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새 보금자리
오랜만의 휴일. 단지은은 단천에게서 나는 아저씨 스타일을 빼기 위한 계획을 세웠었다.
근래에 SNS에서 핫한 카페도 물색하고, 동선도 짜고, 단천이 항상 입는 활동복 대신 좀 멋 나는 옷도 좀 사고···.
“···그러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이런 곳에 오게 된 거지.”
단지은은 코에 들어오는 짙은 한약 냄새를 맡으며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약선단이 다 떨어졌으니 어쩔 수 없잖아.”
“그거야 그렇지.”
약선단인지 뭔지 하는 불법 의료제품. 효과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몸의 컨디션이 몰라볼 정도로 좋아진 상태였으니까.
“그 약을 인질로 삼아서 한약방에 오다니. 비겁한 거 아니야?”
한약방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곳에 도착한 단천은 눈을 빛내며 들어본 적도 없는 약재들을 흥정하고 있었다.
“10만원은 너무 비싸오. 4만원으로 합시다.”
“아니, 4만원은 밑 지는 거라니까? 이 사람아!”
“4만원.”
“아! 안 팔아!”
“4만원.”
“그러면 6만원은 어떻···.”
“4만원.”
“후우. 내가 졌소. 4만원으로 합시다.”
“오케이. 땡큐.”
‘저래도 되는 걸까.’
일단 행복해 보이니까 뭐라고 말은 못 하겠는데. 그래도 청춘으로서 조금 엇나간 거 아닐까.
“이 가격에 최상급 택사澤瀉를 이만큼이나 구할 수 있다니. 현대의 기술력이란 대단하기 그지없군.”
“···깨어나서 스마트폰 처음 볼 때도 덤덤하고, VR캡슐 볼때도 덤덤하더니. 이 위대한 21세기에 감탄하는 게 고작 잡초 가격이야?”
“어디 감탄하건 내 마음이지.”
단지은은 심히 걱정되는 얼굴로 단천을 바라봤다. 저래서야 제대로 된 친구라도 생길지. 하루종일 운동하고 방송하고 도라지술 마시고 자고. 그게 단천의 인생의 전부가 돼 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술도 혼술이다.
사회 복귀가 심히 우려되는 동생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방송은 재밌어 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시청자들은 좀 늘었어?”
“꽤. 목표만큼은 아니지만.”
“목표는 얼만데?”
“십억 명.”
“···그래. 꼭 이뤘으면 좋겠다.”
단천의 방송은 나름 잘 되는 모양이었다. 수입도 나오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지금 단천이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약재를 사는 것도 그렇고. 이래저래 돈이 필요할 텐데 단지은 자신에게는 한 번도 손을 벌린 적이 없었으니까.
“그보다 약재 쇼핑은 언제 끝나?”
“앞으로 대충 72종 정도만 사면 돼.”
“···그냥 앉아서 기다릴게.”
단지은은 벤치에 앉아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단천을 바라봤다. 사놓은 약재만 이미 양 손 가득이다.
짐이 저렇게 많아서야 점찍어놨던 인스타 카페를 가는 건 무리다.
단지은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사실 인스타 카페 가는 일은 오늘 시간을 낸 주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단천의 쇼핑이 그렇게 끝난 뒤. 단지은은 단천에게서 약재 몇 개를 받아들었다. 단천의 말로는 그다지 비싸지 않은 약재들이라고 했다.
“그래도 사기당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네. 진짜 잡초들 사 온 건줄 알았는데.”
단지은은 단천의 양 손에 산더미처럼 들린 약재를 보며 말했다. 사기당했다고 생각한 약. 단천이 직접 만들어낸 약이었던 모양이다.
단천이 어디서 그런 효능 좋은 비법을 알아낸 건진 아직도 의문이긴 하지만.
“몇십 번 말했지만 짭퉁 약 아니라니까. 강호제일인 약선의 비전이 담긴 약이라고.”
“아이고. 식약청 허가나 받고 와서 그런 말 하세요.”
단천의 눈이 살짝 올라가자 단지은은 입을 다물었다. 눈매를 보니 조금 더 놀렸다가는 진짜 약선단을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비록 식약청 허가도 없는 무허가 불법제조 약품이라고는 하지만 그 효능은 넘치도록 확인한 바. 약선단을 받지 못하면 손해는 단지은 자신의 것이었다.
단천의 쇼핑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야 끝났다.
“짐 좀 줘. 들기 힘들잖아.”
“괜찮아. 무거운 짐을 드는 것도 수련의 일부이니.”
“어디 사는 헬스 중독자처럼 이야기하네. 이제 쇼핑은 끝난 거야?”
“일단은. 없는 것들도 몇 있는데 산을 좀 뒤져보지 뭐.”
“···그렇구나. 산에는 다음 번에 천이 너 혼자 가고, 오늘은 나랑 어디 좀 가자.”
“어디를 가려고?”
“가 볼 데가 있어.”
사실 단천은 약재 쇼핑이 끝나고 나서 방을 보러 부동산에 갈 생각이었다. 이사갈 곳도 어느 정도는 생각해 봤다.
그렇게 이사할 방을 보고 계약까지 빠르게 할 생각이었는데 단지은이 먼저 말을 꺼냈다.
“가는 데 오래 걸려?”
“아니? 금방이야. 잠깐 들리기만 하면 되고.”
시간도 꽤 많이 남고. 단지은이 가자는 곳을 가도 괜찮을 터였다.
단지은의 안내에 따라 둘이 도착한 곳은 조그마한 사무실들이 모여있는 골목이었다.
“여기에 무슨 볼일 있어?”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여기에 딱히 올 이유는 없었다. 그냥 지금 있는 집에서 꽤 가까운 골목이라는 것 정도만 제외하고는 특별할 게 없는 곳.
“여기인가? 아니, 음, 저쪽이었던 것 같기도.”
단지은도 몇 번 와 보지 않았던 곳인 듯 두리번거리며 길을 헤메기까지 했다.
그렇게 둘이 도착한 곳은 좀 낡기는 했지만 집주인이 꽤 관리를 잘 하는지 깔끔한 사무실 건물이었다.
단지은은 그 중에서 가장 꼭데기 층에 위치한 사무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사무실 안은 이전 입주자가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짜잔!”
“여기가 왜?”
“여기가 바로 이 누나가 천이한테 주는 선물이야!”
“···선물?”
“그래. 방송하는 사람들, 스튜디오 같은 거 많이들 차린다고 하더라고. 아무래도 방송 시간이라던가, 층간소음 문제도 꽤 있고, 게스트를 데려오기도 해야 하니까.”
단천의 눈이 사무실의 두 방을 쭉 훑었다. 퇴거 후 청소를 한 것 치고는 깔끔하게 청소가 돼 있다. 요새 안 그래도 야근이 더 잦아졌다 싶었더니. 정시에 퇴근을 할 때마다 조금씩 사무실을 청소하고 돌아온 모양이다.
“집이랑도 가까우니까 여기 출퇴근하면서 방송하면 돼! 누나 눈치같은 거 볼 필요 없이! 친구들도 좀 부르고, 합방도 하고!”
“돈은 어디서 났어?”
“에헴. 누나가 이래봬도 사회인이야! 직업이 있으면 대출이라는 게 나온다는 말씀! 주인 아주머니 말로는 이 층에 방이 많이 비어서 확장하거나 할 때 추가 계약하기도 편하대. 잘 됐지?”
“잘 됐네.”
“이렇게 선물해줬으니까. 앞으로 우리 천이 방송 잘 되면 누나한테 갚아줘야 된다?”
물론 말로만 갚으라는 뜻이다. 단지은이 보상을 바라고 단천에게 뭔가를 해 준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갚아주지 마라는 법은 세상에 없다.
단천은 단지은에게 받은 것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집어넣고 있었다. 이걸 갚으려면 지금 통장에 있는 돈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아무래도 이사는 조금 더 뒤로 미뤄야 하겠네.’
선물이란 건 타이밍이다. 이런 선물을 받자마자 자신이 얻은 돈으로 이사를 가자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모양새가 이상해진다.
물론 머지않은 미래에 단지은에게 자신이 돈을 얼마 버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는 할 테지만.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단천은 단지은에게 사실을 말하는 것을 조금만 뒤로 미루기로 결심했다.
그러니 있는 돈으로 해 줄 만한 건···.
“나도 이번에 돈 들어온 걸로 한약 지어줄게.”
“오오. 진짜? 구슬약에 이어서 이번엔 한약이야?”
“효과 좋은 약을 알고 있거든. 만드는 데 좀 비싸긴 하지만.”
“그래? 이번엔 얼마짜리 약이야?”
“약재 구하기가 조금 편하니까 대충 1억쯤 나오려나.”
“허풍하고는. 잘 먹을게.”
단지은이 씩 웃었다. 자신의 것을 주는데도 전혀 아깝지 않은 관계. 역시 가족밖에 없다.
“음. 누나가 이렇게 선물도 줬으니까. 오늘은 그 도라지술 반 정도 마셔도 되는 거지?”
“안 돼.”
아무리 가족이라도 지켜야할 선은 있는 법.
선은 넘으려고 그러면 안 되지.
***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미리 계약해 둔 업체에서 와서 집에 설치되어 있던 VR캡슐을 옮겨서 재설치를 완료했다.
“사무실이 그래도 꽤 넓네.”
단천은 VR캡슐이 있는 방과 나뉘어 있는 방까지 확인한 다음 말했다. 첫 사무실로 방이 두 개나 되다니.
“어. 스튜디오 쓰는 사람들 보니까 편집자들도 같이 있는 경우가 꽤 있더라고. 그래서 편집실로 반 정도는 쓸 수 있는 넓은 곳을 골랐지. 나중에라도 편집자 생기면 저 방 쓰라고 하면 될 거야.”
“저기서 잘 수도 있겠네.”
“응. 지금은 편집자 없으니까 네가 자도 되고.”
“나 말고. 편집자들이 잘 수도 있다는 말인데.”
이 정도면 강한솔과 김진표가 출퇴근하기에도 꽤 괜찮은 공간이다. 지금도 둘이 업무 자체는 잘 하고 있지만 눈으로 직접 작업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천지차이다.
‘운이 좋군.’
게다가 방송실과 편집실 사이가 가벽으로 되어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로 얇은 벽이라면 벽 너머에서 하는 자신에 대한 말을 신경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들을 수 있다.
나랏님 없는 곳에서 나랏님한테 하는 말이야 자유라고 하지만, 나랏님도 자신에 대해서 하는 말을 들을 자유가 있는 법 아니겠는가.
“방음벽 설치는 미리 해 두고 싶었는데 일정이 꽉 찼더라고. 제일 가까운게 내일이었어. 지인이니까 딱히 안 봐도 깔끔하게 해 줄 거야. 나 변호사인 거 아는 사람이거든.”
변호사란 걸 알차게 써먹는 단지은에게 단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음벽이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은 탓에 내일까지는 방송이 무리다. 소음이 좀 나도 옆집과는 떨어져 있던 집과는 달리 이곳은 사무실이니까.
“생각해 보니 그냥 VR캡슐은 내일 옮길 걸 그랬나. 근데 시간이 제대로 안 남아서.”
“아니, 오늘 옮겨도 상관없어.”
어차피 내일은 집에서 방송하는 날이 아니다.
“내일 방송해야 되는데 괜찮아?”
“어차피 내일은 집에서 방송할 생각 아니었어.”
“왜? 어디 가?”
“나 부르는 게임사가 있어서.”
다키스트 에이지 2 쇼케이스가 바로 내일이었다. 그러니 내일은 소드아트 사에서 지정한 곳에서 방송을 해야 했다.
“아. 뭔지 알겠다. 베타 테스팅같은 거 하려고 스트리머들 부르는 거구나?”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그런 거지.”
“오오. 우리 동생 진짜 잘 나가나 본데?”
베타 테스팅이라기보다는 단독 쇼케이스지만. 결국 미출시 게임을 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뭐 준비해야 하는 건 없어?”
“준비라.”
단천은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의문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어떻게 매화검법을 알고 있는지, 내공을 운용하는 법은 어떻게 알고 있는지, 그리고 파일로드와 혹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수없이 많은 의문이 단천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굳이 준비해야 할 건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단천의 대답은 짧았다.
물론 의문은 많았다. 지구에서 보이는 무공들을 떠올릴 때마다 상단전이 찌릿거리며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내오기도 했다. 하지만 단천은 여전히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음모가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진행되는 것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다. 수천 수만 번의 모략에서 단천은 살아남아왔다. 단천이 살아남는 요령은 단순했다.
압도적인 힘.
호의적이라면 자신의 아래에 복속시킨다. 그리고 가로막는 자들은 철저하게 부숴뜨린다.
“온갖 지식과 모략도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무력한 법이지. 앞을 가로막으면 베어 버리면 그만일 뿐.”
“···잘 봐 달라고 선물이라도 사가라는 이야기였는데. 왜 뜬금없이 사람을 베니 마니 하는 이야기가 나와?”
단지은이 물가에 내어놓은 애를 쳐다보는 눈으로 단천을 바라봤다.
확실히 사회에 내놓기에는 아직 조금은 무리가 있는 동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