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키스트 에이지 (7)
“저. 그,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천마님은 파밍이 좀 필요한···.”
“2번.”
“이게 난이도가 제대로 설명이 안 된 것 같은데 부연 설명을 좀 더 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풀창고의 설명에도 단천의 눈은 풀창고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단천의 눈이 가리키는 방향을 쫓아 움직이자 나오는 것은 자그마한 메시지창이었다.
[원혼 ‘풀창고’를 게임에서 내보내시겠습니까?]
[Y/N]
“─라고 생각했지만 그만뒀습니다! 이또한 천마님의 선택! 호탕하고 탁월한 선택입니다!”
단천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아챈 풀창고가 빠르게 말을 바꾸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 비-굴
> 아 ㅋㅋㅋ 여기서 쫓겨나면 우리랑 같이 모니터로 봐야된다고 ㅋㅋ
풀창고는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BJ천마의 컨트롤이 유래없는 수준이라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지금 BJ천마의 장비는 너무나도 허접했다.
문제는 무기와 방어구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지도 못한다는 것.
“지금 천마님의 방어구로는 한 대라도 맞으면 그대로 게임 오버입니다. 만약을 대비해서 이 ‘남성성의 상징’정도는 착용하고 게임을 진행하시는 게···.”
서걱. 단천의 검이 풀창고가 들어올린 팬티를 베어갈랐다. 반 조각난 팬티를 보는 풀창고의 눈이 부옇게 흐려졌다.
“언젠가 만나게 될 뉴비를 생각하면서 열심히 강화한 건데···.”
> 뉴비한테 그런 거 입힐 생각좀 하지마
> 저딴거 입히려고 하면 오던 뉴비도 도망가겠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풀창고가 훌쩍이거나 말거나 단천은 브라딘에게 말을 걸었다.
“라군 성을 공략하겠다.”
***
라군 성채는 한 때는 인간들의 주요 거점이었지만 지금은 이물異物들에게 반쯤 넘어가 있는 성채다. 성주를 비롯한 상층부의 인간들은 모두 괴수화가 완료되어 있는 상황이고, 인간들은 세뇌향으로 인해 이상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상황.
원래의 스토리에서 라군 성채를 공략하는 방법은 공성전이었다.
“수많은 아군과 라군 성채의 인간들을 제물로 바친 뒤에야 라군 성채를 얻어낼 수 있었죠. 스토리상 무고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죽여야 돼서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스토리였는데··· 이런 루트가 있었을 줄이야.”
풀창고가 지하수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단천 일행이 도착해 있는 곳은 라군 성채의 지하에 있는 미로같은 지하수로였다.
“원래 스토리에서는 왜 지하수로를 통해 움직이지 않은 겁니까?”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의 수가 극히 적으니까요.”
지하수로의 통로는 겨우 한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수준이다. 이런 조그마한 통로를 통해 라군 성채를 공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단 한 명으로도 충분한 전력을 내는 괴물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의미가 없는 통로라는 이야기.
> 혼자만으로도 성채 뚫어낼 수 있는 능력자라고 인정받은 거 아니냐 ㄷㄷ
> 사실상 천마님 혼자면 1인군단이라고 봐야지
그렇게 지하수로를 통해 움직인 일행은 라단 성채의 최심부로 보이는 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혼탑에 일단 도착은 했는데. 이거, 진짜 세 명이서 공략할 수 있는 곳 맞습니까?”
하수구 뚜껑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풀창고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성혼탑은 라단 성의 공성전에서도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탑이다. 수많은 함정들과 몬스터들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인 것은 성주 ‘캐시미어’와 그의 수하들이다.
“원래 스토리대로라면 플레이어가 여행을 하며 모은 동료들이 캐시미어 수하들의 지원을 오랫동안 막아내 주는데···.”
“저희는 여기서부터 암살을 하며 성혼탑을 오를 겁니다.”
[성혼탑 공략]
[성혼탑에서 암살을 통해 최상층까지 오를 것]
> 암살하면서 올라간다네
> 하긴 이 숫자로 정면돌파는 무리지
암살 의뢰는 다키스트 에이지 뿐만 아니라 다른 게임에서도 꽤 난이도가 높은 종류의 퀘스트였다.
“천마님은 암살 퀘스트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암살이라.”
단천은 자신의 첫 암살을 떠올렸다. 혈귀단이 능력을 인정받고 처음으로 단천에게 맡겨졌던 것이 바로 암살 임무였으니까.
‘악명높던 녹림 호왕채의 채주인 녹정야를 죽이는 임무였지.’
호왕채는 강간과 살인, 약탈을 매일같이 일삼는 악명높은 산채였다. 천마신교는 호왕채를 포섭하고 그 악명을 더욱 퍼트려 중원의 거점으로 삼고 싶어했다.
그리고 이 임무를 맡게 된 것이 바로 단천이었다.
단천의 첫 번째 임무인 녹정야의 암살. 이 암살은 단 한 명의 목격자도 없이 성공적으로 끝났었다.
왜인지 그 이후로는 살면서 단 한번도 암살을 해 본 적이 없었지만.
─ 단주. 앞으로는 절대 암살 임무같은 거 받지 마십시오.
─ 혹여라도 암살 임무가 있더라도 우리들이 할 테니까. 절대. 암살 임무는 안 됩니다.
단천은 암살 의뢰 직후에 서윤학이 했던 신신당부를 떠올렸다. 암살 임무같은 귀찮기만 한 일을 대신해준다는 이유 때문에 이유에 대해서는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중요한 건 그가 암살을 해 본 적이 있다는 점. 그리고 암살에는 자신감이 있다는 점이었다.
“암살. 해 본 적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일단 탑 안으로 진입하는 것부터 합시다.”
성혼탑의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것은 빅 랫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쥐 인간들이었다.
“간단하게 브리핑부터 하겠습니다. 작은 물건으로 놈들의 주의를 분산시킨 뒤 옆에 있는 쥐구멍으로 들어가면···.”
“브리핑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암살에는 자신이 있으니까요.”
“자신이 있으시다니 믿겠습니다.”
풀창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움직이겠습니다.”
저벅저벅.
풀창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천은 당당하게 성혼탑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 ?
> 뭐함?
원래라면 정문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막았겠지만 브라딘도, 풀창고도 뭐라 제지하지를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은 자신이 예상하는 범위 밖의 일을 마주하면 순간적으로 얼어붙기 마련이니까.
“천마님? 정문으로 왜? 가시는 겁니까?”
단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걱!
찌익!
그저 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두 마리의 빅 랫들의 목을 잘라내고.
쾅!
집 주인이라도 되는 양 당당하게. 탑의 정문을 발로 차 열어젖혔을 뿐.
“이런 미친.”
상황을 파악한 풀창고가 다급하게 단천에게 달려갔다.
“천마님? 암살 할 줄 아신다고 했잖아요!”
“암살 잘 합니다. 방금도 좋은 암살이지 않습니까.”
“정문으로 들어와서 경비병 죽이는게 무슨 암살입니까?”
“목격자가 없잖습니까.”
“···?”
다시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눈을 굴리던 풀창고가 단천에게 물었다.
“암살이 뭔지는 아십니까?”
“암살은 목격자가 없이 목표를 죽이는 겁니다.”
“그···렇죠?”
“그렇다는 건. 목격자까지 싸그리 다 죽여버리면 완벽한 암살이 된다는 겁니다.”
“······.”
> 미쳤다
> 설득력이···
> 있어!!!!
설득력이 있기는 개뿔이. 풀창고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암살 퀘스트는 처치해서는 안 되는 경비 역할의 몹들이 있다. 이 경비들을 처치하면 그 순간 전 병력이 플레이어가 있는 쪽으로 모여든다.
찍! 찍!
찍! 찌이이익! 찍!
바로 지금처럼.
수없이 많은 빅 랫들이 주변을 둘러쌌다. 압도적인 숫자에 질릴 만도 하건만 BJ천마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담담했다. 예전에 이런 일을 겪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혹시 예전에 하셨던 암살 퀘스트도 이런 식으로 하셨습니까?”
“맞습니다.”
“그렇군요.”
풀창고는 반쯤 체념하며 대답했다.
> 포기해
> 포기하면 편해
> 이미 체념하고 보고 있는 1人
“역시 제 주군이십니다.”
“알아주니 다행이군.”
포기하라고 부채질하는 채팅창의 분위기. 거기에 옆에서 한 마디 거드는 브라딘까지.
‘에라 모르겠다.’
풀창고도 그냥 이 상황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누가 그랬던가. 약간 미치면 세상이 즐겁다고.
“흐하하! 그래요! 한 번 하는 게임! 즐겁게 합시다! 카르페-디에엠!”
풀창고의 호탕한 웃음과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다.
‘어떻게 처리해볼까.’
단천은 물밀듯이 들이쳐오는 쥐떼들의 공격을 피해내며 생각에 잠겼다.
리드미컬 세이버는 날아오는 노트들을 그저 따라 움직이는 게임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다키스트 에이지는 체력의 안배를 하느라 최대한 효율적인 검격만을 사용해 왔다.
제대로 된 검식劍式을 사용해 볼 만한 상황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패링’을 통해 스테미너를 지속적으로 받아낼 수 있는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몸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검식의 형태는 재현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검식을 써 보느냐 하는 것.
단천은 얼마 전에 봤던 촉수의 움직임. 매화검법을 떠올렸다.
다수의 적을 상대하고 있을 때. 공격과 수비를 유연하게 바꾸어야 할 때에 가장 효율적인 검법.
매화이십사수.
딱 지금 상황에 적절한 검술이다. 이십사수매화검에 생각이 닿자마자 단천의 검이 움직였다.
파라락!
부러진 직검이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검끝이 하나의 곡선을 만들어내고 닫혔다.
푸화악!
한 번의 곡선이 열리고 닫히자, 한 마리의 빅 랫이 바닥으로 쓰러져내렸다.
찌직!
동료를 잃은 빅 랫이 단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공방일체의 검은 놀리기라도 하듯이 달려든 빅 랫의 공격을 막아내고 몸을 갈라버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유한한 검식에서 만들어지는 무한한 검초가 주변을 수놓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박!
무수히 많은 검초가 끝나고 나자 남은 것은 무수한 육편뿐.
찍! 찌지직!
얼마 남지 않은 빅 랫들이 도망을 가 보려고 했지만 단천의 검은 사냥감을 놓치지 않았다.
파삭!
마지막 남은 빅 랫을 처치한 단천이 그제서야 한숨을 돌렸다. 스테미너를 이래저래 보충을 해 보려고 했지만 내공 없이 초식을 펼치려니 아무래도 무리가 많이 갔다.
실제로 몸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팔다리가 욱신거리는 느낌이다.
‘뭐. 그래도 빅 랫들은 다 처치했으니 상관없지만.’
원래의 목표는 달성했다. 거기에 부차적인 목표도 추가적으로 달성했다.
추가적인 목표는 물론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것.
> 방금 뭐임?
> 방금 칼 휘두르는 거 영상 클립 딴 사람?
> 지리느라 클립 못땄음;;
예상대로 채팅창에서도 연이어 감탄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화산파의 매화검법은 그 형태가 아름다워 연회장에서 검무로도 자주 사용되는 검법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방금의 검무를 본 시청자들은 단천의 영상을 다시 돌려보고, 주변에 이야기를 하고, 영상을 퍼트리고, 단천의 방송을 계속해서 찾아올 것이다.
시청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빌드업으로 매화검법을 쓴다는 것을 매화검주가 듣는다면 칼을 들고 쫓아올 테지만. 이곳은 시대도 아니고 차원이 다른 곳.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뭐, 쫓아올 수 있으면 해 보라지.’
단천은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며 검을 허리에 꽂아넣었다. 시청자들의 눈을 끌어모았으니 마무리만 제대로 하면 된다.
제대로 된 마무리라는 것은.
“자. 앞으로 나아가죠.”
별 것 아닌 듯이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것. 호들갑을 떨지 않을수록 슈퍼 플레이의 격은 올라간다! 멋진 플레이를 했다면 최대한 덤덤하게 있는 게 시청자 수에 좋다!
'─라고. 「컴맹부터 시작하는 스트리밍」에서 그랬지.'
단천은 컴맹부터 시작하는 스트리밍에서 나온 단어들을 기억하며 최대한 담담하게 주변을 정리했다.
> 진짜 지려버렸다;
> 이게 사람이냐?
> 사람 아니고 천마님인데요?
> 연차내고 방송보길 잘했어 ㅠㅠㅠㅠㅠㅠ
역시나.
단천의 무덤덤한 반응에 채팅창은 폭주라도 한 것처럼 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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