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레일 서바이버 (2)
[레드 존이 시작됩니다!]
광선검에 한창 심취해 있던 단천은 귀를 울리는 경고음에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레일 서바이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까지 광선검에 취해 있을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단천이 처치한 남자의 옆에 보급 상자가 생겨 있다. 아마도 플레이어가 죽으면 바로 옆에 보급 상자가 생기는 모양.
단천은 죽인 남자의 아이템을 확인했다. 쓸모없는 물건은 없었지만 그래도 상하의 정도는 있었다.
“옷은 입어야지. 나는 풀창고와 달리 문명인이니까.”
> 아니 문명인이면 총을 좀 쓰라고
> 정보) 풀창고도 총은 쏜다
상하의와 기본적인 방어구를 갖춰입고 나자 저 멀리서 붉은 색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이 보였다.
레일 서바이버에서 플레이어들을 몰아넣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저 ‘레드 존’이다. 들어가 있는 한 지속적으로 체력이 줄어들도록 만들어져 있는 구역.
단천이 있는 곳은 레드존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지역이었다.
레드 존 바깥에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플레이어들이 몇 보였다.
‘세 명.’
세 명이 같은 팀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서로를 견제하거나 죽고 죽이는 총격전은 없었다.
레드 존이 활성화돼서 그 안에서 도망쳐나오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일종의 일시적 공동 전선이 형성된 셈.
굳이 따지자면 3:1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단천은 건물 사이로 몸을 숨겼다. 레일 서바이버는 FPS 게임이다.
“검 한 자루로 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상대와 정면에서 싸운다는 건 무식한 짓이지.”
> 아니 그러니까 니가 총을 쓰면 다 해결되는 문제라고
> (안 들음)
골목에 몸을 숨긴 단천은 들려오는 걸음걸이에 귀를 기울였다. 꽤나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원래라면 듣지 못했을 것이 분명한 소리인데도 지금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다.
‘내공이 늘어난 덕분이군.’
내공이 늘어나면 감각기관이 그만큼 향상된다. 시각, 청각, 촉각 등의 신경의 반응속도와 민감도가 그만큼 올라간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런 신경기관의 향상은 이런 종류의 게임에 있어서 치트키나 다름없는 성능을 보여준다.
바로 지금처럼.
터벅터벅.
‘걸음걸이를 숨길 생각도 없군. 지금 내가 있는 골목에서 25보 정도의 거리.’
단천은 고개를 내밀지도 않은 채 거리를 가늠했다.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서 머리를 내밀어야 했을 터.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상대에게 발각당할 가능성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뛰어난 청각과 수많은 실전경험이 있는 단천은 고개를 내밀 필요가 없었다.
당연히 발각당할 가능성도 제로다.
25보의 거리가 10보로 줄어드는 순간. 단천은 숨을 멈췄다.
호흡을 통해 상대가 자신의 위치를 알아채는 것을 막기 위함.
일종의 귀식대법이다. 내공을 운용할 수 없는만큼 완벽한 귀식대법은 아니지만.
완전히 방심하고 있는 상대를 처리하기에는 충분하다.
터벅터벅.
서걱!
단천의 광선검이 무방비하게 걷던 희생자의 몸을 그대로 베어냈다.
[BJ천마가 치킨맨을 처치!]
> ??? 방금 어떻게 거리 알아챈 거임? 보지도 않았잖아
> 그냥 소리 듣고 대충 안 거 아니냐?
> 그런 거 치고는 너무 확신에 차서 움직였는데?
채팅창의 의문이 터져오르는 동안 단천은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아이템을 루팅했다.
[VA-R7 레일건]
[연막 수류탄]
[티타니움 헬멧]
···
“오.”
딱 봐도 좋아 보이는 헬멧이 있다. 단천은 헬멧을 머리에 장착했다.
> 운이좋네 처음부터 젤 좋은 뚝배기도 나오고
> 확실히 천마 보면 운이 좋긴 함
이제 슬슬 채팅창에서도 ‘왜 총을 안 줍냐’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기 하고싶은 대로 하는 것이 BJ천마의 아이덴티티라는 것을 시청자들 대부분 이해한 덕분이었다.
> 그래 싸나이가 어디 가오 상하게 총을 쓰냐!
헬멧을 장착한 단천은 멀리서 다가오던 나머지 두 명이 있던 곳을 확인했다.
나머지 두 명은 앞서 나가던 플레이어가 죽자마자 바로 은엄폐를 한 모양이다.
하지만. 은엄폐가 서투르다. 한 명은 발자국이 그대로 보이는 채로 숨었고. 나머지 한 명은 전력으로 뜀뛰기를 한 탓에 호흡이 그대로 들린다.
‘25보 앞 쓰레기 컨테이너 뒤에 한 명. 거기서 우로 30보. 건물 안에 한 명.’
둘의 위치를 알아냈다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다. 단천은 쓰레기 컨테이너가 있는 쪽의 건물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건물 안에 들어선 단천은 망설임 없이 걸음걸이를 옮겼다. 걸음을 옮기던 단천의 발걸음이 어느 장소에 딱 멈춰섰다.
> ?
> 뭐함?
단천의 걸음거리가 멈춰선 곳은 아무 것도 없는 벽면이었다. 망설임 없이 걸어가던 걸음걸이가 멈춰서자 채팅창에 의문에 찬 갈고리가 도배됐다.
단천은 갈고리가 나오거나 말거나 벽에 귀를 가져다댔다.
철컥, 철컥.
벽 너머로 희미한 장비 점검하는 소리. 소리가 들리자마자 단천은 광선검을 뽑아들고 벽을 향해 검을 쑤셔넣었다.
푸숙!
[BJ천마가 과일밤을 처치!]
그리고 올라가는 킬 메시지. 완벽하게 머리를 꿰뚫은 모양이다.
“상대가 초보자였군. 운이 좋았다.”
> ??????
> 뭐냐 이거 ㅋㅋㅋㅋㅋㅋ
> 월샷 한거임???
> 위치 어떻게 안 거임??
> 미쳤다 이게 뭐냐고 ㅋㅋㅋㅋㅋ
“너희도 벽을 끼고 은엄폐를 할 때에는 항상 벽 너머를 조심하도록. 그렇지 않으면 광선검을 든 적에게 일격에 죽을 수 있다.”
> 뭔 개소리야 미친 ㅋㅋㅋ
> 그딴짓을 누가 해요 ㅋㅋㅋㅋ
> 천마님이 하는데요??
‘꿀팁을 알려 줘도 이런 반응이라니.’
잠행을 할 때에는 벽 안, 하늘, 땅 안까지도 모두 신경써서 움직여야 하는 게 기본이거늘.
혀를 찬 단천은 다음 목표물을 향해 움직였다. 지형지물에 대한 파악은 이미 모두 완료된 상태였다.
단천은 들어간 건물의 위로 걸어올라갔다. 옥상에 도달해서 아래를 내려보자 마지막 먹잇감이 보였다.
“뭐야 미친!”
마지막 먹잇감은 고함을 지르며 두 명을 시체를 번갈아 확인하고 있었다.
“당장 숨어도 모자랄 판에 소리를 내고 있다니. 저 녀석도 살아남긴 글렀군.”
>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했어야 했음?
“나에게서 살아남을 방법 따위는 없다.”
> ???
> 진짜 언제 한번 정신감정 특집 잡긴 해야됨
단천은 건물 옥상에서 먹잇감이 있는 반대편 건물을 향해 도약했다.
파악!
벽면에 있는 장식물을 손잡이로 삼아 떨어지는 충격을 흡수한 단천은 그대로 벽 아래로 몸을 떨어트렸다.
단천이 떨어지는 위치는 좌우를 돌아보며 욕을 내뱉고 있던 희생자의 바로 위. 단천은 꺼 놨던 광선검에 전원을 집어넣은 다음. 검을 떨어지는 그대로 찍어넣었다.
생각할 수도 없는 사각에서 들어온 일격.
지이잉! 푸욱!
마지막 희생자가 바닥에 쓰러졌다. 세 명을 모두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분. 심지어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세 명을 죽였다.
“이 게임. 생각보다도 훨씬 쉬운 게임이군.”
> 이딴식으로 게임하는 사람한테 반박 못한다는게 너무 열받는다 ㅠㅠ
> 사람이 맞는지부터 일단 알아봐야 되는 거 아닐까
단천의 가벼운 코멘트에 분노하는 레일 서바이버 유저들이 꽤 있었지만 어떤 딴지도 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1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동안 완벽하게 세 명을 처리해 버린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체력이 줄기는 커녕 다른 플레이어에게 공격을 시도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레일 서바이버단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신들린 BJ천마의 플레이를 계속해서 바라보는 것. 그리고 다른 스트리머의 방송에 가서 이 말도 안 되는 플레이를 알리는 것 뿐.
물론 이 소식이 전파되는 스트리머 가운데에는 '제로콜'도 포함되어 있었다.
***
“자! 오늘도 통계에 근거한 최고승률의 분석게임을 해 봅시다!”
> 네다스
> 네다슼ㅋㅋ
> 스톤즈가 요새는 말도 하네 ㄷㄷㄷ;;
“콜라단 너희들이 아무리 그래도 나는 태생부터가 챌린저라고! 운만 있으면 올라간다. 딱 기다려!”
> 네다스
평소라면 발끈했을 ‘네다스’의 도배에도 제로콜의 텐션은 업 돼 있는 그대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드디어 마의 스톤즈 2 100점을 넘어, 스톤즈 1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이제 곧 스톤즈를 넘어 브론즈로 넘어가는 것도 시간문제!
“많이 스톤즈라고 해 두세요. 이제 나를 스톤즈라고 부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호기롭게 말하고 있던 제로콜의 말에도 비웃음들은 여전했다. 마음껏 비웃어둬라. 그 비웃음을 모조리 환호성으로 바꿔 줄 테니.
그렇게 열심히 자신만만해하던 제로콜의 눈에 한 채팅이 들어왔다.
> 지금 BJ천마 첫판 하는데 ㅈㄴ잘함
“···BJ천마?”
물론 BJ천마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 어제 자신들의 팀에 들어오기로 예정됐던 패기로운 신입 스트리머 아니던가.
하지만 사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스트리밍중에 언급을 하는 것은 또 별개다.
맥락 없이 서로 아는 사이라고 이야기를 꺼내면 나중에 무슨 말이 나와도 나올 수 있다. 그러니 지금은 모르는 척 이야기를 꺼내야 할 때.
“그 사람. 잘해요?”
제로콜은 짐짓 BJ천마에 대해 모르는 척 이야기를 꺼냈다.
> 방금 레일 서바이버 시작했는데 지림 그냥 ㅋㅋㅋㅋ
> 전투력이 거의 80만 제로콜임
> 80만 제로콜이면 0 아니냐?
> 앗···아앗···
채팅창의 반응을 보아하니 BJ천마가 다키스트 에이지를 끝내고 레일 서바이버를 시작한 모양이다.
BJ천마가 자신의 팀에 들어올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스토리를 쌓아놓는 것이 좋을 터.
‘객관적으로 분석해 봤을 때 천마형이 팀에 들어올 가능성은 희미하긴 하지만···.’
돈낳대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어떻게든 알게 될 터다.
게다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 말도 안 되는 패기에 근거가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다시보기를 통해서 플레이를 보는 것도 가능하지만.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보고 싶다.
결론을 내린 제로콜이 운을 뗐다.
“한 번. ‘분석안’ 컨텐츠 가 볼까요?”
> 도방 가즈아ㅏㅏㅏ
> 분석은 0티어 제로콜! 분석1타강사 제로콜! 분석만 잘해 제로콜!
> 분식집 차리자 제로콜!
“어허. 도방이 아니라 ‘분석안’ 컨텐츠입니다.
제로콜은 무슨 게임을 하던지 그 분석능력 하나만큼은 0티어로 인정받고 있었다. 어떤 게임을 하던지 게임에 미친듯이 몰입하고 분석하는 것이 제로콜의 특기였으니까.
> 근데 그렇게 분석 잘하는 분이 왜 스톤즈임?
그런 분석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하는 게임마다 최하위 티어를 벗어나지 못하는 저주받은 컨트롤도 하나의 아이덴티티였지만.
‘네다스’로 도배되는 채팅창을 뒤로 한 채. 제로콜은 화면을 켜 BJ천마의 방송을 켰다.
제로콜은 원래 이 ‘분석안’ 컨텐츠를 할 때에는 분석안에 앞서서 여러 가지 경고 문구들을 고정 멘트로 삼고 있었다.
스트리머를 비방하는 말 금지, 이러쿵저러쿵 게임 스트리머를 훈수하는 말 금지와 같은 기본적인 룰에 대한 이야기들 말이다.
“···이게 뭐여.”
하지만 방송을 켜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제로콜은 이런 고정 멘트들도 잊고 턱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면 안에 나오는 BJ천마가.
서걱!
[더블 킬!]
서걱!
[트리플 킬!]
서걱!
[쿼드라 킬!]
변변한 장비 없이 광선검 한 자루만을 든 채로 플레이어들을 도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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