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쇼케이스 (3)
무림에 오래 있다 보면 별별 무기들을 다 보게 된다. 평범한 검과 도, 창부터 시작해서 도끼斧나 봉, 활, 쌍절곤, 심지어는 총을 쓰는 인간까지도 있었다.
‘쯧. 총 따위를 써서 뭘 하겠다는 건지.’
다른 건 몰라도 총을 쓰는 무인은 아직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다른 좋은 무기를 놔두고 왜 굳이 총을 쓴단 말인가.
아무튼, 이토록 특이한 무기 가운데에는 혈액을 쓰는 무공또한 존재했다.
묵혈마공을 쓰는 묵기린의 무공 또한 그랬다. 베어도 쓰러지지 않고, 핏물으로 변화했다가 다시 제 형태를 만들어내는. 희대의 괴공.
인간의 궤를 벗어난 것이라고 여길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는 않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피로 만들어진 분신을 만들어내는 무공에 불과했으니까.’
괴공으로 불리는 무공의 비법은 알게 되면 별 것 없는 법이다. 내공을 사용해 혈액의 형태를 조종해내는 것. 그것이 묵혈마공의 정체였다.
혈액이라는 것은 여러 모로 상대하기 귀찮다. 액체의 형태를 하고 있는지라 베는 것도 까다롭고, 불어넣는 내공에 따라 강철도 벨 수 있을 정도의 경화또한 가능하다.
혈액을 상대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역시나.
‘극양의 무공, 혹은 극음의 무공.’
주변에 존재하는 혈액을 모조리 증발시키거나 얼려버리면 묵혈마공은 무기를 잃어버린다.
그러니 적당한 무공을 쓰는 것만으로도 묵혈마공은 상대할 수 있다.
지금 튜토리얼의 요정이 보여주고 있는 초열공이라거나.
“노스페라투는 신성력을 안 쓰고는 상대하는 게 불가능하게 만들어져 있다고요!”
“그건 네 상상일 뿐이고.”
단천은 튜토리얼의 요정의 말을 그대로 무시했다. 그 사이에 다시 날아오는 노스페라투의 창.
서걱! 단천의 검이 빛살처럼 움직여 창을 다시 한 번 쪼개버렸다.
‘그래도 능력치는 이전 그대로 옮겨 준 모양이군.’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속도는 1편과 동일했다. 속도가 70인 상태 그대로다.
몇 번의 공격이 실패한 것에 분노한 노스페라투가 하나의 창이 아닌 수십 개의 창을 공중에 만들어냈다. 지금의 속도라면 간단하게 피해 버리는 것도 가능은 하다.
하지만 지금은 검을 용도에 맞게 ‘깎아놓을’필요가 있었다.
단천의 검이 날아오는 창들을 검날로 막아냈다. 본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은 검의 옆면. 검날로 공격을 직격으로 막아내면 검날이 상하기 마련이다.
카가각가강! 불꽃이 튀겨오르며 순식간에 검날이 너덜너덜해졌다. 마찰이 극대화된 형상에 단천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뭐가 충분하다는 말이냐!”
“네놈을 태워버리는 데 충분하다는 말이다.”
방어를 하던 단천의 몸이 앞을 향해 도약했다.
“어림없는 짓을!”
노스페라투의 창이 다시금 단천을 향해 날아들었다. 날아드는 창을 향해 단천의 검이 뽑혀나왔다.
파아아아악!
쾌속하기 그지없는 검격이 날아든 창의 겉면을 쓸듯이 긁어냈다. 엄청난 속도로 맞부딪힌 두 개의 무구 사이에서 엄청난 열기가 터져나왔다.
치지지지직! 터져나온 열기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한 혈액이 매캐한 연기를 내며 타올랐다.
“이, 이게 무슨!”
“역시나 별 것 아니로군.”
묵기린을 따서 만들어낸 존재라면, 무공의 질도 놈을 따라 만들어졌을 터. 놈의 진짜 몸이 아닌 복사품 정도라면 이 정도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대,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튜토리얼의 요정이 벙찐 얼굴로 단천을 향해 물어왔다. 자신의 심기를 거스른 튜토리얼의 요정이었기에 설명 따위는 해 주고 싶지 않았지만.
> 어케 한 거임
> 미쳤다
> 뭔 상황이여 ㅅㅂ;
수없이 많은 시청자들이 궁금해하고 있었다.
“열기라는 것은 내공이 있어야만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빠른 속도와 마찰을 만들어내기에 적합한 무기만 있다면, 혈액을 태우는 온도는 즉석에서도 만들어낼 수 있지.”
“···그걸 지금 즉석에서 생각해낸 겁니까?”
“그럴 리가.”
보통 이러한 종류의 생각들은 할 게 없을 때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법이었다.
지금의 대처법은 묵기린을 극양신공으로 증발시켜버린 뒤, 내공이 없을 때 어떻게 싸웠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다 떠올린 전투 방식이었다.
─ 단주. 단주가 묵기린에게 질 리가 없지 않소이까. 그런 상상을 해서 어디 쓰느냔 말이오.
─ 후우. 하긴. 단주가 이상한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 그래서 실험에 써 볼 피가 필요하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왜 나를 부른 게요?
─ ···그 실험에 내 피를 쓰겠다고? 하하. 단주는 농담을 항상 진담처럼 말한다니까. ···검은 왜 드는 거요? 아악! 혈귀단! 혈귀다아안!
물론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 또한 일류 고수의 혈액을 써서 입증했다. 그러니 실전에서도 바로 쓸 수 있는 것이고.
단천은 검을 노스페라투를 향해 겨눴다.
“자. 이제 튜토리얼을 다시 시작해 보도록 하지.”
***
“와. 말도 안 돼.”
“저게 되냐?”
화면 속에서 나오는 계속되는 검격. 노스페라투가 가지고 있던 혈액의 양은 이제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치지지직!
[노스페라투를 격퇴하셨습니다.]
[튜토리얼이 완료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치솟아오르는 검은 연기. 그리고 떠오르는 승리 메시지.
관객은 경악에 빠져 있었다. 보통 쇼케이스라고 한다면 게임에서 새롭게 나온 컨텐츠를 선 보이는 자리가 되기 마련이다.
지금은 다키스트 에이지 2에서 새롭게 나온 ‘신성력’에 대한 소개가 되어야 하는 상황.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BJ천마는 ‘그런 것 없어도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정면으로 증명해냈다.
“미쳤다.”
“역시 BJ천마.”
“탈인간급 괴물이라니까 그냥.”
원래라면 신성력에 대한 이야기로 열광해야 할 관객들은 역으로 BJ천마의 실력에 대해 열광하고 있었다.
쇼케이스의 원래 목표가 반쯤 와해된 상태인 것.
“···어, 어쨌든! 이런 멋진 모습을 보여주셨지만! 반대로 신성력을 통해서 적을 제압하는 것 또한 가능합니다!”
사회자가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 보려 말을 이어나갔다. 준비된 자료 화면에 보이는 신성력을 사용한 다양한 무공들이 보였다. 번개, 빙결, 화염을 비롯한 화려하기 그지없는 모션들이 줄줄이 이어져 나왔다.
화려한 모션에 환성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된 것은 BJ천마의 무위였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직감하고 있었다. 오늘 커뮤니티를 점령하는 것은 다키스트 에이지 2의 이야기가 아니라 BJ천마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끄응.”
정선우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기자들도 꽤 많이 부르고 대형 센터까지 대관했는데. 죄다 BJ천마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아마 부른 기자들이 쓰는 기사도 BJ천마의 플레이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룰 것이다. 기자라는 것은 조회수가 잘 나올 만한 소재에 대한 촉이 좋은 인간들이니까.
기자들을 부른 값도, 쇼케이스를 이렇게 커다랗게 벌인 것도. 죄다 무의미해졌다.
“돌겠네 진짜.”
BJ천마가 자신의 실력만으로 덤벼들 것이라는 점은 개발자 측에서도 고려한 부분이었다. 그런 까닭에 신성력 없이는 절대 상대할 수 없는 노스페라투를 튜토리얼 상대로 삼은 건데.
보란듯이 신성력 없이 노스페라투를 상대해버릴 줄이야.
정선우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후로 간단한 설명과 함께 몇 가지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그나마 질의응답은 미리 준비해놓은 대로 이루어졌다. 원래부터 질문과 답변을 어느 정도는 정해놓은 덕분이다.
신성력의 종류와 가짓수, 전류를 신체에 흘리는 것이 과연 안전한가에 대한 부분들에 대한 질문과 설명이 이어졌다.
[그럼. 이렇게 쇼케이스는 종료하겠습니다. 다키스트 에이지 2의 발매일은 일주일 뒤입니다! 그럼, 그 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억지 텐션으로 쇼케이스가 마무리되었다. 정선우는 씁쓸한 표정으로 준비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그렇게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BJ천마님이 정선우 개발자님 뵙고 싶다는데요.”
“···왜?”
“더 물을 게 있다고.”
“···들어오시라 그래.”
막는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정선우는 알고 있었다. 총같은 거라도 준비돼 있으면 모를까. 대한민국의 치안은 컨벤션 센터 대관하는 시큐리티에게 총기를 허용하지 않는 나라다.
문이 열리고 쇼케이스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인간이 들어왔다.
“꽤 재미있는 기능을 넣어놨더군.”
“저희 생각은 아니었고, 육도천이 요구한 시스템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부분이 눈에 띄였다면 게임을 엎어 버리라고 했을 테지만, 단천의 눈에는 딱히 이상한 부분은 눈에 띄지 않았다.
상단전조차 별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다키스트 에이지 2 안에 특별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없다고 봐야 했다.
“놈이 넣으라고 한 것. 다른 것은 없었나?”
“···마지막 엔딩에 숨겨놓은 메시지가 있기는 합니다.”
“숨겨놓은 메시지?”
“메시지의 내용은 저희도 모릅니다. 보안이 제대로 걸려 있어서.”
“역시 그런가.”
다키스트 에이지 2를 제대로 클리어해야만 놈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정선우의 멱살을 쥐고 흔들어봤자 나올 만한 정보는 더 이상 없어 보였다.
결국 게임을 클리어해야만 육도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클리어해주면 되겠지.’
어려울 것 없는 조건이었다.
***
집으로 돌아온 단천은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내공과 무공에 대해서 자신처럼 잘 아는 인간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육도천이라는 것이 단수인지 복수인지,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감이 잡히지 않지만.
그럼에도 확실한 것 하나는.
“언젠가는 붙어야 한다는 것이겠지.”
놈이 가지고 있는 방대한 지식을 생각한다면 놈의 무공 수위는 최소한으로 잡아도 절대고수다. 절대고수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글자 그대로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 존재.
지금의 단천의 능력으로는 이기기가 힘들다.
절대고수로 생각하더라도 이 정도인데. 만에 하나 신화경의 존재라면?
“위험하지.”
결국 본신의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소리다. 지금 단천이 가지고 있는 신체능력은 이류와 일류 사이. 몇 달만에 이뤄낸 성과라고 생각한다면 말도 안 되는 성과이지만, 원래 단천의 본신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미비하기 그지없는 경지다.
좀 더 빠른 성장이 필요하다. 물론 빠른 성장이라고 해서 영혼을 팔아먹는 마도나 사공을 쓸 만큼 단천은 멍청하지 않았다.
정도 그 자체인 동시에 성장의 속도를 폭발적으로 늘려주는 방법이 세상에는 있었다.
쪼르륵.
단천의 손이 마지막 남은 하수오주를 잔에 따랐다. 병 안에 남아있는 것은 능력이 농축될 만큼 농축된 천년하수오의 뿌리뿐.
이 뿌리를 어떻게 쓸 지에 대해서 계속 고민했는데. 드디어 쓸 방법이 정해졌다.
“환골탈태에 쓰면 되겠군.”
환골탈태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