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다키스트 에이지 2 (4)
진법을 엄청난 속도로 주파하던 단천의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길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생문은 여전히 보인다. 이제 몇 걸음이면 진법을 주파할 수 있다.
그런데도 발걸음을 멈춘 것은 단천의 ‘직감’이 더 생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걸음이라도 더 나아간다면 눈 앞에 있는 함정에 걸리게 된다.
“그냥 돌파하게 해 준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긴 하지.”
이런 종류의 진법의 끝에서 진법으로 기진맥진한 상대를 처치하는 것은 전법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무언가’ 가 있어야 할 텐데. 여전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쫓아오고 있는 진법을 구성하고 있던 가시덤불들만이 있을 뿐.
그렇다는 건.
“저 가시덤불이. 나를 가로막는 이물이라는 말이군.”
사사사삭! 진법을 구성하던 가시덤불이 한 자리에 모여들어 여자의 형체로 변모했다.
“인간이 온 건 오랜만이···.”
서걱!
단천의 검이 가볍게 가시덤불녀의 목을 잘라냈다.
> 아니 이야기좀 들어 ㅋㅋㅋㅋ
> 무슨 관우세요?
> 관우가 오관돌파 할 때도 말 한번씩은 하게 해 줬다 ㅋㅋㅋㅋㅋ
목이 떨어졌지만 여자의 몸은 무너져내리지 않았다. 떨어진 목이 다시 원래의 몸에 들어와 붙었을 뿐.
“버릇이 없는 인간이구나.”
불로 지지거나 냉기로 얼렸다면 재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단천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냥 목을 잘라내면 과연 다시 붙을까 하는.
“풀이라면, 냉기에 더 약할까, 아니면 불꽃에 더 약할까?”
> 그거야 모르지;
> 중간보스 느낌인데 실험할 생각좀 하지 마라고 ㅋㅋㅋㅋ
“반은 화기로 잘라내고, 반은 냉기로 잘라내면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인지 알 수 있겠지.”
단천의 말에 가시덤불녀가 흠칫거리며 반 걸음 정도를 물러났다.
“그래도 서로 합을 겨룰 사이인데. 서로 통성명 정도는 하는 게 어떤가?”
“내 검이 성이며 내 초식이 이름이다. 그런데 통성명이 굳이 필요없지.”
“···네놈. 인간은 맞나?”
> 사실 우리도 궁금해요
> 당연히 생겨나는 호기심 ㅋㅋㅋㅋ
단천이 다시 검을 움직일까 싶었는지 가시덤불녀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드라이오나. 이곳을 지키는 수호정령이다. 내가 있는 미로를 빠져나가다니. 범상한 인간은 아니로군.”
“정령?”
그런 것도 있었던가. 확실히 풀창고의 설정집에 따르자면 다키스트 에이지에도 설정상 정령이라는 것이 존재는 한다고 했다.
“설정상으로는 고대신들에게 거의 모조리 죽거나 항복해서 아무런 영향력이 남지 않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용케 살아남은 부역자가 있군.”
“······.”
> 그걸 눈 앞에서 대놓고 말하면 어떡해 ㅋㅋㅋㅋ
> 어떡함 저 상처입은 표정 ㅋㅋㅋㅋ
“부역하고 있는 게 아니다. 힘을 비축하며 놈들의 심장에 칼을 쑤셔박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 뿐···.”
“그걸 보통 부역자라고 하는데.”
드라이오나의 입이 살짝 삐져나왔다. 단천은 말을 취소할 생각은 없었다. 굳이 부역자라는 것이 비하적인 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원래 약자라는 것은 절대적인 강자에게 굴복하지 않으면 절대자에 의해서 죽기 마련이었으니까.
부역자라는 것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혈교나 단천이 있기 전의 마교 휘하에 있던 수없이 많은 군소방파들이 그랬듯이.
“그러니 부역을 하면서 동지들을 죽이고 고문하거나, 팔아먹는 악랄한 짓만 하지 않으면 괜찮다.”
“난 그런 짓 안 해!”
드라이오나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딱히 알 필요도 없지만.”
단천의 검에 불꽃이 솟아났다. 드라이오나가 식겁해 바닥을 짚자 거대한 가시덤불 벽이 바닥에서 솟아났다.
“꺄하하! 인간! 네놈 따위가 이 벽을 넘어설 수는 없을 거다!”
이전이었다면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을 거대한 벽. 하지만 지금의 단천은 다키스트 에이지 1의 단천이 아니었다.
화르륵! 길을 따라 검을 내지르자 순식간에 벽이 불타올랐다. 실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벽을 뚫자마자 단천을 향해 날아오는 수많은 가시덤불의 공세. 하지만 단천은 예상했다는 듯이 검을 들어올려 가시덤불을 순식간에 잘라냈다.
내공을 그리 많이 쓸 필요도 없었다. 그저 다가오는 가시덤불을 잘라내고, 가시덤불을 태울 정도만 내공을 불어넣으면 될 뿐.
“······.”
“더 할 말 있나?”
단천은 드라이오나에게 다가가 검을 치켜올렸다.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하던 드라이오나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자. 잠깐! 이야기 좀 해!”
“문답무용. 적과는 대화하지 않는다.”
“저, 적이 아닐 수도 있잖아!”
[드라이오나가 당신과 협력하기를 원합니다.]
“협력?”
“그래. 우리 정령들은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 몬스터들의 수는 늘어나고, 우리들의 영향력은 거의 사라져 버렸어. 모두가 고대신들 때문이지.”
“그래서.”
“너에게서는 강한 힘이 느껴져. 지금까지 봐 온 인간들과는 다른, 강력하기 그지없는 힘과 정의감 말이지.”
> 딱히 정의감은 없어 보이는데
> ㅇㅈ;
> 그냥 노빠꾸로 모가지 날리니까 아무 말 갖다붙이는 거 아니냐?
단천의 눈이 찌푸려졌다. 자신만큼 정의감 넘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채팅창에서 아부라는 말이 나오거나 말거나, 드라이오나의 말은 이어져 나가고 있었다.
“나는 노스페라투가 죽기를 바래. 놈이 죽으면 이 주변에 있는 정령들도 조금씩 늘어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놈을 죽여줘.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사냥을 마치면 너의 힘이 늘어날 수 있게 해 줄게. 그러면 고대신들을 처치하는 데에도 편할 거야.”
[노스페라투 관련 스토리가 해금되었습니다.]
[드라이오나가 노스페라투를 처치해 주기를 바랍니다.]
[목표 :
노스페라투 처치]
[처치지 신성력(내공) +10]
신성력 10이라는 수치가 내공으로 따졌을 때 어느 정도로 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대충 10년, 혹은 그 절반으로 따진다고 해도 꽤 남는 장사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 더 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확실히. 지금 죽이기엔 아쉽군.”
> ‘지금’ 죽이기 아쉽다는 건 뭔 말임
> 언젠간 죽이겠단 뜻 아님?
> 오해할 만하게 말좀 하지 마라고 ㅋㅋㅋㅋ
[의뢰를 수락하셨습니다.]
단천은 가벼운 마음으로 의뢰를 수락했다.
“그러면, 어깨 좀 빌릴게.”
드라이오나의 몸이 눈 깜빡할 사이에 손바닥만하게 줄어들더니 단천의 어깨 위로 올라섰다.
“네가 노스페라투를 정말로 죽이는지 정도는 지켜 보고 싶거든.”
***
노스페라투의 궁정 안은 겉에서 봤던 것처럼 인간의 왕궁처럼 꾸며져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조각상이나 그림들이 하나같이 괴기스러운 것들이었다는 것 정도였다.
짐승 대신 인간을 사냥하는 몬스터들의 모습들, 인간의 머리를 짓밟고 있는 고대신들의 모습들은 보기만 해도 섬뜩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 그닥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네
이 정도쯤은 담담히 넘길 수 있었다. 단천을 정말로 기분나쁘게 하는 것은 코에 풍기는 숨길 수 없는 역겨운 냄새였다.
“···불쾌한 냄새로군.”
“노스페라투의 수하들이 정령과 인간을 모조리 잡아다 잔혹하게 살해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죽여야만 노스페라투의 힘이 강해지거든.”
단천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런 종류의 적은 꽤 오래간 상대해 온 경험이 있었음에도, 겪을 때마다 불쾌감을 숨기기가 힘들다.
분노를 오래 참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천은 살기를 숨기지 않은 채 궁정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인간의 냄새를 맡은 한 쌍의 인영이 나타났다.
고풍스러운 모자를 입고, 비단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었으나. 인간이라고는 결코 할 수 없는 한 쌍의 부부.
“인간의 냄새로군!”
“인간이 나타나자마자 배신한 정령 또한 있고!”
“노스페라투는 어디에 있지?”
“키키킥! 왕님을 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네놈은 여기서 죽을···!”
말을 잇던 남자 괴물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단천의 검이 놈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남자의 목을 베어갈랐기 때문이었다.
“알려줄 거라고 생각도 안 했어.”
그저, 놈의 목을 벨 이유가 필요했을 뿐이다.
“이런 미친 놈이!”
옆에 서 있던 아내 역할의 괴물의 몸에서 낫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놈의 말도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단천의 검이 놈의 허리를 반으로 갈라 버렸으니까.
두 놈이 만들어낸 비릿하고 기괴한 혈향血香이 주변에 퍼지자, 냄새를 맡은 몬스터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 처리할 수 있어?”
“본좌에게 가능과 불가능은 없다. 할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뿐.”
“···화났어? 뭐에 그렇게 화가 난 거야?”
“그다지 화나지 않았다.”
그저 과거가 생각나서 아주 약간의 짜증이 났을 뿐이다.
‘혈교 자식같은 놈들.’
변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아주 자그마한 짜증.
그러니, 이 짜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칼춤이나 조금 추다 노스페라투를 처치할 생각이었다.
단천은 검을 고쳐잡으며, 이제는 사라져 버린 혈교에 대해 떠올렸다.
***
단천이 혈교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됐을 때. 단천은 혈교에 별 생각이 없었다. 혈교라고 해 봤자 단천이 없던 시절의 마교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마교보다 조금 더 광신적이고, 조금 더 힘의 논리에 미쳐 있는 그런 문파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혈교는 힘에 앞서 광신적인 추종만이 존재하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혈교의 교주를 위해서 무공을 수련했으며, 혈교의 영생을 위해서 무엇이건 하는 광신도에 불과했다.
그들은 관무불가침을 상관하지 않았으며, 인간의 고통이 혈교지존의 힘의 원천이 된다 믿었다.
‘미친 놈들이었지.’
혈교는 자신들이 중원을 지배하기를 원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중원을 손 안에 넣고 무수한 살육을 저지르는 것 뿐이었다.
문제는 혈교가 중원에 가기 위해서는 마교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단천은 혈교와 협상하기를 원했다. 혈교의 대장이라고 하는 영세지존 영락귀와 단천이 시원하게 일기토로 결판을 내고, 이긴 쪽이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는 걸로.
당시의 단천은 마교 내에서 교주 다음가는 지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었에 가능한 협상이었다.
이 협상을 위해 파견됐던 것이 바로 뇌명검 여연결이었다. 파견되었던 여연결은 혈교의 광신적인 추살에 걸려 죽었고, 혈교와 마교. 정확히 말하자면 혈교와 혈귀단은 전면전에 들어갔다.
중원 최강의 전력으로 꼽히는 혈교와 마교의 일개 단체에 불과한 혈귀단의 정면승부. 누구나가 혈교의 승리를 점칠 게 뻔한 전력차였지만, 결과는 혈교의 멸문으로 끝났다.
단 한 명의 존재 때문에.
‘···다 추억이로군.’
혈교와의 전쟁에서 단천은 죽을뻔한 위기를 꽤 많이 넘겼었다. 다시 하라고 해도 당장 다시 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위험했던 전투였다.
그 이후로부터 단천은 이유 없이 남을 고문하고 죽이는 인두겁을 쓴 괴물이라면 되도록 죄다 잡아다 추살했다.
정의이나 명분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취향이였다. 마교는 힘이 있는 자가 정의이다. 단천에게는 힘이 있었고, 기분 나쁘게 타인을 고문하는 인간을 죽이는 것은 정당화됐다.
지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천은 노스페라투의 수하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놈들을 모두 죽이기로 마음먹었을 뿐.
“···뭐. 혈교 냄새 나는 놈들 치고는 너무 쉬운 것 같긴 하지만.”
단천은 방금 베어가른 수없이 많은 시체 위에 앉아 중얼거렸다.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레벨이 증가하였습니다.]
[신성력이 올랐습니다!]
몬스터를 죽일 때마다 떠오른 경험치와 능력치 상승 로그들이 화면을 가득 가린다. 솔직히 조금 귀찮다.
“그래도 몇 놈을 죽였는지 숫자를 헤아리기는 편하군.”
아무래도 세상에는 일장일단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