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특훈 (3) - 여기까지 무료입니다.
“아아! 아깝다!”
아르바이트의 입에서 안타까운 신음이 터져나왔다.
공격을 막던 제로콜이 결국 날아오는 노트들을 막지 못해 통과시킨 탓이다.
[GAME OVER]
“이 정도면 제로콜님도 꽤 재능 있는 거 아닌가요?”
“재능이라기보단 노력이 빚은 결과물이죠.”
제로콜은 재능이 없다. 지금의 제로콜의 모습은 재능이 아니다. 그저 무의식의 영역에서도 ‘지식’에 따라 움직일 정도의 공부를 쌓았을 뿐.
누구나 무아의 상태에서 저 정도의 무위를 뽐낼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혈귀단 전원으로 실험을 해 봤기에 확신할 수 있다.
지금 제로콜이 가지고 있는 지식 대부분은 현재의 게임들에 맞춰져 있겠지만···. 그 부분이야 조금씩 수정하면 되는 거고.
단천은 고개를 돌려 단천에게 보이지 않게 영상을 찍고 있던 아르바이트생에게 말했다.
“이거 영상 안 올려 주셨으면 합니다.”
“네?”
“동영상 찍은 거 압니다.”
“그··· 알겠습니다. 대신 싸인 한 장만 해 주실 수 있나요?”
그 정도야 못해줄 것 없다. 처음 여기에 왔었을 때에는 싸인이 없었지만, 남는 시간동안 시간을 내 싸인을 연습했으니까.
단천은 아르바이트생이 내민 싸인지에 일필휘지로 천마天魔라는 글자를 휘갈겼다.
“와. 엄청 멋있네요.”
아르바이트생은 감탄했지만 단천은 자신의 붓글씨가 영 머뜩찮았다. 역시 붓이 아니라 펜이라 그런지 제대로 맛이 살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필묵을 죄다 들고 다니는 것도 귀찮고.
‘앞으로는 지필묵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을 데리고 다녀야겠군.’
단순한 해결책을 떠올린 단천은 아르바이트생이 영상을 완전히 지우는 모습을 확인했다.
아군의 전력은 숨기면 숨길수록 이득이다. 실력이 갑자기 일취월장한 제로콜의 능력은 보여주지 않는 게 좋다.
그리고 제로콜이 스스로가 ‘잘 한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실력 향상에도 도움이 안 된다.
무아의 경지는 의식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숨이 깔딱깔딱할 때까지 사람을 굴리고, 정신적으로도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에 적당히 정신력을 회복한 다음에 다시 싸움에 들었을 때에 일정 확률로 도달할 수 있는 게 바로 무아의 경지.
이 경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제로콜이 안다면 더더욱 무아의 경지에 들기 힘들어진다.
그러니 제로콜이 무아의 경지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최대한 늦게가 돼야 했다.
‘게다가.’
갑자기 제로콜의 실력이 엄청나게 실력이 늘었다는 건 커다란 뉴스다. 큰 뉴스는 가장 큰 무대에서 터트려야 하는 법.
지금은 때가 아니다.
“으어어. 힘들어.”
“생각나는 거 있나?”
“어. 칼로 할 수 있는 만큼 베긴 했는데. 잘 됐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네요. 저 어땠나요?”
“평소대로였다.”
“역시 그랬구나.”
제로콜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한 게임인 데다가 몸까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다. 원래 상태로도 겜못스인 제로콜 자신이 제대로 잘 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이대로 계속 연습한다면 충분히 실력이 늘 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이대로란 건?”
“앞으로 스트리밍 끝나고 두 시간. 나랑 같이 가벼운 운동을 할 거다.”
“매일요?”
“물론 매일이지. 그리고 휴방일에는 운동을 하루종일 할 수 있을···.”
“저, 저 당분간은 휴방 안 하려고요! 그, 그, 아무튼 열심히 방송에 집중하고 싶어서!”
제로콜이 파리해진 얼굴로 휴방일이 없음을 선언했다. 단천은 제로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휴방이 있든 없든 단천에게는 크게 달라질 게 없었다.
휴방일이 없으면 휴방일에 했을 만큼의 운동을 일주일에 분배해서 하면 되는 일.
결국 제로콜에게 가해질 총체적인 고통의 총량은 똑같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로콜은 안도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운동이 끝나면 오늘처럼 리드미컬 세이버를 한 판씩 하고 자도록.”
“방송은요?”
“방송은 없이. 매일 내가 참관하도록 하지.”
“이걸로. 진짜 실력이 좀 늘 수 있는 거겠죠?”
“물론이다.”
제로콜은 단천의 확신에 찬 표정을 바라보았다. 저 표정 너머에서 무언가에 대한 탐욕이 언뜻 비쳐 보였지만. 제로콜은 단천을 믿기로 마음먹었다.
***
그렇게 처음 약속됐던 일주일이 지났다.
[돈낳대 BJ천마-풀창고 크루 합방]
[게임 : VR chat]
사실상 곧 있을 돈낳대 일정을 생각한다면 마지막이 될 게 분명한 합방.
그 시간동안 풀창고 크루와 BJ천마는 거의 팀플 없이 따로 게임을 하는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의 돈낳대 팀들이 모여서 팀플을 하며 합을 키우는 것을 생각한다면 아주 이례적인 행보라고 할 수 있었다.
> 사실상 BJ천마 믿고 하는거지
> 이 정도 핸디캡은 줘야지 ㅇㅈ?
일부에서는 BJ천마의 실력 하나만을 믿고 나오는 오만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 근데 피드백 받고 하는 거 보니까 실력 엄청 늘었던데?
> ㅇㄱㄹㅇ 정유채 이번에 그마 승급전까지 도착함
> 풀창고도 다이아 승급전 직전임
반대로 팀원들의 실력이 빠르게 향상됐다는 의견도 많은 상태였다. 실제로도 BJ천마의 피드백은 매우 유효한 것들이었다. 재능과 피지컬만으로 1위를 쟁취한 사람이 하는 피드백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세세하고 복잡한 피드백들.
게다가 피드백만이 끝이 아니었다.
“피드백이란 거. 이렇게 좋은 거였구나.”
“신기하긴 하다. 다른 스트리머나 랭커 분들한테 피드백 받았을 때는 이렇게 쉽게 실력이 안 올랐었는데.”
정유채와 풀창고의 공통된 의견은 BJ천마의 피드백으로 인한 실력상상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었다.
원래 게임 실력이라는 것은 쉽게쉽게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게임을 많이 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BJ천마의 조언은 정체기에 있던 두 명의 실력을 빠르게 올려줬다.
“뭐가 문제인지를 짚어내는 것도 대단하지만 진짜 대단한 건 그걸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지를 말해 주는 거야.”
“그렇지. 보통 게임 잘하는 재능충들은 이렇게! 감으로! 당연히! 이런 느낌으로 이야기하는데. 천마 형은 문제점에 뒤이어서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는지까지 말해 주니까.”
> 거의 신도 다 됐누 ㅋㅋㅋㅋ
> 아니 듣기만 하면 티어가 오른다고 ㅋㅋㅋㅋㅋㅋ
> 나도 천마님한테 개인 교습 받고 싶다 ㅠㅠ
일취월장한 두 명의 실력에 대한 좋은 평가들이 꾸준히 올라왔다.
하지만 긍정적인 채팅들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 그래서 제로콜 어케 됨?
> 보니까 매일 잡혀서 운동하고 있던데 ㅋㅋㅋㅋ
> 레일 서바이버는 한 판도 못함 ㅋㅋㅋㅋ
> 살은 엄청 빠짐 사람이 변했더라
> 게임 못하면 어떠냐···건강하게만 자라다오···.
레일 서바이버를 한 판도 하지 않는다는 처방을 받은 제로콜에 대한 성토들. 실제로 제로콜의 실력을 확인할 방도도, 실력을 늘린다는 비밀 특훈이라는 것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으니 의심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불만과 의심이 반반씩 섞인 성토가 나오고 있는 가운데. 제로콜이 VR챗에 입장했다.
“안녕하세요오오. 제로콜입니다아아아.”
“제로콜 어서오고.”
“왜 다 죽어가는 소리를 내.”
“그게···어제 운동때문에 몸살이 약간.”
“그래도 일주일쯤 되면 적응이 돼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아니더라고요.”
단천이 시키는 훈련의 강도는 제로콜이 익숙해지는 것에 비례해서 강해졌다. 제로콜이 못 한다고 엄살을 피우는 것조차 귀신같이 잡아내며 철저하게 죽기 직전까지만 굴리는 능력.
“일단 실력은 모르겠고 급격하게 건강해진 건 알겠다.”
“혈색 봐. 다 죽어가던 애 혈색이 이렇게 좋아지냐.”
“부러우면 창고 형이랑 유채도 천마 형한테 1:1 강의 받아봐.”
“아니. 그건 좀.”
“그냥 악마한테 영혼을 팔고 말지.”
> 반응보소 ㅋㅋㅋㅋㅋ
> 단호박 그 자체 ㅋㅋㅋㅋ
둘은 매일매일 이어지는 제로콜의 하소연을 단톡방으로 실시간으로 들어 왔다. 둘은 단천의 수업이 얼마나 악랄한지, 무슨 운동을 시키는지, 건강혈인지 뭔지를 찔리면 어떻게 되는지 모조리 알고 있다.
그러니 풀창고와 정유채가 단천의 1:1 운동 수업을 들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BJ천마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그렇게 셋의 티키타카가 진행되고 있는 중에.
BJ천마가 입장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다들 연습은 잘 했나?”
“어. 티어 꽤 많이 올랐어.”
“저도 티어 많이 올랐어요!”
“나는 일주일동안 최선을 다해 레서를 안 했습니다!”
> 뭔가 스파이 한 명이 끼어 있는데
> 아 ㅋㅋㅋ 천마님이 하지 말랬다고 ㅋㅋㅋ
단천도 풀창고와 정유채의 티어가 올랐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실력도 늘기는 늘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단천 자신이 해 준 피드백이었으니까.
단천이 직접 피드백을 했는데도 실력이 안 늘었다면 그 자체로도 서윤학을 시켜 해부를 해서 관찰해 봐야 할 정도의 불가사의인 것이다.
그러니 문제는 실력이 늘었냐 아니냐가 아니라 ‘실력이 얼마나 늘었냐’이다.
“티어는 숫자에 불과하다. 중요한 건 실력이다.”
“그렇죠. 티어는 숫자에 불과하죠. 중요한 건 실력이니까.”
단천의 말을 제로콜이 고개를 끄덕이며 받았다. 거의 똑같은 두 명의 말이었지만 반응은 달랐다.
> 똑같은 말인데 무게감이 왜이렇게 다르냐 ㅋㅋㅋㅋ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전국 1위 vs 전국 꼴찌)
> 이래서 사람들이 좋은 간판 따려고 하는 거구나···.
티어가 밑바닥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하는 말은 무게부터가 다른 법이었으니까.
이런 반응에 평소인 제로콜은 살짝 어깨가 쳐졌겠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왜. 제가 실력이 늘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 동안 제로콜은 단천에게 하루 두 시간씩 잡혀 살아왔다.
‘진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단천에게 지난 일주일 내내 죽자사자 운동을 빙자한 학대를 당해 왔다. 실력이 안 늘었다면 억울해서 못 살 정도로!
그러니 제로콜 자신의 실력이 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늘었어야만 했다! 아니면 이 세상이 잘못된거다!
제로콜은 반쯤은 자신감에, 그리고 반쯤은 악에 받힌 채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제 실력은 지금 이 멤버중에서 2위입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목표는 레일 서바이버 2위입니다!”
> 일단 자신감은 확실히 배웠네
> 천마한테 자신감만 배워서 뭐 어쩌자는건데 ㅋㅋㅋ
> 근자감 미쳤다 ㅋㅋㅋㅋ
제로콜에게 쏟아지는 비웃음에도 단천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무림에서도 단천이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 바로 커다란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점에서 제로콜의 태도는 단천의 마음에 쏙 들었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천하제이인을 목표로 삼는 것이 당연지사 아니겠는가.
실제로도 혈귀단 단원들의 목표는 한 명도 빠짐없이 죄다 천하제이인이기도 했으니까.
─ 그런데 왜 천하제일(一)이 아니라 천하제이(二)죠?
─ 단주 앞에서 천하제일이 꿈이라고 했다가 무슨 후환이 생기려고?
─ 아···.
‘조금 더 자라면 혈귀단원으로 받는 것도 고려해 봐야겠군.’
단천은 제로콜에 대한 가벼운 평가를 마쳤다.
“그보다. 오늘 합방에선 역시 시참 하면서 팀워크 맞춰 보나요?”
“아마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 시참 손손손손손손손손
> 시참 가즈아ㅏ아아아
대회가 눈앞에 있으니 팀워크를 점검하는 것이 고정된 수순.
모두의 예상도 비슷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단천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같이 합은 좀 맞춰 봐야 되는 거 아니야?”
“합은 맞춰야 돼. 하지만 시참으로는 하지 않을 거다. 비효율적이니까. 간단한 연습만 몇 번 하고, 바로 대회에서 보도록 하지.”
“···시참 안하면 어떡하게요?”
풀창고의 질문에 단천은 짧게 대답했다.
“1:1 결투를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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