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천마-23화 (23/212)

4. 첫 월급으로 (1)

“으아아아.”

단지은은 한 달쯤 인간을 먹지 못한 좀비처럼 처량한 소리를 내며 집으로 향했다.

가장 큰 별이 보이는 달동네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있는 곳이 그녀의 집이었다. 모조리 꺼져 있는 주변 집들의 조명이 단지은을 더욱 피곤하게 만들었다.

새벽별 보며 나가 저녁별 보며 돌아오는 삶에 그녀의 몸은 찌들어 있었다. 변호사 생활이라는 건 오래 살려면 하면 안 되는 짓이다.

“그래도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다행이네.”

오후 9시 퇴근이면 상당히 일찍 퇴근한 편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마냥 나아질 것 없이 보였지만 이제는 집에 동생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운이 좋다면 자기 전에 동생의 얼굴도 볼 수 있을지도.

달칵.

“천아, 누나 집에 왔···. 이게 무슨 냄새야?”

집의 문을 열어젖힌 단지은의 머리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집 안에서 향긋한 냄새가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꽃이나 방향제와 같은 느낌이 아닌, 굳이 따지자면 한약에 가까운 향기.

향기가 나는 곳은 집 식탁 위에 있는 조그마한 구슬이었다. 저런 걸 뭐라고 하더라··· 환약이라고 하던가.

“누나 왔어?”

구슬에 선풍기 바람을 쬐여주고 있던 단천이 고개를 돌렸다.

“그게 다 뭐야?”

“이거? 환단. 한약이라고 해도 되고.”

“뭐 하는 한약인데? 그보다 돈은 어디서 났어?”

“후원금으로 샀어.”

후원금. 그러고 보니 단천이 후원금 계좌를 열어 달라고 했었다.

거기서 후원금이 들어온 모양이다. 액수가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그 돈으로 눈 앞의 약들을 산 것일 터다.

“이거 다 해서 얼마야?”

“사백만원.”

“···사백만원?”

“어.”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단천을 보며 단지은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신문지 위에 놓여 있는 환단의 갯수는 대략 서른 개 가량.

그렇게 따지면 저 손톱만한 환단 하나가 십만 원을 넘는다는 의미다.

사기? 말도 안 된다. 일단 단천이 방송을 시작한 지는 며칠 되지 않았다. 사백만원이라는 돈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지금 단천이 이야기하는 돈은 정가를 이야기하는 것일 터. 실제로 단천이 환약을 산 가격은 정가의 99% 할인이라던가 하는 식일 터였다.

원가를 부풀려서 눈속임을 하는 전형적인 사기 마케팅이다.

“천아. 이거 환불하러 가자.”

“환불은 왜. 그것보다 환불 못해. 약재들 다 뭉개서 빚은 거라서.”

“···뭐라고?”

그러고 보니 싱크대에 정체 모를 풀뿌리들의 잔재가 남아 있다.

상품을 사서 직접 환약을 제조하게 만드는 식의 제품인 모양이다. 일단 물건을 뜯어 저렇게 환약을 만들었으니 환불은 불가능해졌다. 전형적인 사기 수작이다.

“···망했다.”

“뭐가.”

“아니야.”

단지은은 코를 훌쩍였다. 눈시울이 절로 붉어졌다. 단천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을 알고 있었지만 번 돈을 이런 식으로 사기당하게 되다니.

사기 금액을 돌려받는 것은 불가능할 테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천에게 장단이라도 맞춰 주는 것밖에는 없었다.

동생이 번 돈으로 고심고심해서 산 물건이다. 그러니 기분이라도 좋게 만들어 주자.

단지은은 애써 평정을 연기하며 입을 열었다.

“엄청 향긋한 냄새 나네. 뭐로 만든 거야?”

“질 좋은 고려산삼이랑 삼십 년짜리 갈근, 마황이랑 백리향을 섞고 웅담을 섞었어. 원래는 웅담 대신에 영물의 내단을 넣는게 좋지만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뭔가 전문적인 단어들의 조합이 줄줄 흘러나왔다. 사기꾼이 말한 단어들을 그대로 늘어놓는 것이리라. 단천은 저래봬도 기억력 하나만큼은 엄청났으니까 사짜가 이야기하는 말도 곧이곧대로 기억했을 터.

단지은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구나. 효능이 뛰어난 모양이네?”

“약선단이라고 해. 내공 증진 효과도 있지만 무림인이 아닌 자에게는 미미하고··· 자양강장에 특효지.”

“자양강장?”

“어. 하나 먹어봐.”

단천이 환약 하나를 단지은의 입에 집어넣었다. 쓸 것 같기만 한 이름의 약재만 들어가 있었는데 웬걸, 기분좋은 향기가 입 안에 빠르게 퍼진다.

“이허, 씨허 머허?”

“씹어 먹어도 되고 녹여 먹어도 되고.”

단지은은 입 안에서 환약을 살살 굴렸다. 겉보기엔 딱딱하고 퍼석해 보이던 것이 입 안에서 몇 번 굴리니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

“우와.”

신기하고 특이한 경험에 단지은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뜨였다. 하나 더 먹어 볼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단지은의 손이 자연스럽게 다른 환약으로 향했다.

찰싹!

“아야! 왜 때려!”

“하루에 한 개만 먹어. 말 했잖아. 비싼 거라고. 여러개 먹어 봤자 효능도 없어.”

“어차피 싸게 샀을 거잖아.”

“사백만원어치라니까.”

천아. 그거 사기야. 이거 무슨 신기한 원리로 입에서 녹는진 모르는데, 너 사기당한 거야. 니가 산 약초들은 잡초야.

단지은은 입모양으로 꿍시렁거렸지만 단천에게는 씨알도 먹혀들지 않았다.

‘그보다··· 이상하게 몸이 가볍네.’

입을 삐죽거리며 삐져 있던 단지은의 눈이 깜빡였다. 약을 먹은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매일같이 달고 살던 더부룩한 위도, 뻐근한 어깨도, 방금까지 쓰러질 것 같던 피로함도 사라져 있었다.

아마 오랜만에 한 가족과의 대화가 불러일으킨 효능일 터였다. 왜, 부모님들이 자식들만 보면 하루 피로가 다 풀린다거나 하는 그런 거 말이다.

···그게 아니면 정말로 단천이 산 물건이 약효가 조금은 있는 걸지도. 100% 사기가 아니라 99.9% 사기라던가.

“자. 절반. 서른 개 만들었으니까 14개.”

“서른 개 절반이면 15개잖아.”

“······.”

“알았어, 농담이야. 농담.”

단천이 아껴먹던 보약 뺏어먹는 도둑 바라보는 눈을 하기에 단지은은 손사래를 치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래도 동생 뒷바라지한 보람이 있다. 비록 사기기는 하지만 이렇게 보약도 누나 지어 주고.

***

그렇게 단지은이 잠든 밤. 단천은 거실에서 가부좌를 튼 채 자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약선단을 이렇게 싸게 만들 수 있을 줄이야. 운이 좋았어.’

단천이 오늘 만든 약선단藥善丹은 몸을 깨끗하게 만드는 데 특효를 가지는 물건이다.

중원에서는 본래 들어가는 재료들이 죄다 고려 물건이었던 탓에 한 알 한 알이 천금과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재료 수급을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지금 단천이 있는 곳은 고려가 있던 한반도였으니까.

심지어 약선문에서 비밀로 전수되던 약선단의 제조법도 단천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상황.

‘약선문과 전략적 제휴 관계를 맺길 잘 했군.’

허구한 날 침략하던 천마교도로부터 약선문을 보호해주는 대신 받아낸 약선단의 제조법이 이렇게 쓰일 줄이야.

약선문은 침략을 당하지 않아 좋고, 단천은 약선단의 제조법을 알게 되어 좋고, 천마교도들은 약선문을 괴롭히라는 단천의 명령을 듣지 않게 되어 좋은.

완벽한 윈윈윈(win-win-win)의 전략적 제휴였다.

자신의 얼굴만 보면 입술로 욕을 내뱉던 약선문주의 얼굴을 떠올리던 단천은 입 안에 약선단을 털어넣었다. 그렇게 내공을 끌어올리던 단천의 몸이 미미하게 떨렸다.

‘···내공이 늘어나 있다.’

원래 조그맣기 그지없던 단전이 단천 자신도 모르는 새 자라나 있었다.

방금 먹은 약선단 덕분은 아니었다. 약선단의 주된 효능은 몸의 정화였지 내공 증진이 아니다. 게다가 약선단이 아무리 잘 만들어진 환약이라고 해도 먹자마자 내공이 늘어날 정도로 대단한 물건도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떠오르는 이유는 단 하나.

“게임 덕분인가.”

단천의 생각이 다키스트 에이지에서 있었던 ‘내공’에 가 미쳤다. 물론 신체에 전류를 좀 가하는 것만으로 내공이 늘어날 리는 없었다. 그게 된다면 왜 환약을 먹고 있겠는가. 콘센트에 젓가락 꼽고 단전 지지고 있지.

하지만 게임에서 겪은 실전경험들은 다르다. 비록 그 세상이 가상일지언정 그 경험들만큼은 진짜다.

게임에서 단천이 행한 무의 묘리가 조금씩 몸에 깃들기 시작하고 있다면?

신체에 매여 있는 중단전과 하단전이 아닌 정신과 신체가 양립하는 곳인 상단전이 열리고 있는 것이라면?

‘···내공을 증진시킬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

신화경에 도달했던 단천에게도 상단전은 많은 부분이 미지의 영역이었다. 아직까지는 논리의 비약이지만 정말로 VR게임이 내공을 증진시키고 있는 것이라면···.

‘게임은 실전 감각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서서 원래의 경지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단천의 운기행공이 점점 깊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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