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야방 - 게임사 (4)
“문주요? 문주가 뭡니까?”
“대가리.”
“아. 사, 사장님은 지금···.”
강한솔의 눈이 이리저리 돌아갔다. 어떻게든 자기 선에서 막아 보겠다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모양이었지만. 단천은 그런 잔머리를 용납하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안 온다면 어쩔 수 없고.”
“자! 잠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몸을 일으켜 나가려는 동작을 취하자마자 강한솔이 허둥지둥 방을 떠나 사라졌다.
“와···.”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제로콜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엄청 침착하시네요.”
“그런가.”
“보통 스트리머들은 사회 경험이 적거든요. 그래서 이런저런 일이 있어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사과를 제대로 안 한다거나. 제대로 공지도 안 하고 휴방을 한다거나.”
확실히 스트리머는 사람들을 많이 접할 기회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 만큼 어리숙하거나 지켜야 하는 법도를 모르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었다.
실제로 단천이 보고 있던 웹소설 작가도 외전연재가 띄엄띄엄이더니. 무슨 신작 게임을 한답시고 연재를 비정기적으로 하고 있지 않았던가.
“놈이 사는 곳만 알았어도 거꾸로 매달아 놓고 연재를 시키는 건데.”
“네?”
“아니다. 난 이런 경험이 많다. 그러니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문파는 작든 크든 이해타산으로 굴러간다. 칼싸움의 대부분은 이 이해타산이 걸려 있다. 그리고 단천은 이런 이해타산이 걸려 있는 싸움을 질릴 정도로 해 왔다.
순간순간 말 한 마디로도 칼을 빼들고 싸울 수 있는 곳을 수없이 경험해온 단천이다.
그러니 웬만한 정도의 수작은 통하지 않는다.
다급하게 나갔다가 돌아온 강한솔이 돌아왔다. 강한솔의 곁에는 정갈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있었다. 하인라인 사의 문주인 모양이었다.
“이 하인라인 사의 CEO. 이태흠입니다.”
“상황에 대해서는 들으셨나?”
“사건에 대해서는 오면서 간단하게 전해들었습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태흠과 강한솔이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사과는 됐고. 그 다음을 논의하고 싶은데.”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자리를 좀 피해 주게. 그쪽에 계신 제로콜님도, 자리를 좀 피해 주시겠습니까?”
“어쩔 수 없죠. 형. 저는 1층 카페에서 브이로그 좀 찍고 있을게요?”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이 이후부터는 둘 사이의 이야기다. 궁금하다고 해서 들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후우.
제로콜과 강한솔이 방을 나가고, 문이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한 이태흠이 긴 한숨을 토해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최악이라고 해도 될 상황이다. 게임 관련 커뮤니티가 죄다 터지고 있고, 발빠른 언론사에서는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 이태흠 앞에 있는 청년이 나이가 어리다는 것.
반면 이태흠은 이 판에서 닳고 닳아온 경험이 있었다.
그에게 제시할 수 있는 카드들은 머릿속에 대부분 추려 온 채였다. 아마도 합의금 명목의 돈과 이벤트 정도로 끝날 테니 다행이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는 다들 비슷한 말을 하는군.’
단천은 자신을 사술의 사용자로 몰았던 금와상단을 떠올렸다. 허공답보로 시비거는 무사 몇 놈을 패 줬더니 단천을 사술이나 쓰는 마인으로 몰았었다.
패 줬던 무사들이 황궁에서도 금의태상까지 올랐던 절대고수인데. 저런 양아치에게 두들겨맞을 리가 없다나 뭐라나.
아무튼 단천의 허공답보가 사술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이 되고 나자 상단주가 처음 했던 말도 ‘원하는 게 뭡니까?’ 였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라는 말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는 말이 아니다. 상대가 생각하고 있는 합의의 선을 떠 보겠다는 말이다.
이런 협상을 이기는 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주판 좀 튕기는 삶을 살아왔으니. 상대를 만만하게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무공인에게는 무공인의 협상법이 있는 법.
단천은 자리에 앉은 채로 살기를 내뿜었다.
“···크음!”
살기를 내뿜자 이태흠의 입에서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살기는 단순히 내공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생사의 기로를 수십 번 겪어온 자에게만 풍겨나오는 분위기도 세상에는 존재하는 법이다.
평소에는 여러 모로 귀찮은 데다가 단지은이 눈매 더러우니까 웃고 다니라고 하는 탓에 갈무리하고 다니지만.
지금은 그런 살기를 갈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이 인간. 뭐지.’
이태흠은 눈 앞의 청년을 바라봤다. 아니, 바라보려고 애썼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으리라.
눈을 마주치려고 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눈을 내리깔게 된다. 마치 뱀을 맞이한 쥐가 된 기분이다. 지금까지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어왔다고 생각했는데도 기에서 눌리는 느낌이랄까.
방 안의 온도가 높지도 않은데 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이태흠은 가지고 왔던 패를 먼저 꺼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하인라인 사에서는 앞으로 있을 이벤트에서 BJ천마님께 최우선으로 프로모션을 드릴 겁니다. 단가도 업계 최고로 드리겠습니다.”
“또.”
“사과의 표시로 약소한 금액을 준비했습니다. 일부는 바로 드리겠습니다. 나머지는 바로 전달드릴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전달될 수 있게 하겠습니다.”
“또.”
“······곧 출시되는 게임에 대한 정보를 비롯해서 사내 정보들을 전달해 드리는 핫 라인을···.”
“또.”
이태흠의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가는 것을 보며. 단천은 계속해서 ‘또’ 만을 말할 뿐이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보상을 올려 받았을까.
“그 어떤 보상도 만족스럽지 않은데. 협상할 생각이 없는 건가?”
“······.”
이태흠의 얼굴이 살짝 떨렸다.
“도대체 뭘 바라시는 겁니까?”
“당신이 가진 회사.”
이런 미친 새끼가.
란 말이 이태흠의 턱끝까지 올라갔다 내려갔다. 눈 앞의 인간은 뭣도 모르는 양아치가 아니다. 정말로 곧이 곧대로 회사를 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이태흠의 입이 열렸다.
“뭘 원하는 거지?”
“일종의 협력 관계.”
이태흠의 입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스트리머와 게임 기업은 협력 관계가 아니다. 물론 표면상으로는 협력 관계를 표방하지만 스트리머 한 명과 거대한 기업 간의 사이는 결코 대등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눈 앞의 인간은 대등한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협력 관계라면 이쪽에도 뭔가 해 줄 수 있다는 것으로 들리는데.”
“물론 해 줄 수 있는 것이야 있다.”
“해 줄 수 있는 것?”
“보아하니 레일 서바이버를 제외하고는 게임들이 죽을 쑤고 있는 것 같던데.”
“······.”
이태흠의 입이 꾹 닫혔다. 반박하고 싶지만 BJ천마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인라인 사의 현재 수익은 엄청나다. 실제로 레일 서바이버가 초대박의 히트를 낸 덕에 하인라인 사는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이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어떤 게임도 영원할 수는 없다. 오래된 게임일수록 게임의 유저수는 빠르게 줄어든다.
실제로도 레일 서바이버의 인구수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상황. 낙폭이 커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게임사는 계속해서 새로운 게임을 내야만 수익을 유지할 수 있다.
하인라인 사 또한 이를 잘 알기에, 나오는 수익의 엄청난 부분을 신작 개발에 투자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인라인 사가 내는 신작 게임들은 제작비를 하마처럼 먹어치운 값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당장 얼마 전만 해도 야심차게 시작한 「파천로」도 개박살이 난 상태.
캐시카우인 레일 서바이버가 끝나고 나면 새로운 판매원이 없는 상황인 것이다.
“게임이 잘 나가지 않는 이유가. 모션 캡쳐가 형편없어서 그렇다던데. 맞나?”
“···그래.”
VR게임은 플레이어가 완전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완전 자율형과 스킬을 시전할 수 있는 불완전 자율형으로 나뉜다.
언뜻 본다면 완전 자율형 시장이 클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플레이어는 화려한 액션과 멋진 모션이 있는 게임을 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런 모션들을 하나하나 배우는 것은 지루하고 힘든 일이다.
쉽고 간단하게 멋있고 싶다!
그저 스킬을 외치거나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술이 나가는 편의성을 추구하는 사람이 더욱 많은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완전 자율형 게임 시장은 현실형 FPS게임 정도로만 한정된다. 심지어 이 시장조차 빠르게 줄어들어가고 있는 판국. 까닭에 하인라인 사가 내놓은 게임들도 모두 불완전 자율형 게임이었다.
문제는 그 게임의 퀄리티. 정확히 말하자면 스킬 모션의 퀄리티가 바닥이라는 것이었지만.
“실제로 보니 모션 캡쳐가 거의 인형들 수준이더군.”
“실제 모션도 없이 그 정도를 만든 것도 기적에 가깝다.”
이 자율 게임의 모션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실제 유저나 무술 유파의 액션을 따 와 만든다.
하인라인 사는 이 방식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지만.
“시중에 남아 있는 무술 사용자가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어.”
현대 사회에서 창, 칼, 활 등 무기를 사람의 수는 극히 적다. 그 가운데서도 모션을 만들어서 쓸 수 있을 정도로 자세가 나오는 사람들의 수는 더더욱 적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모조리 대형 게임사가 선점해 스카우트해 놓은 상황이다.
후발 주자인 하인라인이 계약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겨우 구한 사람들은 대부분 수준 이하였지. 쓸만한 사람이 몇 있긴 하지만, AAA급 게임 하나 만들려면 이런 달인들이 백 명은 필요하다.”
“만약. 모든 무기들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설마. 네가 그 모든 무기들을 쓸 수 있는 사람이란 건가?”
“말대로다.”
이태흠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은 21세기다. 한국 내에서 냉병기들을 배울 데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눈 앞의 BJ천마라는 남자는 이제 갓 스물을 넘은 젊은 나이. 물리적으로 무술을 배울 수 있는 가능성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믿게 된다.
그가 보여준 말도 안 되는 플레이 이전데. BJ천마라는 인간이 보여주는 자신감 때문일까.
“샘플로 본좌가 무기를 쓰는 영상 몇 개를 보여 주도록 하지. 내가 보내 준 영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계약을 파기해도 상관없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러면 이제부터 협력 관계···.”
“정확하게 말하자면 협력보다는 혈맹血盟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혈맹···?”
그게 뭔데. 라는 표정이 이태흠의 얼굴에 스쳐지나갔다.
“아. 혈맹이라고 해도 크게 해 줘야 되는 것은 별로 없다. 내 소소한 부탁 정도만 들어주면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그냥 내가 궁금해하는 게임사의 뒷조사를 한다던지.”
“그 정도야 가능하지.”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놈의 위치를 추적한다던지.”
“···살짝 아슬아슬한데.”
“혹은 정사대전이 발발하면 목숨을 걸고 가장 앞에서 싸워 주는 정도의 선만 지키면 된다.”
“정사··· 뭐?”
“본좌는 관대한 편이니 방금 말한 선만 지키면 크게 터치하는 일은 없을 거다.”
이태흠의 눈이 흔들렸다. 대충 듣자면 무슨 전쟁이라도 났을 때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정확하게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계약서를 쓰도록 하지.”
이태흠이 단천이 한 말을 해석하려고 하고 있는 사이. 단천은 펜을 들어 일필휘지로 종이에 문장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단천의 손을 따라 순식간에 두 부의 계약서가 완성되었다.
다만 한문으로 적힌.
이태흠은 계약서로 추정되는 물건을 바라봤다. 당연하게도 뭐라고 적혔는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지렁이가 기어가는 글씨체다. 저런 걸 뭐라고 하더라. 초서체라고 하던가.
심지어 필체가 심하게 흘려져 있다. 의도적으로 읽기 어렵게 적기라도 한 것처럼.
“이거 사기 계약서는 아니···.”
“혈맹을 위해.”
이태흠이 말을 이어나가기도 전에 단천이 자신의 손가락을 펜으로 찔렀다.
깊숙히 찌른 펜에서 흘러나온 피로 지장을 찍은 단천은, 이태흠을 바라보았다.
계약서 내용을 알아보겠다고 하면 강제로라도 지장을 찍기라고 할 것 같은 굉장한 박력이다.
피가 흘러내리는 단천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이태흠은 말 없이 계약서에 인적사항과 싸인을 적어넣었다.
아무래도 강제로 손가락을 잡아뜯겨 지장을 찍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익숙한 손으로 종이에 묻은 피를 말린 단천은 자신이 중원에서 자주 사용하던 ‘일방적 종속적 비가역적 혈맹 계약서’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래도 금와상단과의 계약 때처럼 신체능력을 동원하지 않고 끝났다. 역시 21세기는 문명의 시대인 것이다.
“자. 이로써 우리는 혈맹이 됐다.”
“그래도 이 정도로 넘어가 줘서 다행···.”
“그러면.”
“?”
“첫 번째 조건은 끝났고, 두 번째 조건을 이야기하도록 하지.”
“······.”
확실히. 조건이 있다고 했지. 그게 하나라고는 이야기 안 했었다.
카아앙!
이태흠의 입 안에서 얼마 전 비싸게 했던 임플란트가 깨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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