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천마-52화 (52/212)

11. 파일로드 (3)

“내가 묻고 싶은 건 하나다. 너에게 닷 핵을 준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

“핵을 준 사람이라면··· 단 대인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난 핵 안 썼다.”

“···알겠습니다.”

파일로드의 전혀 믿지 않는 표정에 다시 한 번 건강혈을 눌러줄지 단천이 고민에 빠졌다.

파일로드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괜히 핵 이야기를 꺼냈다. 최대한 빨리 화제를 전환해야 했다. 파일로드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해,핵을 처음으로 알게 된 건 제 팬한테서입니다!”

“팬한테서?”

“네! 평소에 후원을 많이 해 주던 팬이 링크를 보내 줬었습니다.”

“그 사람의 신상은?”

“제가 스토커도 아니고 팬 신상에 대해서 물으셔도 아는 게 없··· 기억났습니다! 그러니 손가락 들지 않으셔도 됩니다!”

파일로드는 전력을 다해 뇌를 굴렸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파일로드는 자신에게 핵을 처음 보내왔던 사람에 대해서 떠올렸다.

“그 팬의 팬 닉네임은 육도천이었습니다.”

“육도천?”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알 필요 없다.”

육도는 육도윤회를 뜻할 것이다. 육도의 하늘. 평범할 수도 있는 이름이지만 단천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당장 자신만 해도 중원에 떨어졌다 돌아온 인간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윤회란 것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핵을 보내온 곳은?”

“익명이라서 알 수는 없었지만···. 닷 핵 3버전을 받을 때에는 USB를 받았습니다.”

“그 USB는?”

“여, 여기 있습니다.”

단천은 평범한 USB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봤다.

“특이한 건 없군. 인장이나, 각인도 없고. 추적할 만한 게 외부에는 보이지 않아.”

“당연한 거 아닙니까?”

“원래 이런 걸 주는 놈들은 비밀스럽고 멋져 보이는 각인을 남기는 게 보통이거든.”

‘어떤 미친 놈들이 그런 짓을 하는데.’

파일로드가 눈살을 찌푸리거나 말거나 단천은 가볍게 혀를 찼다. 혈교나 포달랍궁 같은 밀교 놈들과 달리 철저한 놈들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램 자체는 확보에 성공했다. 핵 프로그램을 뜯어 본다면 뭔가 단서가 나올 확률이 높았다.

‘프로그램을 분석할 만한 사람도 있고.’

강한솔과 김진표라는 일류 프로그래머가 단천에게는 있었다. 요새 하루종일 영상 작업을 하느라 힘든 소리를 몇 번이나 해 댔었다.

‘힘들다는 소리가 나온다는 건 힘든 소리를 할 만큼의 여유 시간은 있다는 거지.’

여유가 있으니 남는 시간에 핵 프로그램 분석을 맡겨 놔도 될 터였다.

본디 불행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문 앞에 서 있는 법. 두 프로그래머에게 암울하기 짝이 없는 미래가 닥쳐오고 있었다.

“좋다. 이걸로 내 질문은 끝이다.”

“감사합니다. 단 대인.”

“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복수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그럴 생각 전혀 없습니다! 단 대인!”

없기는 뭘. 자신이 나가기만 하면 바로 관군에게 일러바칠 생각이 그득그득한 눈인데.

“치료는 끝났지만, 가끔 병이 재발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알다시피 네 병을 치료해 줄 수 있는 건 천하에 나밖에 없다.”

“허··· 헉!”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 알겠습니다! 신고는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처신 잘 하도록. 치료는 그래도 무료로 해 주겠지만.”

“무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단 대인!”

치료가 무료라고 한 건 별 이유는 없었다. 단천 자신의 치료가 완벽했다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파일로드에게서 소혼술의 부작용이 다시 터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치료는 완벽했으니까.

‘그보다 술이 한 잔 들어가서 그런가 살짝 알딸딸하군.’

술이 살짝 취하긴 했지만··· 아무튼 단천 자신의 치료는 완벽했다. 아마 그럴 거다.

그러니 치료를 해 준다는 말은 일종의 공수표인 셈.

하지만 파일로드 입장에서는 부작용이 언제든 터질 수 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파일로드가 신고를 하거나 뒷공작을 하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으리라.

“나는 간다.”

“들어가십시오! 단 대인! 앞으로 착하게 살겠습니다!”

“네가 어찌 사는지는 내 알 바 아니다. 그러니 네 살고싶은 대로 살도록.”

“아닙니다! 착하게 살겠습니다!”

단천은 왜 자신을 마주했던 인간들이 하나같이 착하게 살겠다는 말을 자신에게 늘어놓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파일로드도 그렇고, 페리오도 그렇고. 중원에서도 자주 그랬다.

누가 착하게 살라고 칼이라도 들이대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냥 칼만 들이댔을 뿐인데 뭔 반성을 그리 많이들 하는지.

단천은 누가 착하게 살고 나쁘게 살고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눈 앞에서 거치적거린 게 잘못이지, 딱히 나쁘게 살아서 심판한 적은 없었는데.

‘뭐, 사람들이 착하게 산다면 좋은 일인가.’

단천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세상이 좀더 착해진다면 단천 자신이 조금 더 막 살아도 세상의 균형은 유지될 터였다.

단천은 그렇게 천년하수오를 품에 끌어안은 채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개새끼.”

단천이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 고개를 들어올린 파일로드는 욕을 중얼거렸다.

미친 놈에게 걸려 재수도 없게 거의 전 재산을 털렸다.  게다가 자신이 핵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거의 기정사실화 된 상황.

최악중의 최악의 상황이지만···.

“···반년쯤 쉬다 복귀하면 되겠지.”

무슨 일이 터져도 반년쯤 지나면 사람들의 생각에서 잊혀진다. 게다가 자신의 방송은 원래부터 막장 방송을 지향하는 방송.

이런 대형 사건이 몇 건 터진다고 해도 콘크리트층은 돌아올 터였다.

그러면 다시 돈은 쓸어담을 수 있다.

“물론 이전만큼은 못하겠지만.”

핵 프로그램도 이제는 못 쓰니 그랜드마스터는 꿈도 꾸지 못할 터다. 그래도 연습은 꾸준히 해 둬야 했다.

“기분도 더러운데 레일 서바이버 몇 판이라도 돌려둘까.”

파일로드는 VR캡슐에 자리잡고 레일 서바이버를 실행했다. 아니, 실행하려 했다.

그런데.

불쾌한 어지러움증이 게임을 실행하려는 순간 파일로드를 괴롭혔다.

“으윽.”

레일 서바이버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게임들에서. VR게임에 접속하려고만 하면 어지러움증과 구토감이 파일로드를 덮쳐댔다.

파일로드는 몰랐지만 소혼술이 파일로드의 정신에 남긴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핵을 쓸 때마다 파일로드의 신체에 가해졌던 부하 탓에, 정신과 몸이 온전해진 지금. 파일로드의 몸이 VR게임을 할 수 있는 상황 자체를 거부하는 상황.

이런 상황에 대해서 파일로드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자신이 VR게임을 할 수 없는 몸이 됐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게임 실행을 몇십 번이나 실패한 파일로드의 두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렇다는 건···. 앞으로 게임을 못 한다고?”

그렇다는 건 스트리밍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됐다는 뜻이다.

“허허. 허허허허···.”

파일로드의 허탈한 웃음이 방 안에서 터져나왔다.

그렇게 파일로드라는 이름은 다시는 인터넷 방송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

“후우. 기분 좋다.”

집에 도착한 단천은 기분 좋게 탁자 위에 천년하수오를 올려놨다.

금은보화도 나쁘지 않지만 무림인에게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영약인 법이다.

“이 세상은 어떻게 된 게 천년하수오가 이렇게 막 굴러다니냐.”

하긴. 무공도 내공도 없는 세상이니 천년하수오고 만년하수오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냥 엄청 커다란 하수오랍시고 뜯어왔겠지.

파일로드에게는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이 마시는 게 세상에도 더 이득인 셈.

단천은 머릿속으로 눈앞의 천년하수오로 만들 수 있는 단약에 대해서 떠올렸다.

‘소림의 대환단, 화산파의 자소단, 무당의 태청단.’

혹은 진짜 약선단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단천의 입에 오랜만에 미소가 걸렸다.

“천아. 누나 왔···. 너 표정이 왜 그래?”

문을 열던 단지은이 집 안에 들어오다 멈칫거렸다.

일찍 퇴근해서 집에 도착해 보니 집에서 동생이 기묘하게 웃고 있다면 누구라도 단지은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리라.

단지은의 눈이 단천의 시선이 가 있는 방향을 향했다.

단지은의 동생이 기분좋게 바라보고 있는 건···.

“그거. 약주야?”

“어.”

“그 약주때문에 기분이 좋은 거야?”

“어.”

단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아저씨도 아니고.’

도라지 들어 있는 약주 좀 생겼다고 세상 다 가진 사람처럼 웃고 있는단 말인가.

얼마 전에도 이상한 약을 지어서 먹더니 이제는 도라지술이라니. 젊은 놈이 완전 아저씨가 따로 없다.

단지은은 조만간에 단천을 끌고 여기저기 사람 많은 곳을 데려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등산이나 사찰 여행같은 거 말고. 최대한 트렌디한 곳으로.’

머릿속으로 단천이 능이백숙을 먹으며 도라지술을 따라 마시는 것을 상상하던 단지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천이 세상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것은 것은 단지은도 잘 아는 일이었으니까.

지금은 그냥 장단을 맞춰주는 게 어쩌면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혹시 아는가. 사기당해서 샀던 잡초약처럼 혹시 모를 효능이 있을지.

단지은은 짐짓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단천의 앞에 앉았다.

“그보다. 그 술. 나도 한 잔 마셔 볼까?”

“······.”

“방금 진심으로 싫다는 표정 지었지.”

“어.”

“야. 누나가 너 위해서 고생한 게 얼만데 도라지술 한 잔을···.”

“도라지가 아니라 천년하수오.”

“그래. 누나한테 도라지인지 하수오인지 하수구 오물인지 뭔지하는 거 담근 술 한 잔을 못 주냐?”

눈을 감은 단천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단지은은 자신이 쓰러져 있는 동안 자신을 먹여살렸다. 가장의 역할도 했고, 자신을 위해서 수많은 희생을 한 누나다.

그러니, 하수오주 한 잔 정도는 줄 수 있다.

단천은 긴 한숨을 내쉰 다음 찬장에서 조그마한 소줏잔을 꺼내들고 술을 따랐다.

또르륵.

대충 네다섯 방울쯤 되는 천년하수오주가 술잔에 따라졌다.

“야. 그게 따른 거냐?”

“술 많이 먹으면 간에 안 좋아.”

“지금 그거 몸에 좋다고 생각해서 조금 따른 거잖아! 나 안 주려고!”

단지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른 것에는 그리도 덤덤하거나 달관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몸에 좋다는 것에는 왜 저리도 환장을 하는지.

누가 보면 세상천지에 다시없을 약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쪼르륵.

단지은의 닦달에 단천이 다시 하수오주를 따랐다. 소줏잔 반 잔 정도 되는 분량이 술잔에 담겼다.

단지은은 하수오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향기로운 꽃 같은 냄새가 코를 간질거렸다.

“우와.”

살면서 여러 술집에서 술을 마셔 본 단지은이지만 이런 짙은 향기는 처음 맡아봤다.

그렇게 술을 넘기자 마치 봄의 꽃밭에라도 간 것 같은 향이 온 입에 감돌았다.

술을 마시고 나자 따뜻한 온기가 온 몸을 타고 돈다. 진짜 좋은 약이라도 먹은 것 같은 기분.

“우와. 이거 죽인다! 이거 어디서 난 거야?”

“팬이 줬어.”

“진짜 맛있다! 한 잔만 더···.”

“죽어도 안 돼.”

쟤 눈 좀 보게. 한 마디라도 더 하면 누나 기절이라도 시킬 눈빛이다.

“더러워서 안 뺏어먹는다. 안 뺏어먹어. 아저씨. 그 도라지주랑 둘이서 백년해로하면서 살던지 하세요.”

단지은이 툴툴거렸다. 나중에 단천이 자면 꺼내다 한 잔 더 마시던가 해야지. 아니, 안주 꺼내서 몇 잔 정도 마시다가 마신 만큼 물을 채워넣으면 될 터다.

단지은이 새벽에 일어날 계획을 세우는 동안 단천은 도라지주를 든 채로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거 냉장고에 안 넣어?”

“냉장고에 넣으면 양이 줄어들 것 같아서.”

“······.”

지독하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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