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키스트 에이지 (3)
브라딘은 「다키스트 에이지」에서 플레이어의 조력자이자 네크로맨서인 캐릭터다. 플레이어의 캐릭터가 죽을 때마다 소혼술로 주인공을 되살리는 역할을 하는 NPC.
물론 원래대로라면 그래야 했다는 말이다.
브라딘은 섀도우 비스트의 시체를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있었다.
“섀도우 비스트를 혼자서 처치한 건가? 자네 정말 인간인가?”
“그래.”
> 혼자 처치한 건 맞는데 인간이 맞는진 모르겠네요
> 그냥 피하다가 칼 가져다 대니까 죽던데요?
브라딘은 섀도우 비스트의 시체를 루팅하기 시작했다. 뼈를 발라내고, 안에서 시체에서 쓸만한 물건을 얻어내는 브라딘의 손은 꽤 익숙해 보였다.
“···말도 안 되는 검으로 몸을 베어냈군. 검에 힘을 거의 쓰지 않은 채로 말이야. 섀도우 비스트의 힘을 그대로 역이용한 것처럼···.”
아이템 루팅이 다 끝나고 나자 브라딘은 재차 입을 열었다.
“자네. 나와 함께 일하지 않겠나?”
“내 무엇을 보고?”
“실력. 이런 검격을 낼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만으로도 믿을 가치는 충분하다.”
> ?
> 브라딘이 동료 되자고 하는 거임?
> 브라딘이랑 주인공이랑 주종관계 아니었냐?
브라딘은 의심이 많은 캐릭터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고, 타인을 절대 믿지 않는 캐릭터.
브라딘과 플레이어의 캐릭터가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관계일 수 있는 것은 브라딘이 플레이어를 부활시켰고, 언제든지 흙으로 되돌릴 수 있는 관계였기 때문이지 플레이어를 믿어서가 아니었다.
그런 브라딘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동료가 되자고 말하고 있었다.
오로지 한 번의 검격만을 보고.
[Quest]
[브라딘의 제의]
[브라딘은 당신이 동료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ㄱㄱㄱㄱㄱㄱ
> 당장 된다고 해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의 반응. 하지만 단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다.”
“왜지?”
“내 동료가 되기 위해서는 자격을 증명해야만 하니까.”
굳이 천마신교가 아니더라도 단천은 자신의 주변에 믿을 만한 인간만을 뒀었다.
자신을 증명하지 않은 인간이 들어오는 것은 사양이었다.
단천의 말에 브라딘이 웃음을 터트렸다.
“흐하하하! 내가 거절당할 줄이야! 이건 생각조차 못 한 일인데. 흐하하하!”
한참을 웃음을 터트리던 브라딘은 일순간에 뚝 웃음을 거뒀다.
“더욱 마음에 드는군. 동료가 싫다면···. 동업자는 어떤가?”
“동업자라. 그 정도라면 괜찮겠지. 다만 조건이 있다.”
“조건?”
“시체의 루팅은 네가 도맡아라.”
“그 정도라면 아무 것도 아닌 조건이로군. 좋다.”
라단의 표정은 이전보다 한층 더 풀어져 있었다. 동료가 되라고 했을 때보다도 한층 더 단천을 신뢰하는 모습.
> 호감도 엄청 빨리 쌓네
> 하긴 처음 보는 인간이 동료가 되라는데 덜컥 되는 인간도 못 믿을만한 인간인 건 매한가지지
“그럼. 어디 갈 데는 있나? 이 주변에 내가 거점으로 잡고 있는 마을이 있으니 그쪽으로 가도록 하지.”
브라딘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단천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 이거 원래 스토리랑 다르지 않음?
> 그러네. 원래면 죽고 일어나자마자 여기저기 사냥하러 다니는데
> 피레네 마을로 가는 루트는 처음 보는데?
채팅창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도 그럴 것이 다키스트 에이지는 스토리가 고정되어 있는 RPG였기 때문이다.
그런 고정되어 있는 스토리가 변화하고 있으니, 반응이 뜨거울만도 했다.
> 이거. 처음 섀도우 비스트 처치하면서 히든 스토리 열린 거 아님?
> 아마 그런듯
> 이 루트 관련된 영상 나온 거 있냐?
> 전혀 없음 ㄷㄷㄷ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단천은 부러진 직검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왜 다음 몬스터 사냥이 바로 시작 안 되는 거지.”
> 지금 몬스터 사냥이 왜 나와
> 사냥은 나중에 언제든지 해도 되잖아
> 아니 세계 최초 스토리 분기점을 찾은 거라니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 천마님이라더니 컨셉 한번 씨게 잡았네 ㅋㅋㅋ
***
단천의 고민은 금방 해결되었다. 브라딘을 따라 걸어가면서 몇 마리의 구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플레이어가 반드시 죽도록 만들어졌던 섀도우 비스트를 처치한 단천이다. 구울 따위가 상대가 될 리가 없다.
크르르륵!
서걱!
달려드는 구울이 한 번의 검격으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바닥에 구울이 쓰러지자마자 브라딘이 구울의 몸을 루팅했다.
> 나는 저거 구울 한 마리 잡는 데 4트 했었는데
> 나는 10트정도 함
> 난 저기서 게임 접었음···.
> 내 손아 넌 잘못한 거 없어 저런 끔찍한 거 보지마
[방금시작새싹님 1,000원 후원!]
[천마님 플레이 보고 다키스트 에이지 샀어요! 구울 잡는 거 어려운데 팁 없나요?]
“달려드는 공격에 맞춰서 급소를 찌르면 제압할 수 있다. 처음 한다면 정중선의 급소들을 노리는 게 제일 쉽지.”
크르르륵!
서걱!
“이렇게.”
> 보통은 그게 안 된다고
> 잘 찌르면 구울은 쉽게 죽는다··· 메모···
> 도움도 안 되는 말 메모하지 마라고 ㅋㅋㅋ
[방금시작새싹님 1,000원 후원!]
[게임 환불했습니다. 그냥 플레이하시는거 구경만 할게요]
> 새싹이··· 죽었어···!
> 당신이 죽였어!!
> 이 살인마!!!
‘이게 어렵나?’
단천은 잠시 자신의 동작을 떠올렸다. 섀도우 비스트를 처치하는 것이라면 꽤 난이도가 있었겠지만 구울을 처치하는 것은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아 보였다.
구울을 처리하는 것 정도라면 당장 천마신교에 갓 입교한 아이들도 해 낼 수 있을 난이도다.
‘···입교한 아이들과 21세기의 사람들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는 하지만.’
천마신교에 입교한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무공을 사사받는다. 천마신교의 가르침은 절대 가볍지 않다.
언제나 전 중원을 상대로 하는 것이 바로 천마신교이기에. 그 무학의 방대함과 깊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다. 천마신교에서 기초적인 토납법만 배워도 반사신경과 운동신경은 빠르게 향상된다.
단천도 처음 무림에 떨어졌을 때 이 과정을 거쳤었다. 갓 돌이 지난 날부터 열두 살이 되기 전까지 있었던 혈귀단血鬼團이 바로 그것이었다.
간단한 무공 수업이 끝나면 햇빛이 겨우 들어오는 암굴에서 쉴 새 없이 시강시들과 싸워야 했던 시간들.
‘···추억이군.’
혈귀단에서 한 달, 아니, 1주일만 지내도 눈 앞에 있는 구울을 처리하는 것은 식은 죽을 먹는 것보다 간단해질 텐데.
물론 구울 하나 쉽게 잡겠다고 혈귀단에서 지내겠다며 자진해서 나설 사람은 없을 테지만.
서걱!
“이번에도 일격이로군.”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했었거든.”
“하긴.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강할 수밖에 없지.”
브라딘이 ‘이 세계’ 라고 말하는 것은 다키스트 에이지의 세계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길 주변에서 몇 번 보였던 아무렇지도 않게 나뒹굴고 있는 시체들. 시체를 뜯어먹는 구울과 하늘에서 이따금 날아다니는 기괴하게 생긴 괴수들까지.
“글자 그대로 최악의 세계지.”
“그런가.”
단천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혈귀단에서 지냈던 몇 년간에 비하면 이정도를 지옥도라고 부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구태여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한 자를 아군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어.”
“그 강한 자가 나라는 거군. 탁월한 선택이야.”
> 패기 하나는 ㅇㅈ
> 맞는 말 ㅇㅈ
> 리드미컬 세이버 올퍼펙트면 최강자가 맞다
“피레네 마을은 사실 강자들이 사는 곳이라기는 힘든 곳이라네. 누구도 함께 하고 싶어하지 않는··· 꼬마들과 노인들이 있는 곳이지.”
“자신이 한 말과는 상반되는 곳에 머무르는군.”
“그렇지. 그들은 내가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일세. 내가 버는 돈의 대부분은 피레네의 주민들을 돕는 데 쓰이지.”
“그렇군.”
“내가 이상한가?”
“그다지.”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은 질릴 만큼 봐 왔다. 거기에 한 명을 더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는 것이다. 다만 위선을 말하면서 악을 행하는 사람보다는 지금의 브라딘이 더 나았다.
> 이런 스토리가 있었나
> 그냥 냉혈한인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착한 면이 있었네
브라딘은 원래 괴물들을 계속해서 사냥하는 것만을 바라는 특이한 캐릭터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가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주 조그마한 힌트들 몇 가지만이 있을 뿐.
그런 브라딘이 지금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근데 좀 이상한데
> 뭐가
> 피레네 지역에 원래 사람이 있었던가?
> ···?!
“이제 거의 다 와 가는군. 저 언덕만 넘으면 피레네일세.”
단천은 대답하는 대신 눈살을 찌푸렸다. 익숙하기 그지없는 냄새가 코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피 냄새다. 희미하기 그지없는 냄새이기는 했으나 질릴 정도로 맡아온 피 냄새는 아주 희미한 피 냄새마저도 잡아낼 수 있었다.
직검을 꺼내든 단천은 앞을 향해 달려나갔다.
“어이. 갑자기 왜···!”
아아악!
그 순간 들려온 희미한 비명 소리에 브라딘도 단천을 따라 달려나왔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것은 괴물들이 마을을 유린하는 모양새였다.
괴물들의 수는 어림잡아도 백이 넘어갔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마을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크기의 흉물체.
괴물들에게 죽은 사람들이 흉물체의 입에 계속해서 들어가고 있었다. 흉물체의 입에 들어갔다 나온 자들은 구울로 변모해 있었다.
그르륵!
“종언의 시종···.”
종언의 시종은 게임 종반부에 넘어갈 때에 상대하게 되는 보스급 몬스터였다. 최후반부의 몬스터만큼은 아니었지만 충분한 파밍을 한 뒤에야 도전을 시도라도 할 수 있는 흉악한 몬스터다.
> ㅁㅊ
> 중간 보스가 게임 시작하자마자 나온다고?
> 이래서 피레네 지역에 사람이 없는 거였네
채팅창은 종언의 시종이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나타났다는 것에 놀라는 사람이 절반, 피레네 지역의 스토리를 이제 알게 됐다는 것에 놀라는 사람이 절반이었다.
피레네 지역은 스토리 중반부에 마주치게 되는 수없이 많은 괴물들이 있는 지역인 동시에 기묘할 정도로 약한 몬스터들이 있는 파밍 지역이었다.
배경 지식을 거의 가르쳐주지 않는 다키스트 에이지 특성상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서야 전후관계가 확정된 상황.
> 근데 이제 뭐 어쩌냐?
> 그러게;; 몬스터가 너무 많은데
> 암만 그래도 지금 스텟으로 저렇게 많은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나?
마을을 내려다보는 브라딘의 눈은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단천은 브라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거지?”
“몬스터의 수가 너무 많다. 우리 둘이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저렇게 많은 수의 몬스터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중대 이상의 규모의 인원이 필요하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종언의 시종이다. 놈만 없었어도 싸워 보겠다는 생각이라도 해 봤을 텐데. 놈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온갖 물건들이 다 필요하다.
부러진 직검 하나를 들고 있는 인간과 역병의사 한 명이 무언가를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러니. 놈들에게 들키지 않은 자신들은 여기서 도망쳐서 살아남는 것이 최선이다.
모두가 죽는 것보다는 한 명이라도 살아남는 것이 나으니까.
“이곳을 떠나 도망치자.”
“냉정한 판단이로군.”
“···목숨은 하나뿐이니까.”
브라딘의 눈에는 피가 고여 있었다. 단천은 부러진 직검을 툭툭 걷어차 직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맞다. 목숨은 하나뿐이지.”
“······.”
“그러니까. 제대로 목숨을 걸 때에 걸지 않으면 후회하게 된다.”
말을 마친 단천은 언덕을 내려가. 마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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