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천마-29화 (29/212)

6. VR챗 (1)

단천은 자리에 선 채 오늘의 방송을 복기復記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상형권에 도움을 받을 줄이야.’

단천의 몸이 천천히 움직였다. 두 손이 좌우로 퍼져나가고, 한 발로 균형을 잡고 있는 형태.

매의 형상이었다.

상형권에서 가장 문제가 됐던 부분 중 하나가 다른 생물의 느낌 자체를 형상화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는데. 다키스트 에이지에서의 ‘스컬 윙’을 통해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매의 형상뿐 아니라 원숭이, 곰, 사마귀, 심지어는 용을 조종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즐거움이 배가됐다.

그렇게 얼마나 새로운 깨달음을 수련하고 있었을까.

[‘동생풀창고’ 님께 통화 신청이 왔습니다.]

통화 신청이 도착했다는 알람이 들려왔다. 통화를 실행하기 위해 노트북 앞에 도착한 단천의 몸이 우뚝 멈춰섰다.

“아. 맞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직접 가서 확인을 해야 했지만 지금은 21세기다. 손으로 직접 마우스와 키보드를 놀려 움직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단천은 눈 앞에 있는 노트북의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댔다.

“기가봇. 통화 연결해 줘.”

[통화 가치를 확인합니다.]

“아니, 통화 가치 말고, 통.화.연.결. 해 줘.”

[통학 거리 계산을 시작합니다.]

“그거 말고···.”

[통화 연결이 종료되었습니다.]

“······.”

노트북을 노려보던 단천이 노트북을 반대 방향으로 꺾어 버리려고 하는 순간.

[‘동생풀창고’ 에게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새롭게 올라왔다.

단천은 심호흡을 하고 발음이 똑바로 되도록 입을 풀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입을 움직여 준비운동을 끝낸 단천은 입을 열고 또박또박 말했다.

“기가봇. 메.시.지 확.인.해 줘.”

[메시지를 확인합니다.]

“오!”

음성으로 메시지 확인을 실행하는 데 성공한 단천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바로 미래 기술력이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만으로 간편하기 그지없게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대단한 것은 단천 자신이 미래 기술에 이토록이나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는 것이지만.

단천은 뿌듯한 마음을 감추지 않으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동생풀창고 : 형 시간 될 때 연락해 줘!]

“좋아. 기가봇. 동생풀창고에···.”

말을 이어나가던 단천의 입이 멈췄다. 기가봇에게 통화를 연결하라고 시켜야 하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마우스를 움직이면 클릭 한 번으로도 풀창고와 통화를 할 수 있는데. 굳이?

불안하게 떨리던 단천의 눈이 감겼다 뜨여졌다.

“···아니.”

자신은 전투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물러서지 않는다. 타협하지 않는다.

그것이 설령 말을 못 알아쳐먹는 AI라고 할지라도.

“기가봇. 동생풀창고에게 통화 연결해줘.”

[풀 창고 대여소와 통화하시겠습니까?]

“아니. 동생풀창고에게 통화 연결···.”

그렇게 단천의 기나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

[‘천마형’에게 통화 연결 신청이 도착했습니다.]

풀창고가 수락 버튼을 누르자 다소 피로에 찌든 BJ천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풀창고인가?]

“아. 천마형! 연락 늦었네? 메시지 확인한지 30분정도 됐는데. 바쁜 일 있었어?”

[···이겨야만 하는 싸움을 하느라 늦었다.]

“이겨야만 하는 싸움?”

보아하니 늦은 밤에 뭔가 다른 게임이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목소리에 진이 빠진 것을 보면 BJ천마도 애를 먹는 극악한 난이도의 게임인 모양.

[그래서. 연락한 이유는 뭐지?]

“형. 나랑 같이 게임 대회 안 나갈래?”

[알았다. 나가도록 하지.]

“···나 아무 설명도 안 했는데?”

[지난 번에 대회 같이 나가 준다고 했었으니까.]

“아니, 그래도 이야기라도 듣는 게··· 형 일정도 있을 거고.”

[나는 네가 나가자고 하면 나가 준다고 했었다. 그걸 지키는 것 뿐이고.]

풀창고가 머리를 긁었다. 사실 그런 약속이 있었단 걸 증명할 방법은 없다. 뇌물 명목으로 50만원을 건네기는 했지만 그 이상으로 풀창고 자신의 시청자수도 늘어서 전혀 손해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런 입 발린 약속을 지킬 필요는 전혀 없는 상황.

그런데도 BJ천마는 전혀 주저하지 않고 대회를 나가겠다고 즉답한다.

그저 자신이 한 말을 지키기 위해서.

“으음.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BJ천마를 설득하기 위해서 준비했던 수많은 자료들이 죄다 필요없는 종이쪼가리가 됐지만 풀창고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우리가 할 게임은 레일 서바이버란 게임이야. 들어본 적은 있지?”

[없다.]

사실 모를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BJ천마의 게임 외적인 지식은 거의 전무하다는 것을 여러 번 확인했으니까.

“이 게임을 가지고 트인낭에서 매년 대회를 열거든? 근데 이번에 결원이 생겼어.”

[내가 그 자리를 메운다. 이를테면 땜빵이란 거군.]

“일단은 그런 거지. 근데 문제가 있어.”

[문제?]

“레일 서바이버 대회가 4인 큐로 돌아간다는 거지.”

[그러니까. 나머지 2명한테도 내가 나간다는 걸 납득시켜야 된다는 건가?]

“어. 나야 형 재능 아니까 형을 쓰자고 말한 건데, 아무래도 팀원들은 형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근데 큰 문제 없을 거야. 개인적으로 친한 동생들이거든. 말만 잘 하면···.”

[그럴 필요 없다.]

“왜?”

[낙하산 취급 받는 건 딱 질색이니까. 그 사람들. 초대해 줄 수 있나?]

“어. 일단 지금 접속해 있긴 한데 둘다 VR챗 중이네. VR챗으로 보는 게 편하겠다.”

[···VR챗?]

***

[무한한 세계! VR챗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VR챗이라.”

단천은 팔다리를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풀창고의 말에 따르자면 VR챗은 가장 큰 규모의 메타버스라고 했다.

메타버스가 뭔지는 아직도 알쏭달쏭하지만 말을 들어 보면 메타버스는 가상현실을 구현해서 대화도 나누고 채팅도 할 수 있는 공간인 모양이었다.

‘그냥 휴대폰으로 채팅하고 대화하면 안 되는 건가.’

사소한 의문이 단천의 머리를 지나갔지만. 실제로 접속해 보니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눈 앞에는 보이는 분위기 있는 카페. 거기에 멋지게 만들어진 야경을 즐길 수 있었으니까.

“이를테면 휴대폰의 컬러링이랑 비슷한 장식이라는 이야기지.”

그렇게 단천이 메타버스의 위대함에 수긍하고 있을 때. 풀창고가 VR챗에 접속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풀창고님이 VR챗에 접속하셨습니다.]

“아. 먼저 접속해 있었구나. 잠시만, 나머지 두 멤버 초대부터 할게.”

[현재 공간에 ‘정유채’님을 초대합니다.]

[현재 공간에 ‘제로콜’님을 초대합니다.]

[초대가 수락되었습니다.]

초대가 수락되었다는 메시지가 떠오르자 두 명의 사람이 허공에서 생성되었다.

공중에서 나타난 것은 살짝 날카로운 인상의 안경 쓴 남자 한 명과 활발한 인상의 여자 한 명이었다.

“반가워요! 봄비처럼 상큼한! 매일매일 새로운 에너지를 전파하는! 정유채에요!”

활발하기 그지없는 인사가 정유채에게서 터져나왔다. 아마도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VR챗의 룰인 모양이다.

저렇게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아무리 그래도 영 어색하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로마에 오면 로마 법을 따르는 법. 잠시 뜸을 들이던 단천의 입이 열렸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천하제일인. 고금제일인. BJ천마다.”

그렇게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소개를 끝낸 단천은 옆에 있는 ‘제로콜’을 쳐다봤다.

“반갑습니다. 제로콜입니다.”

“···그렇게 소개해도 되는 건가.”

“그러면요?”

“······.”

단천이 어디에서 얻은 것인지 모를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사이, 풀창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일단 상황은 들어서 알 거고. 이 사람이 내가 우리 멤버로 넣자고 제안한 ‘BJ천마’형이야.”

“근데 괜찮아요? 파일로드 오빠가 인성은 글러먹었지만 그래도 실력은 엄청났잖아요.”

“오빠는 무슨. 몰래 연습할 때마다 막말만 하던 인간인데. 그냥 파일로드라고 불러.”

“그럴까요?”

상황을 보아하니 파일로드라는 사람의 대내외적인 평가는 매우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뭔가 큰 일이 터져서 잘렸다고 했으니. 같이 대회 연습을 한 사이에도 안 좋은 일이 생겼을만도 했다.

“이제 보기 힘들 것 같은 사람 욕은 그만 하고, 이번 대회 이야기부터 해야 돼. 천마형 이야기는 들은 적 있어?”

“도네이션으로 피지컬 좋다고 몇 번 듣기는 했는데···. 사실 잘 몰라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면 영상으로 일단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풀창고가 바닥을 몇 번 건드리자 넷이 앉아 있던 바닥에서 영상이 떠올랐다.

서유나가 만든 단천의 매드무비였다. 그것도 오늘 영상이었다. 단천도 보지 못한 매드무비다.

“이거. 나도 못 본 것 같은데.”

“형네 편집자 누나한테 연락해서 설득할 때 쓸 영상 필요하다고 하고 받아왔지.”

하여간 준비성도 좋다. 혀를 찬 단천은 자신이 나오는 영상을 바라봤다.

낮고 깊게 깔리는 웅장한 음악. 이어지는 검격. 검격 한 번에 한 마리씩. 몬스터들이 음악에 맞춰서 바닥에 쓰러져나갔다.

“오.”

“와. 영상 퀄리티 죽인다. 이런 편집자를 어디서 구했대?”

게임 플레이도 플레이었지만, 영상을 보고 있는 두 사람도 스트리머다. 말랑튜브에 업로드되는 영상의 퀄리티를 바로 알아챌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명이 영상의 퀄리티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에 음악은 후반부로 넘어가고 있었다.

긴장감 있게 흘러가던 음악이 이내 극도로 느려졌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십수 마리의 트롤들. 완전히 주변에 둘러쌓인 상황.

이 상황이 360도 회전캠으로 일순간 잡혔다.

그리고 클로즈업되는 단천의 얼굴.

짧게 감겼다가 뜨여지는 눈.

이어지는 흠잡을 데 없는 발도發刀와 순식간에 주변을 휩쓸어버리는 검격.

검격이 끝나자 트롤들의 머리가 비처럼 떨어져내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스탭롤이 올라가며.

[BJ천마 MADMOVIE]

영상이 끝이 났다.

“와아아아아!”

영상이 끝나자 정유채는 물개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대단하긴··· 하네.”

제로콜은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풀창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말로 백 마디 BJ천마의 실력에 대해서 설명할 바에 영상 하나를 보여주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는데. 제대로 먹혀들었다.

영상 자체의 퀄리티가 엄청났기 때문에 둘의 고개가 지금 계속해서 끄덕여지고 있는 것.

물론 그 영상의 퀄리티가 엄청났던 것은 단천의 플레이가 대단했던 것의 지분이 가장 크기는 했지만.

“보다시피 천마 형은 역대급 피지컬을 보여주고 있어. 우리 팀의 에이스로 영입해도 아무 문제없을 거야.”

“일단 피지컬은 합격! 합격이에요!”

“근데. 괜찮나? 이거. 다키스트 에이지잖아.”

“그게 왜?”

“다키스트 에이지는 PVE 게임이고, 냉병기를 쓰는 게임이잖아. 피지컬이 진짜 말이 안 되는 수준이라는 건 알겠는데. 레일 서바이버는 아예 다른 게임이야.”

제로콜의 말에 정유채의 눈이 몇 번 깜박였다.

“확실히. 그건 그러네. 풀창고 오빠도 다키스트 에이지에서는 날고 기는 고인물이었는데 레일 서바이버에서는 그냥 지나가는 플래티넘이잖아.”

“지금 플래티넘 무시하냐?”

“나는 다이아니까. 무시해도 되지!”

“확실히. 다이아와 플래티넘의 격차는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할 수 있지.”

“스톤즈는 조용히 하고 있어.”

“내가 스톤즈에 있는 건 실력 때문이 아니고 팀원 운이 없어서 그래. 확률상 극히 희박하지만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네 다음 스톤즈.”

대화로 미루어보건데 정유채의 등급은 ‘다이아몬드’, 풀창고의 등급은 ‘플래티넘’, 제로콜의 등급은 ‘스톤즈’인 모양이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누가 높은지 알 수 있는 등급 방식이다.

“제가 얼마나 운이 없는지는 나중에 수식으로 보여줄 테니 그 때 논박하기로 하자고.”

““네다스.””

“···지금 내가 스톤즈인건 검증에 무의미해. 여기는 BJ천마님의 실력을 검증하기 위한 자리니까.”

““네다스.””

풀창고와 정유채가 말끝마다 네다스라는 말을 하는데도 제로콜은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팀의 에이스 역할을 하던 파일로드의 티어는 챌린저였어요. 그러니까 대한민국 서버에서 100위를 왔다갔다 했거든요? BJ천마 형은··· 아. 말씀 편하게 하세요. 등수가 어떻게 돼요? 피지컬 보니까 아무리 못해도 다이아는 갔을 거고.”

“등수 같은 건 없어.”

“등수가 없다뇨? 그게 무슨 말이죠?”

“말 그대로. 등수가 없다는 말이다.”

“아. 이번 시즌 아직 플레이 안 하셨구나. 그럼 플레이타임은 얼마에요?”

“플레이타임은 0시간.”

“···네?”

“내 레일 서바이버 플레이타임은 0시간이다. 여기 들어오기 직전에 레일 서바이버 구매 완료했다.”

단천의 말에 제로콜과 정유채가 채근하듯 풀창고를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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