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합방-다키스트 에이지 - 성주(2)
첫 번째로 달려든 것은 기사 입실론이었다.
거대한 망치를 들고 있는 육중한 덩치의 남자를 바라보던 단천의 입이 열렸다.
“풀창고보다 크네.”
“입실론은 덩치만 크지 지방질이 많아서 제가 훨씬 알찹니다. 저거 다 풍근이에요 풍근.”
> 자존심 ㅋㅋㅋ
> 내 욕은 참아도 근육 욕은 못 참는 풀창고··· 너란 남자···
[기사 ‘입실론’과 전투합니다.]
그냥 한 번에 다 덤비라고 하고 두들겨 패 주는 편이 더 편하지만. 단천은 굳이 1:1의 전투를 택했다.
이 자리는 단순히 시비 거는 기사들을 두들겨 패는 자리가 아니라 기사들을 가르치는 자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성주님. 이 몸은 비실이 레이놀즈처럼 만만하지 않아.”
“아가리로는 누구나 천하제일인인 법이지.”
입실론의 투구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안에서 웃고 있는 모양이었다.
“간다!”
우우웅!
입실론의 망치가 공명음을 내기 시작했다.
> 시작부터 신성력 쓰네
> 보통 2페이즈 3페이즈 가야 쓰는데
> 상대가 상대니까 어쩔 수 없지 ㅇㅇ
“신성력?”
“기사들이 사용하는 특수 능력입니다. 각각의 기사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에 서리게 되는 힘이죠. 이 신성력으로 강화된 무기는 원래 무기의 몇십 배나 되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단천은 풀창고의 설명을 듣고 있지 않았다. 단천의 눈은 저 ‘신성력’이라고 이름 붙어 있는 검기에 쏠려 있었기에.
“우랴아아아!”
우람찬 소리를 낸 입실론이 망치를 단천에게 꽂아넣었다. 저게 진짜 검기라면 검을 맞대는 것은 자살행위다.
단천의 가속된 몸이 입실론의 망치를 피해냈다. 목표물을 잃은 망치가 바닥에 꽂혔다.
콰아아앙!
꽤 단단하던 바닥이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반구 형으로 파였다.
> 와 진짜 파괴력 ㅋㅋㅋㅋㅋㅋ
> 신성력 저거 말이 안 된다니까?
> 인간이 저러는 게 말이 되냐 ㅋㅋㅋ
바닥을 터트리듯 폭발시키는 모습을 본 단천은 확신을 가졌다. 저건 검기다.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정련된 검기.
단천은 검을 들어 자세가 흐트러진 입실론의 몸을 찔러들어갔다. 완벽한 타이밍의 일격. 하지만 검은 입실론의 몸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카강!
“하핫! 소용 없다! 신성력을 쓰고 있는 기사의 몸은 철벽이나 다름없지!”
‘확실히 내가기공이다.’
일반적인 검으로는 뚫을 수 없게 되는 피부의 경화. 절정 고수 이상이 내가기공을 운용할 때 나오는 특징이다.
신성력이니 뭐니 운운하고 있지만. 저 모습은 완벽히 내가기공을 운용하는 무림 고수라고 할 수 있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다키스트 에이지를 만든 사람이 무림과 무슨 관계이건 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던 일이었으니까.
검기가 이 게임이 구현되어 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니 지금 단천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다른 쪽이었다.
“저 검기···아니, ‘신성력’이라는 것. 플레이어도 쓸 수 있나?”
단천이 궁금해하는 것. 그것은 검기를 이 게임에서도 쓸 수 있는가였다.
> 못씀
> 저건 보스 몹이니까 쓰는 거고 플레이어는 못 씀
> 아예 그런 시스템이 없음
> 플레이어는 마력으로 마법이나 갈겨야지 뭐 ㅋㅋ
“마력.”
그러고 보니, 이 게임의 스텟에 마력이라는 능력치가 있었다. 이 게임은 알게 모르게 중원무림의 법칙을 많이 가져다 썼다.
그렇다면 마력이라고 하는 것이 내공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단천의 머릿속에 들었다.
단천은 입실론의 공격을 계속해서 피해내며 마력을 끌어내려 애썼다.
“···근데. 마력은 어떻게 쓰는 거지.”
> 마법 스킬을 배워야 마력을 쓰지
> 뉴비라서 그런 거 모른다고요
> 아니 뭔 한방에 다 때려잡으면서 뉴비래 양심도 없나
다키스트 에이지에서는 마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법을 따로 배워야만 했다. 활용도도 낮고 위력도 별로 좋지 않은 탓에 마법을 배우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내가기공··· 아니, 마력을 쓸 수 없다는 말에 단천의 표정이 굳었다.
“마력을 안 쓰면···.”
> 왜 지금 와서 기사들은 못 이긴다고 하려고?
> 엌ㅋ 있는 척 다 하더니 약한 모습 ㅋㅋㅋㅋ
“···팔다리를 베어 버리는 수밖에 없는데.”
> ???
> 뭔 끔찍한 소리를 하는 거임 이 인간은
> 못 이긴다(x) 팔다리를 잘라야 제압할 수 있다(o)
“뭐. 어쩔 수 없지. 운명이려니 생각하도록.”
단천이 포기하고 입실론의 다리에 직검을 꽂아넣으려는 찰나. 풀창고가 입을 열었다.
“···마법 안 배워도 마력 쓰는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 방법이 있나?”
“음. 마력을 쓴다고 하기는 좀 어려울지도. 그냥 몸에 마력을 돌리는 느낌이라서요.”
> ??
> 그런 방법이 있었어?
> 풀창고 또 약 파네 ㅋㅋㅋㅋ
채팅창은 불신으로 가득했다. 그럴 만도 했다. 풀창고 자신이 말하고 있는 ‘마력 사용’은 아는 사람만 아는 버그성 플레이었으니까.
심지어 이 버그는 알려진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다키스트 에이지를 아직까지도 하고 있는 썩은 물이 아닌 이상에야 모를 만도 한 상황.
“일단 온 몸에 힘을 빼고 집중한 다음. 머릿속으로 마법을 사용하겠다는 생각을 하면 돼요.”
“아는 마법이 없는데?”
“쓸 줄 모르는 마법을 쓴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쓸 줄 아는 마법이고 자시고. 단천은 이 게임에 무슨 마법이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 본 마법이 있기는 하군.’
단천은 캐시미어가 사용했던 스컬 월을 떠올렸다. 뼈로 된 벽을 만들어내는 마법.
‘스컬 월.’
삐빅!
[배운 적 없는 스킬입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오류음과 함께 단천의 몸에 자그마한 전류가 흘렀다. 단전에서부터 시작된 전류는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몸을 한 바퀴 돌았다.
전형적인 소주천이다.
“호오.”
“전기 느낌이 오죠? 이게 처음에는 그냥 시스템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마력이 늘어나면 늘어난 만큼 전기가 강해져요. 물론 몸을 상하게 할 정도는 아니지만요.”
> 마력이 늘어나면 전기가 강해지는 건 어떻게 알게 된 거임?
“그, 그거야 게임을 하다 보니까 실험을 이것저것 하다보니.”
> 풀창고는··· 마조히스트··· 메모 완료···.
“아니! 그냥 순수하게 게임의 숨겨진 면들을 파고 들다 보니 알게 된 정보란 말이에요!”
풀창고가 해명을 하고 있는 동안 단천은 몸을 흐르는 전류를 확인했다. 실제 내공과는 다르지만 내공과 같은 길을 흐르는 것을 충실하게 구현해 놨다.
마치 아는 사람이면 ‘써 보라’는 듯이.
단천은 몸에 도는 ‘마력’에 정신을 모았다. 내공을 돌리는 것과 같이 호흡을 정련하고 내공을 사용하려는 곳에 집중한다.
단전에서 시작한 마력은 몸으로, 팔로, 어깨로 흘러나가고. 마지막으로는 단천이 들고 있는 직검에 도달했다.
우웅.
입실론의 것에서 퍼져나온 것과 같은 나지막한 검명劍鳴이 단천의 검에서도 울려퍼졌다.
비록 검의 끝에 맺힌 검기는 손톱만한 크기였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 ????
> 와 이게 된다고?
> 이 겜은 도대체 팔 게 어디까지 남아있는 거임 ㅋㅋㅋㅋ
단천의 검에서 신성력이 퍼져나가는 것을 본 채팅창이 경악에 빠졌다. ‘신성력’이라고 불리는 힘은 게임상의 난이도를 위해서 게임사가 기사라는 몬스터들에게만 부여한 힘.
플레이어는 절대 사용할 수 없게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천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신성력을 사용하고 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단천은 채팅창에 일일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검기를 게임에서도 쓸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기쁠 뿐.
“이러면 팔다리를 베지 않아도 되겠군.”
> 기뻐하는 포인트가 거기였냐 ㅋㅋㅋㅋ
“우랴아아아!
입실론의 망치가 다시 단천을 향해 날아들었다. 검기의 크기 하나만큼은 초절정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었지만.
딱 그것뿐이었다. 움직임이 너무나도 뻔하디뻔했다.
기사들은 자신보다 강한 자들을 만나 본 적 없다. 그러니 자신의 힘을 크게, 강하게 만드는 데에만 온 힘을 집중해 왔을 터.
‘저 꼬라지로 무림초출행을 했다간 이류 검객한테도 모가지 따였을 텐데.’
단천은 혀를 끌끌 찼다. 아무리 그래도 닳고 닳은 기사라는 설정인데 저 꼬라지로 캐릭터들을 만들어 놓다니.
이 게임을 만든 자를 잡아다가 훈계를 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지만.
지금은 가르쳐야 할 사람이 게임 제작사가 아닌 기사들이다.
‘어떻게 가르쳐줘야 되려나.’
잠시 고민하던 단천은 결론을 내렸다.
‘중원에서처럼 하면 되겠지.’
단천은 무림에서도 혈귀단을 다시 없을 무력조직으로 만들어 본 경험이 있었다.
─ 혈귀단? 그 마교의 미친 놈들?
─ 인간성 다 버리고 무공에 영혼을 판 놈들 같으니라고.
─ 혈귀단을 세 마디로 정의하자면. 마교제일견. 천하제일견. 고금제일견이지.
평범한 마교의 단 하나를 중원 최고의 미친개로 만들었던 게 바로 단천의 덕이었다.
단천의 사사를 받는 것은 중원 그 어떤 고인의 사사를 받는 것보다 뛰어난 실력 증진을 보인다고 말할 수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중원 아카데미 1타강사라고 할 수 있다고나 할까.
─ 너! 그렇게 말 안 듣다간 혈귀단에 보낸다!
─ 나쁜 짓 하고 살면 다음 생에 혈귀단으로 태어난다!
왜인지 천마신교와 중원의 학부모들에게는 자녀들을 겁주는 대명사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사소한 일이다.
혈귀단의 악명이 퍼진 것은 간악한 정파 놈들의 언플 때문이었지, 단천의 가르침에 잘못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으니까.
단천 자신의 가르침에는 문제가 없었다. 실적으로 모든 것을 증명한 것이 바로 혈귀단이었으니까.
그러니 혈귀단에게 가르침을 내리던 때의 경험을 되살리기만 하면 충분하다.
“죽어라아아!”
입꼬리를 올린 단천은 기세 좋게 다시 달려드는 입실론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단천의 손이 절도 있게 원 모양의 궤적을 그렸다. 회전의 묘리를 충분히 담은 단천의 손바닥이 입실론의 갑옷 위에 도달했다.
내부를 진탕시키는 격산타우의 묘리가 입실론의 갑옷 위에 꽂혀든 것이다.
퍼어억!
“끄웨엑!”
돼지 멱 따는 것 같은 소리가 입실론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내공을 사용한 격산타우다. 그것도 극한의 깨달음을 가지고 있는 단천이 시전한 격산타우.
내공은 최소한만을 사용했지만 속이 멀쩡할 리가 없을 터.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입실론을 바라보던 단천의 입이 열렸다.
“야.”
“끄어어어.”
“그래. 살아 있으니 듣고 있겠지. 몸 좀 괜찮아지면 바로 줄 맨 뒤에 붙어라. 알겠냐?”
“끄어어어.”
“그래. 혹시라도 몸 괜찮은데 안 일어나고 있으면 태어난 걸 후회하게 될 테니까 알아서 하고.”
“끄, 끄허어.”
입실론의 고개를 손으로 잡아 강제로 끄덕이게 만든 단천은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가르침을 사사해야 할 기사들이 한가득이다.
“다음 나와.”
> 뭔 한 방으로 기사를 눕히냐 ㄷㄷㄷ;
> 저거 신성력 위력 미쳤네;;
> 근데 한 방으로 눕히면 기사들이 무슨 배움을 얻음?”
"옛 말에 그런 말이 있다.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인간을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라고."
> 그게 지금 상황이랑 뭔 상관임
> ???
"뒤집어 말하면, 죽지 않을만큼의 고통을 계속해서 주면, 인간은 계속해서 강해진다는 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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