잖아! 당장 타!”
“너야말로 다리가 안 움직인다고 했잖아! 당장 돌아가서 휴식해!”
그 어떤 기사도 돌아가겠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 아 ㅋㅋㅋㅋ 새 무기는 못참지 ㅋㅋㅋㅋ
> 거기에 ‘랭킹’까지 붙었잖아 ㅋㅋㅋㅋ
> 종결급 신무기를 주는데 거기 랭킹까지 붙어 있다?
> 이거 절대 못 참거든요
자고로 무인이라고 하면 죽고 못 사는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무기고 두 번째가 순위다.
중원에서도 우내십존이니, 강호 백대 고수이니, 이런 커다란 등수부터 시작해서 호북 백대 고수, 심지어는 코딱지만한 동네에서도 누가 최강인지를 두고 싸움박질을 하는 것이 바로 무인 아니던가.
그러니. 이 둘을 합한다면 어떻게 될까.
‘공식 순위’가 걸린 ‘무기’를 준다면?
‘1위는 죽어도 내 거야.’
‘다른 새끼들이 지쳐있을 때. 내가 조금만 더 하면 1위를 먹을 수 있어.’
‘새 무기. 새 무기. 새 무기. 새 무기!’
당장 눈알이 돌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효과가 좋군.’
이 방식은 단천이 혈귀단에서도 꽤 자주 써먹었던 방식이었다.
> 기사들 눈알이 돌아갔는데?
> 저게 무슨 기사야 ㅋㅋㅋㅋ흉신악살이지 ㅋㅋㅋㅋ
>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몬스터라고 착각했을 법한 비쥬얼;;
> 아니 알고 봐도 몬스터인데?
“몬스터는 말이 조금 심하군.”
그냥 평소의 혈귀단과 비슷한 정도쯤의 비쥬얼이구만.
***
“정말 인간들이 맞기는 한 건가?”
드라이오나가 질린 표정으로 기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어라! 죽어!”
“백열일곱! 백열여덟! 백열아홉! 뒈져라!”
상처가 나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몬스터들을 학살하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 글자 그대로 피에 미친 몬스터들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가장 전면에 서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BJ천마였다.
서걱!
촤아아악!
일격에 몬스터가 대여섯 마리씩 바닥으로 쓰러진다. 그리고 쉴 새도 없이 바로 이어지는 도약과 빛살처럼 이어지는 일격.
부러진 직검으로도 압도적인 무위를 보여줬던 것이 바로 BJ천마다. 그런 괴물에게 제대로 된 무기가 주어졌으니. 범에게 날개를 단 격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 사냥하고 있는 몬스터들은 트롤과 같은 중상위족의 몬스터들이다.
웬만큼 강한 공격이 아니고서는 상처도 나지 않을 정도로 강한 몬스터들인데. BJ천마의 검은 마치 아무 장애물도 없다는 듯 몬스터들의 몸을 갈라내고 있었다.
“계속해서 느끼지만 오만할 만큼의 능력은 있구나.”
드라이오나의 눈이 인간들의 왕에 가서 멈췄다.
“···그보다, 이쪽으로 가는 거. 맞아?”
“왜.”
드라이오나의 눈이 일행 전체가 움직이고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무작위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기사단 일행 전체는 우라누스 산맥의 기슭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라누스 산맥의 끝에 있는 것은 바로.
“그냥. 정령의 안식지가 있는 곳으로 향해 가기에.”
정령의 안식처였다.
[히든 퀘스트 : 정령의 안식처로 향하십시오.]
> ?
> 히든 퀘스트 뜨네
> 정령의 안식처?
다키스트 에이지에서 정령들은 그리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한다. 고대신들에 의해 타락했지만, 그냥 어정쩡한 수준의 몬스터들로 나오는 잡몹 수준의 몬스터들이 바로 정령들이었기 때문이다.
영향력도 부실하고, 관련된 스토리도 전무한 탓에 스토리와는 관계 없는 설정이라는 것이 정설.
그런데 지금 정령들과 관계된 퀘스트가 나타났다.
[해당 퀘스트는 정령들과의 우호도를 늘릴 수 있는 퀘스트입니다.]
“흐음.”
단천 입장에서는 사실 그다지 관심이 없는 퀘스트였다. 정령이라고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거니와, 그들이 전쟁에 있어서 크게 도움이 될 지도 미지수다.
“게다가 언제건 배신을 할 수 있는 놈들인데. 굳이 우호도가 필요할까?”
“그놈의 배신 타령은 언제까지 하려는 거지?”
“배신을 실제로 당할 때까지.”
“이걸 진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 볼 만한 가치는 있다.’
드라이오나가 방방 뛰는 것을 무시한 채 단천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 ㄱㄱㄱㄱㄱㄱㄱ
> 전쟁에 도움도 된다고 하니 무조건 받아야지
> ㅇㅈ;
> 여기 위치 누구 찍어놓은 사람 있음?
그 이유는 마냥 채팅창에서 히든 퀘스트를 하기를 바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채팅창과 시청자들의 반응은 결정에 있어서 부차적인 것일 뿐이었으니까.
단천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지금 퀘스트의 목적지로 나온 곳이 다른 곳도 아닌 ‘정령의 안식처’라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히든 퀘스트라는 것은 굳이 따지자면 기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령들이라는 것은 자연의 기운이 뭉치는 장소라는 뜻.’
그렇다는 건. 영약이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높다.
당장 자신의 옆에서 방방 뛰는 드라이오나만 해도 말을 하는 신기하기 그지없는 산삼 아니던가.
효능은 아직까지는 미상이기는 하지만.
“왜 먹거리라도 쳐다보는 것처럼 보는 거지?”
“별 일 아니니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아무튼, 자고로 영약이나 영물이라는 것은 자연의 기운이 극도로 모여진 곳에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법.
“충분히. 가 볼 만한 가치가 있겠군.”
[퀘스트를 수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