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다키스트 에이지 - 원초의 망령 (2)
[보스방에 입장합니다.]
보스방에 입장하자 중앙에는 녹아 버린 플라스틱 조각같은 것이 바닥에 엉겨붙어 있었다.
그 엉겨붙은 ‘무언가’ 가 무엇인지를 알아채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워어어어!
[원초의 망령이 울부짖습니다.]
인간도, 짐승도 아닌 무언가의 아가리에서 끔찍한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놈의 힘의 본질은 저 울음소리가 아니다. 그런데도 섬뜩한 울음소리만으로도 주변을 질리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고대신의 힘이 모든 곳을 뒤덮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력으로는 받아낼 수 없는 공포가 엄습합니다.]
“으아아아!”
“아, 안돼!”
함께 들어온 기사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러고 보면 고대신들은 인간으로서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격을 가진 존재들이라고 했던가.
정작 단천은 괜찮았지만.
[당신은 인세의 왕입니다.]
[왕의 격格이 공포를 상쇄합니다.]
“이런 기능이 있었군.”
다키스트 에이지에서 인간의 지위는 일종의 격이다.
단천은 이미 세 군데의 성을 가지고 있는 왕. 그 지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고대신이 만들어내는 힘을 상쇄할 수 있을 정도인 모양이다.
‘그렇다는 건.’
그 격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단천은 숨을 들이마쉬었다. 내공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그 구결만큼은 그대로였다.
단천의 입에서 파사破邪의 힘이 담긴 포효. 사자후가 터져나왔다.
[왕의 격이 담긴 포효가 기사들에게 미치는 공포를 어느 정도 상쇄합니다.]
“으···으윽···.”
“괜찮나?”
기사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줄어들었다. 표정 또한 한층 편안해졌다.
내공이 담기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왕의 격이 부족해서 그런지 정신을 온전히 차리지는 못했지만.
“네놈과 독대할 수 있으니 오히려 좋군.”
꿀렁꿀렁!
녹아붙은 플라스틱 덩어리같던 원초의 망령이 고혹적이지만 결코 인간의 것이 아닌 여인의 형상으로 변용되었다.
> 헤으응
> ㅗㅜㅑ
> 히로인 등장??인건?가?
“외모가 다가 아니다.”
게임인데도 불쾌한 악취가 음습할 정도로 풍겨오는 것을 느끼며 단천은 눈살을 한껏 찌푸렸다.
혈교血敎의 부교주와 정확히 같은 냄새다. 여러 가지 영혼이 뒤엉켜 있는 기분나쁜 냄새. 심지어 인간적이지 않은 생김새마저도.
그렇다는 건. 놈의 소혼술도 구현되었을 것이다.
꿀렁!
원초의 망령의 몸이 한번 크게 들썩였다. 플라스틱이 성형되는 것처럼 움직인 원초의 망령의 몸은 순식간에 변화되었다.
[소멸되지 않은 「사슬의 종말자」가 원초의 망령의 몸에 깃듭니다!]
음산한 사슬 소리가 절그럭거리며 방 안에 울려퍼졌다.
사슬낫을 든 사나운 인상의 보스몹. ‘종말자’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첫 보스가 종말자인가
> 보스런 드가자ㅏㅏㅏㅏ
> 남은 보스몹 : 0/10
채팅창에서 보스런 이라는 말이 계속해서 튀어나온다.
원초의 망령의 페이즈는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페이즈가 바로 이 강신 페이즈다.
강신 페이즈는 처리하지 않은 혼종 고대신들의 영혼을 빌어 싸우게 되는 페이즈다.
사실상 채팅창에서 나오는 보스런이나 다름없는 페이즈.
이 페이즈가 있기 때문에 다키스트 에이지의 플레이어들은 모두 다른 고대신들을 잡고서야 원초의 망령을 잡는 것을 시도한다.
혼종 고대신들을 잡지 않으면 그 난이도는 급격하게 올라가기 때문이다.
다키스트 에이지의 고대신들은 한마리 한마리가 게임오버를 수백 번은 각오해야 할 정도로 악랄한 보스몹들이다.
그러니. 아무 고대신도 잡지 않고 원초의 망령을 잡으러 오는 플레이어는 아무도 없었다.
단 한 명. 단천을 제외하고서는 말이다.
“···흐으, 이 정도는 돼야 할 맛이 나지.”
단천의 몸이 휘청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영락없는 고주망태 술꾼의 걸음걸이다.
> 저주나 풀고 말해 ㅋㅋㅋㅋ
> 이번엔 진짜 뒤졌음 ㅋㅋㅋㅋㅋ
> 하 ㅅㅂ 여기서 히든루트가 망하나
GRAAAA!
기괴한 기합을 내지르며 원초의 망령, 아니. ‘종말자’의 사슬낫이 단천의 목을 노렸다.
정확하기 그지없는 일격에도 단천의 몸은 대응하지 않았다.
> 유다희 처음으로 보네
> 아 지금까지 잘 즐겼다
> (네 수고하셨고요 콘)
모두가 BJ천마의 게임 오버를 직감한 그 순간. 단천의 목이 꺾였다.
휘익!
단천의 머리를 찍어버릴 듯 움직이던 사슬낫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 ?
> 뭐고 어케 피함
> 어케된거고 ㅋㅋㅋ
종말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뒤이어 회전한 사슬낫이 계속해서 단천의 몸에 날아들었다.
“그렇, 게, 쉽게는 안 되지.”
단천의 몸은 계속해서 휘청거리면서도 종말자의 공격을 비웃듯이 피해내기 시작했다.
영락없는 취객의 걸음걸이이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묘리는 결코 가볍지 않다.
지금 단천이 밟아나가는 보법은 개방의 전대 방주이자 방주 소이팔의 사부. 취선醉仙 주백이 만들어낸 보법이었으니까.
─ 내 혼자 쓰고 말 보법에 이름 같은 게 무어 필요하냐! 천마 니 꼴리는 대로 불러! 네 작명 솜씨 좀 보자꾸나!
─ 짭팔선보? 이 개잡종 놈의 자식아! 아무리 그래도 내가 평생 만든 무공인데 그딴 이름은 심했지!
─ 아니다! 짭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떠냐! 크헐헐헐!
주백과 단천은 연배 차이가 40살은 넘게 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꽤 친한 친구였다.
허울이나 배분, 위치의 차이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단천과 주백은 꽤 동질감을 느꼈었다.
‘그 덕분에 무공을 서로에게 알려줬었지.’
둘은 술을 마실 때마다 자신의 무공을 서로에게 시연해 보였다.
사실 무공을 알려주기보다는 내 무공이 이래서 더 세다! 는 자랑질이긴 했지만.
중요한 건 주백의 자랑질과 무공에 대한 생각이 단천의 머릿속에는 모두 들어가 있었다.
─ 취객의 걸음걸이란 건 세상 천지에서 제일 지 멋대로다. 취객 자신조차 조절하지 못하는 것이 취객의 발걸음이니 말이다.
─ 그러니 이 취객의 발걸음이야말로 이 천하에 다시없을 최강의 보법이라는 말이다! 크헐헐헐!
> 진짜 무빙 정신 나갈것 같네 ㅋㅋㅋㅋ
> 이게 왜 피해지냐고 ㅋㅋㅋㅋ
> 취권이다! 취권!
단천의 계속되는 움직임에 채팅창이 웃음과 찬양으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세 개나 되는 상태이상을 들고서도 최고 난이도의 보스인 「사슬의 종말자」의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서걱!
어느새 종말자에게 도달한 단천의 검이 종말자의 목을 베어냈다.
***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혼종 고대신들은 대부분 비슷비슷한 난이도들을 가지고 있다.
[소멸되지 않은 「어둠의 기사단」이 원초의 망령의 몸에 깃듭니다!]
[소멸되지 않은 「포옹의 성혈」이 원초의 망령의 몸에 깃듭니다!]
···
[소멸되지 않은 「나병의 도살자」가 원초의 망령의 몸에 깃듭니다!]
한 종류의 고대신조차 아무 피해 없이 잡았는데, 다른 혼종 고대신들이 단천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슬의 종말자부터 나병의 도살자까지. 10마리의 혼종 고대신들이 모두 쓰러지는 데에는 채 15분이 걸리지 않았다.
> 와
> 사람인가 싶다 진짜로
> 뭔 저주 3개나 먹고도 컨트롤이 사람이 아니네
[새싹뉴비 님이 1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지난 번에 왔던 뉴비에요! 저도 열심히 술 마시면 이렇게 될 수 있겠죠?]
> 딱대라 나도 오늘 술마시고 다에 하러간다
> 방금 아빠가 숨겨놓은 위스키 땄다 ㅋㅋㅋ 보스몹 다뒤짐 ㅋㅋ
> 천마가 다키스트 에이지에 술을 풀었다!!
채팅창에 뜻밖의 알코올 열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하고 있는 동안. 바닥에 늘러붙은 원초의 망령이 마지막 발악을 시작하고 있었다.
[원초의 망령이 최종 형태로 변화합니다.]
지렁이처럼 꾸물거리던 원초의 망령의 형태가 처음 보았던 여자의 형태로 되돌아갔다.
[원초의 망령이 당신을 인정합니다.]
[원초의 망령이 자신의 원래 형상을 드러냅니다.]
꾸벅 목례를 한 원초의 망령의 손에서 한 쌍의 자웅일대검이 솟아올랐다.
혈교의 부교주였던 혈마제 여승현도 마찬가지로 자웅일대검이었다.
> ??? 저게 최종형태 맞냐?
> 원초의 망령, 원래는 그냥 평범한 젤리였잖아
채팅창에서 당황한 채팅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원래 원초의 망령 2페이즈는 인간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정형의 젤리들이 계속해서 몸을 공격해 오고, 그걸 피하는 것이 주된 목적인 것이 바로 최종전.
그런데 지금의 원초의 망령은 엄연히 인간의 형태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채팅창이 의문에 휩싸였을 때. 후원 하나가 화면에 떠올랐다.
[풀창고 님이 10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오. 히든 스토리라서 그런지, 진짜 모습으로 나타난 모양이네요.]
> 진짜 모습?
> 뭐고, 찐 풀창고임??
> 방송 안하고 뭐해 ㅋㅋㅋㅋㅋㅋㅋ
[풀창고 님이 1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풀창고 : 점심시간 밥 먹으면서 구경하는 거에요 ㅡㅡ]
> 도방러다! 여기 도방러가 있다!!
> 그보다 진짜 모습이란 게 뭐임?
[풀창고 님이 10,000원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원래 순혈 고대신들은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힘의 일부만 이 세상에 보내요. 이런 비천한 곳에 자신의 진짜 힘을 쓸 필요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죠. 아마 우리가 계속 봐 왔던 원초의 망령은 짭퉁이고 지금이 진짜인 모양입니다.]
> 진짜면 뭐가 다름?
[풀창고 님이 10,000원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진짜 몸이 여기 나타난 거라면··· 클리어하면 진짜로 죽게 되는 거겠죠. 더 이상 원초의 망령이 이 세상을 위협하는 일은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 그럼 해피 엔딩에 발이라도 디디는 거네?
> 가즈아ㅏㅏㅏㅏ!!!
> 천마님! 저 개자식을 죽여 주십쇼!!!
다키스트 에이지의 스토리는 암울하기 그지없다. 원초의 망령을 처치해도 여전히 세상은 변하지 않고 종말이 유예되었다는 식의 엔딩이 전부다.
고대신들은 영원히 살아남기에 언젠가는 종말이 닥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다키스트 에이지의 세계였기에.
이 엔딩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결국 플레이어들은 해피엔딩을 원하기 마련이니까.
물론 해피엔딩을 바란다고 해도 게임사가 이미 정한 엔딩을 바꿀 수는 없었기에 불만은 금방 가라앉았지만.
하지만 지금. 처음으로 해피엔딩에 대한 실마리가 보인다.
그러니 다키스트 에이지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BJ천마를 응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엔딩300번봄 님이 1,000원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원초의 망령 잡으면 현상금 10만원!]
[봄봄봄봄봄님이 1,000원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나는 15만원!]
[미션맨 님이 10,000원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잡으면 100만 바로 쏩니다!!!!!]
순식간에 원초의 망령에 현상금이 쌓여올랐다. 단천은 승락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쉬이익!
혈마제 여승현. 아니, 원초의 망령의 검이 단천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묵빛으로 빛나는 검기와 터질 듯이 올라오는 핏줄. 여승현이 익히고 있던 묵혈마공이 극성으로 치달았을 때 나오는 증상들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검의 움직임.
보통의 쌍검이 자유롭고 예측불가능한 가벼움을 위주로 한다.
반면 지금의 원초의 망령은 패도적이고 위압적이기 그지없는 쌍검의 모습을 보인다.
‘이 게임을 만든 이가 누군지는 몰라도. 꽤 재밌는 인간이로군.’
무림에서도 아는 자가 극히 적은 천하자웅일대검을 이렇게 재현할 정도라니.
‘물론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이고. 지금 중요한 것은 눈 앞의 원초의 망령을 해치우는 일이지만.’
단천의 발이 바닥을 밟으며 또다시 자유롭게 움직였다. 짭팔선보는 원래대로라면 결코 잡힐 수가 없는 바람과 같은 보법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원칙을 벗어나는 무공도 존재한다. 잡을 수 없는 바람과 같은 보법이 있다면 바람마저도 잡아버릴 패도覇道의 검도 있는 법이니까.
한 쌍의 검이 단천의 머리 위로 내려찍혔다. 검식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풍압이 바람같은 단천의 움직임을 제약했다.
촤아악!
한 쌍의 검 중 한 자루에서 피가 튀겨나왔다.
“꽤 하는군.”
단천은 무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이 세상에 오고 자신의 피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취선에게 배웠던 짭팔선보만으로는 원초의 망령을 상대하기 부족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는 건.
‘내가 진일보시킨 취권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겠군.’
단천은 검을 고쳐잡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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