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뒤풀이 합방 (1)
─ 종합 게임 스트리머라고 해서 게임만 하는 건 아닙니다. 게임 스트리머라는 건 시청자들에게 게임을 대신하는 것 같은 경험을 주는 일이죠.
─ 그러니까 게임을 준비하는 과정, 게임을 하는 과정, 게임이 끝나고서의 과정도 게임에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말 그 자체군.”
단천은 오랜만에 「컴맹부터 시작하는 스트리밍」의 명언을 떠오렸다.
인터넷 방송이라는 것. 무도武道와 맞닿는 면이 있다. 단순히 수련하는 시간만이 무도인 것이 아니라 수련을 준비하는 시간과 수련을 마무리하고 휴식하는 시간까지가 모두 무도인 것처럼.
게임 스트리밍 또한 게임이 끝나고 뒷풀이를 하는 것까지가 스트리밍인 것이다.
“오늘도 하나를 배워 가는군.”
역시 컴시스는 걸작중의 걸작이다. 단천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눈 앞에 있는 [제로콜라 연구소]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형! 오셨어요!”
“와! 진짜 천마님이네!”
“싸인! 싸인 해 주세요!”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마자 제로콜이 인사를 건냈다. 호들갑을 떨며 싸인을 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제로콜 스튜디오의 편집자나 매니저들이었다.
뒤풀이 합방은 스튜디오가 있는 스트리머의 스튜디오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보통은 대회에서 가장 활약을 한 MVP의 스튜디오에서 합방이 진행되지만, 이번 대회의 MVP인 단천에게는 아직까지 스튜디오가 없다. 그런 까닭에 그 다음으로 커다란 임팩트를 남겼던 제로콜의 스튜디오가 합방 장소로 낙점된 것이다.
“형. 편집자 분들이랑 매니저한테 줄 싸인 좀 해 주세요. 이 사람들. 입만 열면 형 이야기야. 내 스튜디오 사람이 아니라 형 스튜디오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
“지필묵은 준비했나?”
“지난번에 형이 준비해 놓으라고 한 거요? 네. 사 놓기는 했는데. 이건 어디 쓰려고요?”
“싸인하려고.”
“싸인하는 데 지필묵을 쓰시려고요? 먹 갈려면 엄청 귀찮으실 텐데.”
“뭐. 귀찮겠지.”
“진짜 팬 서비스 대단하시네요. 저는 먹 갈 생각도 못 했을 텐데.”
“이제부터 많이 갈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마라.”
“···그게 무슨 말이에요?”
“먹을 충분히 갈도록. 싸인하기 충분할 정도로.”
“먹을 제가 갈아야 돼요?”
단천은 뭘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 제로콜을 바라봤다. 제로콜의 눈이 살짝 풀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자신이 왜 먹을 갈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납득시켜 달라고 열변을 토해냈겠지만, 제로콜은 이미 단천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질리도록 학습한 상태였다.
저 인간이 하고자 하는 일은 어떻게든 반드시 된다.
BJ천마가 자신이 먹을 갈라고 했다면. 자신은 어떤 식으로든 결국 먹을 갈게 될 터.
험한 꼴 보기 전에 먹을 가는 게 신상에 좋다.
사각. 사각.
제로콜은 아무 말 없이 먹을 갈기 시작했다.
“와. 평소에도 방송하던 때랑 그대로시네요.”
“그런가요.”
“저한테는 존댓말을 해 주시네요?”
“대뜸 반말하는 사람이 아니면 존댓말을 하려는 편입니다.”
“아. 그래서 시청자들 상대로는 반말 하시는 거구나. 근데 게임에서 잡히는 모델링보다 실물이 훨씬 나으시네요.”
지금 VR에서의 BJ천마의 모델링은 단천이 처음 게임을 시작했을 때의 몸이었다. 다소 팔다리가 말라 있는 빈약한 모델링.
반면 지금의 단천의 몸은 그 때에 비해서 훨씬 좋아진 상태였다. 풀창고의 스튜디오에 갔었을 때에도 비슷한 반응이기는 했다.
하지만 풀창고 스튜디오에 갔었을 때와 지금은 또 달랐다.
지금의 단천은 신체훈련도 충분히 하고 천단공이 4성 직전까지 들어선 상태다. 단천의 신체는 그 사이에 확연하게 근육이 붙고 어깨가 벌어진 상태가 됐다.
얼굴도 결국 몸이 받쳐줘야 한층 빛이 나는 법.
“얼굴도 엄청 잘 생겼어요!”
“윤하야. 너 오빠한테는 한 번도 잘생겼다고 안 했잖아!”
“전 없는 말 못 하니까요!”
다시 터져나오는 폭소. 단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자고로 잘 생겼다는 말에 기분나쁠 사람은 없었으니까.
사실 단천은 신체의 외면적인 변화에 대해서 크게 알지 못했다. 매일매일 자신의 몸이 점진적으로 나아져서 변화를 인식하기 힘든 면도 있었지만,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몸이 ‘어떻게 움직이냐’에 대해서는 빠삭하지만 외견이 어떻고 하는 것은 무공이나 전투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외견적인 변화가 꽤 나타난 모양이군.’
좋은 일이다. 호감형의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여러 모로 쓸모가 있으니까.
그 사이 제로콜이 먹을 모두 갈고 붓을 내어왔다.
“꽤 좋은 붓이군.”
단천이 예전에 쓰던 쥐 수염 붓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수준의 붓이다.
그래도 허투루 준비를 한 것은 아닌 모양.
붓에 먹을 묻힌 단천은 일필휘지로 싸인을 써 내려갔다.
천마군림천하天魔君臨天下.
용사비등이라 할 만한 글씨 그 자체였다.
역시, 붓으로 쓰니 만족도가 훨씬 높다.
“싸인 받아가세요.”
“저, 이제 싸인 끝났으면 지필묵은 창고에 넣어도 되겠죠?”
“아니. 제로콜. 너는 지필묵을 항상 들고 다닐 수 있도록.”
“······.”
제로콜의 눈이 살짝 부얘졌다.
“근데 화장같은 건 전혀 안 하시는 거에요?”
“아직까지는 해 본 적 없습니다.”
“그렇구나. 스튜디오 차리시면 아는 언니 소개해 드릴게요. 꽤 유명한 샵 출신이거든요.”
“기억해 두죠.”
제롴로의 매니저의 말에 단천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VR캡슐이야 화장 등 후보정을 할 필요가 없지만 이런 스튜디오에서는 화장이 반쯤 필수적이다. 실제로 풀창고의 스튜디오에서도 간단한 메이크업을 받기도 했었다. 당시에는 준비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서 간단한 색조화장만 했을 뿐이었지만.
“어때요. 오늘 시간도 많은데 메이크업 간단하게 받고 들어가시는 건?”
“너무 잘 해주지는 마. 나보다 잘 생기게 나오면 안 되니까.”
“지금 그대로 놔둬도 제로콜 오빠보단 잘 나올 걸요?”
제로콜을 한 마디로 다운시킨 매니저가 웃으며 단천을 메이크업 룸으로 안내했다.
“음. 보자. 일단 톤업은 빛이 좀 세니까 약하게만 할 게요. 선이 살짝 얇은 편이니까 조금만 굵게 만들면 좋을 것 같네요. 일단 간단한 토너부터 바르고···.”
“즐거워 보이는군요.”
“아무래도 그렇죠. 메이크업 하는 사람이라는 게 원판 좋은 사람 보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메이크업 해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거든요.”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마음이라는 것. 이를테면 좋은 무기를 보면 휘둘러보고 싶어지는 무인의 생각과도 비슷한 모양이다.
하긴. 단천 자신도 조조가 동탁을 베기 위해 썼다던 칠성보도를 휘둘러 봤었으니까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 지존. 이게 제가 어렵게 구한 칠성보도라는 겁···. 격공섭물을 왜 쓰시는 겁니까! 안돼애애애! 내 칠성보도!
─ 살살! 살살 휘두르셔야 합니다! 살살! 삼국시대 물건이라 오래 돼서 강도가 약하단 말입니다! 살살!
─ ···아···안 돼···.
─ 일곱 조각이 났으니 이름에 걸맞게 됐다니요! 지존! 너무하십니다!
단천은 나이에 맞지 않게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던 서윤학을 떠올렸다.
나이가 팔순이 넘었던 놈이 뭐가 그리 서러운 일이 많은지. 쯧쯧.
“원판이 좋다고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군요.”
“저야 매니저 하면서 겸사겸사 하는 거지만. 진짜 전문 메이크업 하는 언니들이 천마님 보면 엄청 탐 낼 걸요?”
말을 마친 제로콜의 매니저는 콧노래를 부르며 단천을 메이크업하기 시작했다.
단천은 거울 안의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붓터치를 몇 번 했을 뿐인데도 이전보다 훨씬 보기 좋아졌다.
단천 스스로는 외모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외모가 갖는 강점에 대해서는 넘치도록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같은 실력이라면 꼬질꼬질한 개방도보다는 훤칠한 화산파 사람을 뽑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메이크업이라는 것도 꽤 중요하군.’
대중적인 인지도를 먹고 사는 직업이라면 외모 또한 중요하다. 과거 게임에 대한 인식 자체가 좋지 않을 당시. 프로게이머들이 얼마나 외모 관리에 열을 올렸던가.
게임 스트리머라고 해서 단순히 게임 실력만 좋은 것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무림에서 단순히 내공만으로 천하제일에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단천이 메이크업의 중요성에 대해서 되새김질을 하고 있는 동안, 메이크업이 완료되었다.
단천은 거울 안의 자신을 보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메이크업 끝났어요.”
“어디 봐. 와우. 사람이 다르네. 근데 왜 나 메이크업 해 줄 때는 이렇게 안 돼?”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는 거 아니니까요.”
“오늘부로 넌 해고야.”
제로콜이 매니저와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기도 꽤 좋은 직장이다. 문주가 좋은 사람이면 문도들도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법이니까.
“그래도 메이크업이 딱 끝나서 다행이네. 창고 형이랑 유채도 막 도착했거든요.”
“와. 저거 천마 오빠야? VR챗으로 보던 거랑 너무 다르다. 대박. 완전 모델인 줄.”
“형 전에 본 것보다 몸이 더 큰 것 같은데?”
자잘한 이야기들은 오래 하지 않았다. 어차피 곧 있을 후기 방송에서 이야기를 하게 될 테니까.
지금은 그냥 간단한 안부 인사 정도만 하는 게 낫다. 제로콜의 실력 상승에 대해서 스튜디오의 사람들이 전혀 이야기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사람은 처음 들을 때와 두 번째 들을 때의 반응은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
넷은 스튜디오 안의 합방용 공간으로 이동했다.
공지해 놓은 방송 시작 시간은 오후 12시부터.
아직까지 3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는 상황. 그런데도 채팅창은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 방송 시작할때까지 숨 참는다.
> 천마언제와? 천마언제와? 천마언제와?
> 보고싶어 울고있어 밤새 내내 울었어
> 그냥 3분전에 시작하는 게 강호의 도리 아님?
> 그냥!! 내 3분 누가 가져가 달라고!!! 제발!!! 가져가 주세요!!
> 내 인생 가장 긴 3분이다 ㄹㅇ
[대기 시청자 수 : 10,074명]
“와. 이거 심상치 않은데요?”
“뭔 방송 시작도 전인데 만 명이야.”
정유채가 마른 침을 꼴딱 삼켰다. 방송이 시작되기 전인데도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송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만약 이 상태에서 방송이 켜진다면?
‘대회의 공식 방송. 아니면 그 이상의 시청자 수가 나올 거야.’
“대회 우승한 덕분인 건가?”
“뭐, 우승도 우승이지만 이야깃거리도 엄청 많았으니까.”
“할 이야기들 너무 많은데. 뭐부터 이야기해야 되나.”
웬만한 대형 스트리머들도 처음 볼 정도로 많은 수의 시청자 수가 예상되는 상황. 긴장이 되지 않는다면 비정상일 것이다.
당장 정유채 자신뿐 아니라 옆에 있는 제로콜도 풀창고도 살짝 얼어붙어 있지 않은가.
하아암.
옆에서 길게 하품을 내쉬는 인간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통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나쁘지 않군.”
‘저 인간은 인간 아니니까 논외로 하고.’
저건 인간 아니야. 인간 형태를 한 무언가지.
정유채는 가볍게 BJ천마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럼, 방송 카운트다운 할게요!]
[3]
[2]
[1]
[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향후 몇 년간 역대급으로 회자될 뒤풀이 합방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