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쇼케이스 (2)
벌써 쇼케이스 시간이 되었던가. 단천은 목을 좌우로 꺾었다. 사실 정선우를 여기서 처리하고 쇼케이스를 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저 밖에서는 단천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정선우를 탈탈 털어 정보를 모두 얻고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게 된다.
‘···스트리머란 건. 천마와는 다르군.’
의도적으로 늦은 적은 한 번도 없기는 했지만 천마의 위에 있을 때에는 사람들을 몇 시진씩 기다리게 해도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스트리머는 다르다. 사람들은 BJ천마를 좋아하지만 맹목적으로 추종하지는 않는다. 시청자들과 스트리머 간의 관계는 힘에 의한 수직적인 위계가 아니라 호의로 맺어지는 관계다.
시청자들과 한 약속시간은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운이 좋은 줄 알도록.”
“다행이군요. 사지 멀쩡하게 나갈 수 있어서. 그보다. 천마님은···. 진짜 천마이신 겁니까? 그 무협지에 나오는?”
“그럴수도. 아닐 수도.”
단천은 애매한 대답을 남겼다. 천마라는 이름이 갖는 공통점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마란 존재가 모두 같지는 않다. 단천 자신까지 모두 일곱 명의 천마가 있었으며, 모두 제각기의 성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리고 칠대천마인 단천 자신은 그 천마들 가운데서도 꽤 특이한 사람이었으니. 일반적으로 말하는 천마와는 조금 다른 인간이라고 해야 했다.
“무협지를 좋아하는가보군.”
“네. 학창 시절에 많이 읽었습니다. 근래에는 일 때문에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문파는?”
“네?”
“가장 좋아하는 문파를 물었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 것이니 편하게 대답하도록.”
“어. 그러니까··· 역시 태산북두인 소림···.”
“호오. 소오림이라. 그으렇군.”
“···보다는 천마신교가 최고인 것 같습니다. 힘의 논리와 무에 대한 끝없는 탐구. 역시 천마신교가 무협 그 자체 아니겠습니까.”
“역시 그렇지.”
단천의 안광을 본 정선우는 급하게 커브를 틀었다. 아무래도 BJ천마라는 인간은 정말로 무협에서 온 것이 맞기는 한 모양이었다.
만에 하나 무협에 온 것이 아니라고 해도 엮이면 엮일수록 뭔가 손해를 볼 것만 같은 인간이다.
정선우는 쇼케이스가 끝나고 나면 되도록 BJ천마와 엮이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BJ천마와 엮이느냐 안 엮이느냐는 정선우의 결심과는 달리 BJ천마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
[네. 다키스트 에이지 2의 쇼케이스에 오신 여러분들. 반갑습니다!]
사회자가 나와 짧게 입을 열었다.
간단한 소개말 한 마디였지만. 그 한 마디가 가진 파급력은 커다랗기 그지없었다.
“드디어! 나왔다!”
“우와아아아! 성불 각이다!”
“나죽어! 진짜 나 죽어!”
가장 큰 호응을 보낸 것은 물론 쇼케이스에 직접 참여한 열성 신도들이었다. 다키스트 에이지의 고인물인 동시에 먼 쇼케이스까지 직접 참여하기 위해서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
물론 직접 참여하지 못한 인터넷의 상황이라고 해서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ㅠㅠ
> 지금 죽으면 다키스트 에이지 2 못함 죽으면 안돼
> 트럭에 치여도 다에2 하고 죽는다 ㅅㅂ
> 솔직히 염라대왕도 이건 사망 유예 해준다
소드아트 사의 작품들 중 가장 많은 열성 게이머들을 양산해 낸 것이 바로 다키스트 에이지였다. 그런데 몇 년간 숨겨져 있던 히든 루트가 BJ천마에 의해서 개방되고, 이제는 그에서 더 나아가 후속작이 나온다고 하니 폭발적인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다키스트 에이지 2를 시연해주실 분 또한 모셨습니다! 요새 가장 핫한 스트리머 중 한 명이시죠! BJ천마님 모셨습니다!]
화려한 폭죽과 함께 BJ천마가 단상 위로 걸어올라왔다. BJ천마가 단상에 올라오자 안 그래도 크던 환호성이 배는 더 커졌다.
“반갑다.”
“와! 천마님! 진!짜! 게임 잘하십니다!”
“천마님이 나를 보셨어!”
“천마군림보 보여 주세요!”
쇼케이스가 메인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BJ천마에 대한 호응이 훨씬 큰 상황.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긴 했지만 이 또한 크게 본다면 소드아트 사에서는 이득이었다.
결국 게임의 홍보는 화제성이었으니까.
“자. 서론이 길면 여러분들도 싫겠죠? 오늘 오신 BJ천마님과 함께 바로 다키스트 에이지 2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을 들은 단천은 준비되어 있는 VR캡슐의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언제나처럼의 짧은 암전과 함께. 게임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3인칭 시점의 시네마틱 무비였다.
[세계는. 종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불에 타오르는 수많은 가옥들과 사람을 죽이는 몬스터들. 잦은 비명소리. 다키스트 에이지의 어두운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희망은 덧없는 것이며,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인간의 목표는 단지 오늘 하루만을 살아남는 것이었다.]
치솟던 불길 어딘가에서 재 하나가 떨어져내렸다.
[하지만. 끝났다고 생각한 희망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떨어진 재에서 불길이 치솟아오르며, 다시 한 번 화면이 전환됐다. 전환된 화면이 비추는 것은 반으로 부러진 직검이었다.
어떤 주인도 없는 검이 공중을 춤추듯 유영하기 시작했다.
서걱!
직검이 불길과 몬스터들을 일거에 반으로 갈라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궤적으로.
[한 영웅에 의해. 희망이라는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직검의 주인이 누군지를 말할 필요는 없었다. 자고로 반으로 부러진 직검이라고 하면 다키스트 에이지의 첫 무기인 동시에. BJ천마의 시그니쳐였으니까.
환호성이 터져나올 만도 한 상황이었지만 환호성은 터져나오지 않았다.
압도적인 영상미에 모두가 눈을 빼앗긴 까닭이다.
모든 적을 반으로 도륙하던 검이 어느 한 남자의 손에 잡혔다. 그리고 휘둘러지는 검.
[이제 희망은 타오르고. 사냥당하던 인간들은 다시금 사냥꾼이 된다.]
[다키스트 에이지 2]
“우와아아아아!”
신형 VR캡슐의 방음 기능을 뚫고서도 환호성이 들려왔다. 확실히 꽤 공을 많이 들인 것이 눈에 보이는 시네마틱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휘둘러지는 검이 펼치는 무공이 매화검법이었다는 것 정도.
‘천마신공을 좀 쓸 걸 그랬나.’
시네마틱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다면 매화검법보다는 천마신공의 무공들을 몇 가지 선을 보이는 게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시네마틱이 끝나고 나자 다시 한 번 화면이 바뀌었다. 단천은 왕좌에 앉아 있었다.
좌우로 정렬해 도열해 있는 수많은 기사들과 가신들. 후줄근하기 그지없는 복장이었던 다키스트 에이지 1편에 비해서는 괄목할 정도의 성장이었다.
좌우를 둘러보던 단천의 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키스트 에이지 2는 다키스트 에이지 1의 엔딩 이후의 시점으로 전개됩니다.”
“뭐야.”
옆을 바라보자 조그마한 크기의 요정이 떠 있었다. 처음 보는 요정은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아니, 실시간으로도 VR캡슐의 옆에서 말을 하는 사회자가 바로 요정의 정체였으니까.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BJ천마님의 다키스트 에이지 2의 플레이를 도와주기 위해 등장한 튜토리얼의 요정이라고 합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뭔 튜토리얼의 요정이여 ㅋㅋㅋㅋㅋ
> 뭐라고 하는 사람 머리 터트려버릴 것 같은 네임 센스 ㄷㄷㄷ
“저 채팅은?”
“실시간으로 공식 방송과 쇼케이스 관객 분들의 반응을 합쳐서 보여 주는 채팅입니다.”
“그럼 후원금은?”
“안 나오죠. 당연히.”
“그런가.”
뭐, 후원금이 나온다는 것도 이상하기는 하다.
> 돈미새 ㅋㅋㅋㅋ
> 아니 후원금 없이 방송을 얶떢계 해!!
튜토리얼의 요정은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자리를 옮겼다.
“이제 곧, 다키스트 에이지 2의 튜토리얼 이벤트가 시작될 겁니다.”
[저주 : 망상증이 시작됩니다.]
[저주 : 환각이 시작됩니다.]
사회자. 아니, 튜토리얼의 요정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야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다키스트 에이지의 고유 시스템인 저주 시스템이다.
강제적으로 시야가 암전되고 나자. 단천이 있는 곳은 끝도 없는 칠흑 속이었다.
“네놈이 바로 원초의 망령을 죽인 자로군.”
칠흑 저 너머에서 음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드러낸 자는 고딕 풍의 정장을 입은 창백한 남자였다.
“뭐. 별 것도 아닌 놈이었다.”
“놈의 힘이 약한 편이기는 했지.”
단천은 풀창고가 줬던 설정집을 떠올렸다. 창백한 얼굴,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자. 음산한 인간의 형태를 한 존재.
“노스페라투인가.”
“흐음.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니. 꽤 박식한가보군.”
노스페라투의 눈이 놀라움으로 살짝 움찔거렸다.
“이래저래 알고 있는 게 많아서 말이지.”
단천은 노스페라투의 얼굴과 행색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아무리 봐도 혈교의 혈귀공자 묵기린의 모습이다.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다키스트 에이지는 무림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들이 꽤 많다.
정선우는 무림에 대해 아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내부에 간자가 있을 확률이 컸다.
‘놈을 잡아낼 방법은 천천히 떠올리도록 하고.’
지금은 즐기도록 할까.
오랜만의 재회를.
“그래서. 나를 찾아온 이유는?”
“네놈을 죽이기 위해서다. 네놈이 나타난 이후로 인간들의 움직임이 꽤 귀찮아졌거든.”
“나를 죽이고 싶다면 본신으로 찾아오는 게 좋았을 텐데.”
노스페라투는 설정상으로 원초의 망령보다도 강한 존재. 그런 존재치고는 드러나는 기운의 크기가 너무나도 약했다.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노스페라투가 제대로 나서지 않았다는 뜻.
튜토리얼답게 약화된 노스페라투와의 전투를 벌이게 되는 모양이다.
“잘도 알아챘군.”
“약골을 알아보는 데는 도가 튼 몸이라서.”
“하지만. 네놈을 상대하는 데에는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잡설이 길다.”
촤아악!
단천의 부러진 검이 노스페라투의 몸을 반으로 베어갈랐다. 노스페라투의 몸은 반으로 잘린 다음 핏물로 화해 바닥으로 흩어져내렸다.
> 이야기 좀 더 듣지
> 스토리 좀 들어!!!
> 뭔 사정인지는 알아야 될 거 아냐!!
“그쯤이야 놈들을 도륙하다 보면 싫어도 알게 되겠지. 너희도 스포일러를 당하는 건 싫을 테고.”
> 스포일러 좀 당하고 싶다고!!!
> 절름발이가 범인인 거 알고 영화 보고 싶다고!!!
> 쇼케이스에서도 마이페이스 ㄷㄷㄷ
> 근데 이렇게 쇼케이스 끝내도 되는 거냐?
“아직 안 끝났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지.”
> 그게 뭔 뜻임?
“이런 뜻이다.”
촤아아악!
바닥에서 핏물 한 줌이 창의 형상을 한 채 단천을 향해 날아들었다. 단천은 창을 받아내 반으로 갈라버렸다.
하지만 갈라낸 의미가 없었다. 반으로 갈라낸 창이 다시 한 줌의 피로 화해 바닥으로 흩어졌다.
> 공격이 안 통하는데?
“뭐. 그렇겠지.”
혈귀공자 묵기린의 묵혈마공 또한 이런 느낌이었다. 검으로 벨 수 없는 형태로 변화하는, 인간의 형태를 벗어난 마공.
[나약한 인간 놈. 곱게 죽을 수 있는 길을 버리는군.]
단천은 이어지는 공격들을 계속해서 피해냈다. 확실히, 난이도는 전작에 비해서 더 어려워졌다.
단천의 모습을 바라보던 튜토리얼의 요정이 뽀르르 단천의 옆으로 날아오른 다음 입을 열었다.
“자. 다키스트 에이지 2에서 나타나는 특별한 몬스터들은 평범한 방식으로는 처치할 수 없습니다. 다키스트 에이지만의 특수한 방식으로 적을 처치해야 하죠. 바로 ‘신성력’시스템입니다!”
“신성력이 아니라 내공.”
“···아, 아, 네. 알겠습니다. 내공이라고도 부르는 신성력은, VR캡슐을 통해 신체에 흐르는 전류로 표현됩니다. 플레이어들은 이 전류를 사용해 자신만의 신성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게임 안의 플레이에서 ‘내공’을 사용한 플레이를 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뜻이다.
‘···이래서 정선우의 움직임이 무림인의 모습이 보였던 거로군.’
이런 방식이라면 다키스트 에이지를 플레이하는 모든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무공을 배우고 쓰게 된다. 그것도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뇌에 무공을 강제로 집어넣었던 이전의 방식과는 다르게 오히려 정도적인 방식이다. 부작용도 없을 테고. 게임 내에서 무공을 배운다고 해서 신체능력이 엄청나게 상승되는 일은 없겠지만, 최소한 VR게임 내에서의 실력은 비교도 되지 않게 늘어날 것이 확실했다.
흥미로운 방식이다.
“자. 튜토리얼을 따라 신성력을 운행해 보시기 바라겠습니다.”
튜토리얼의 요정이 화면에 사람의 모습을 띄우며 신성력을 움직이는 경로를 투영시켰다. 운행 경로는 볼 필요도 없었다. 단천이 이미 아는 방식이었으니까.
단천의 단전에서 전기의 느낌이 짜르르 느껴졌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내공으로 치환한다면 꽤 커다란 양의 내공일 것이다.
지금 이대로 내공을 운행한다면 눈 앞의 노스페라투를 간단하게 처치할 수 있을 터.
‘하지만.’
뭔가 놈들의 생각대로 움직이고 있자니 심사가 뒤틀렸다. 검기를 써야만 상대할 수 있는 묵혈마공을 쓰는 상대를 내놓은 다음 대놓고 ‘내공’ 시스템을 홍보해 달라고 하는 이 꼴이라니.
놈들의 꼭두각시라도 된 느낌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천은 몸 안에서 찌릿거리는 전류를 무시했다.
“그깟 내공 없으면. 본좌가 저런 버러지 하나 이기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네?”
단천은 부러진 직검을 똑바로 들었다. 시스템 자체는 흥미로웠다. 이 시스템으로 발전하게 될 사람들의 실력 또한 기대가 됐다.
하지만 그 기대감과 광고주 놈들의 마음대로 놀아주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일.
“그러니 보여 주지. 내공 따위 없어도 저런 버러지 하나쯤은 이길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