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3)

약간은 슬퍼 보이는 사파이어 눈동자가 폐부를 찔러오는 것 같아 류는 눈을 감고 이안을 차단했다. 

귓가에 끊임없이 속삭여지는 목소리와 함께 몸이 뒤로 돌려 졌다. 짐승 같은 자세로 엎드린 채 다리가 벌려지고 이윽고 몸이 열렸다. 

거대한 이물감에 몸서리 치며 온몸으로 그를 밀어 내려고 해도 저주스러운 그것은 꾸역꾸역 류의 몸을 파고 들어왔다. 

마치 뜨겁게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삼켜져 온 몸이 타 들어 가는 것 같았다.

“으읏.”

어깨의 단도가 뽑히며 엄청난 피가 몸 안에서 쏟아져 나오자 류는 지독한 현기증과 함께 몽롱한 쾌감을 느꼈다. 

머리로는 거부하려고 해도 유두가 손가락으로 인해 희롱되고 페니스가 자극되는 동안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이 움찔거려며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류의 매끈한 등에 입 맞추면서 이안은 그의 발목을 잡아끌며 더욱 깊숙이 자신을 박아 넣었다. 

“...!...”

발 끝에서부터 찌르르 타고 올라오는 괘감에 몸을 뒤트는 순간 류의 벌어진 입 사이로 붉은 알약하나가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내 뱉으려고 하자 억지로 라도 삼키게 하려는 듯 집요한 혀가 탐욕스럽게 입안을 헤집었다. 

그리고 그 뒤부터 류의 의식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상처의 고통과 피를 말려버릴 것 같은 죄책감과 가슴이 무너질 것 같은 슬픔이 한 덩어리로 엉켜서 아우성을 칠 때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만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눈을 감아 외면하려고 해도 끝없이 파고드는 몸 안의 존재와 죽을 것 같은 쾌락만이 

그의 정신과 육체를 좀 먹어가서 부정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이 그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하얀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리는 기억의 파편들.

밝은 금발과 순수한 에메랄드의 빛. 따스한 온기. 맑은 웃음소리.

피비린내와 살타는 냄새가 가득했던 전장.

그 속에서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버티고 있던 나.

피투성이가 되어 있던 누나와....샨.

눈을 멀게 하고 구토를 일으키게 하는 붉디붉은 빛.

마지막으로 차갑고 아름다운 사파이어가 의식을 완전히 잠식했을 때 모든 것이 백지처럼 지워 지면서 하얀 잔상만이 류의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 지 모른다.

때때로 깨어났던 것 같지만 여전히 자신을 꿰뚫고 뒤흔드는 쾌감에 몽롱해져 스스로도 의식을 지웠다. 

그런 과정이 끝없이 반복되는 순간 류는 자신의 몸이 점점 이상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침입해 들어오는 거대한 이물감에 반사적으로 아래를 조이며 따뜻한 체온을 끌어안는 순간 떨어져 나가는 작은 기억 하나. 

그리고 몸 안으로 흡수 되는 뜨거운 체액에 또다시 하나. 그렇게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간 기억들이 완전한 조각을 이루었을 때 류는 완전하게 의식을 잃었다.

‘.....널 영원히 매어 둘 거다.’

얼마 의 시간 후 백지가 된 류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그 한 문장 뿐이었다. 

이상한 느낌을 가진 목소리였다. 

안타까우면서도 절절했지만 그 한편에는 씁쓸한 한숨이 묻혀 있었다. 

누굴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정한 것 같으면서도 차가운 느낌. 

버석거리는 건조함 속에 부드러움이 녹아 있는 푸른 사파이어. 

아니....좀 더 초록빛 계열의 기분 좋은 느낌일지도.

몸을 일으키자 검은 군복이 어깨에서 흘러 내렸다. 어깨에 붕대가 감긴 것을 보니 전투에서 부상이라도 입었나. 뿌옇게 흐려진 기억이 유쾌하지 않다. 

다리 사이에 흥건히 묻여 있는 피와 정액을 보며 살짝 얼굴을 찌푸리던 류는 살짝 부풀기 시작한 자신의 배를 멍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가디언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긍지와 명예 그리고 생존이다. 

그 어떤 것에도 꺾이지 않는 고고한 정신, 강한 마음을 필요로 하지만 자신은 그와 정 반대의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의문을 품고 방황하고 힘들어하고 망설이는 약하디 약한 인간. 

그래서 어쩌면 지금의 이 모습이 자신에게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위화감이 느껴져서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지만....

언제나 비쉬였던 자신이 어느새 라쉬로 변해 버린 것인지에 대해 류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 허리띠에 꽂아 뒀던 칼날을 자신의 배 위에 세웠다. 

무엇에 대한 충격 때문인지 단편적인 것 외에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매우 슬프고 허망했었던 것 느낌만이 남아 있다. 

푸르게 날이 서 있는 칼날을 지그시 누르자 피부가 베어 지면서 새빨간 피가 배어 나왔다. 

“.........”

칼을 쥔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혀끝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끝없이 맴돈다. 

“.........”

하지만 불러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몇 번이나 혀를 축이면서 그 끝에 맴도는 말을 입 안으로 삼켜냈다. 고개를 흔들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부정했다. 

안개가 낀 것처럼...뿌연 의식이 자꾸만 무언가를 기억해 내라고 재촉하지만 본능이 그것을 거부한다. 

칼날을 쥔 손이 심하게 떨려 그 아래의 피부가 더욱 깊이 베어지는 순간 후각신경을 자극하는 혈향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우욱.”

목 바로 아래까지 올라온 덩어리가 뜨거워져 가슴부근을 지글거리며 태운다.

“우욱.”

머리가 아프다. 왜 이런 곳에 있는 지 어째서 이런 꼴인 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해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혀끝에 맴도는 이름 하나처럼 가슴을 콕콕 찌르면서도 입을 열어 내뱉지 않는다. 

심한 구역질에 가슴을 쥐어 뜯으며 텁텁한 동굴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겹게 일어선 뒤 비틀거리며 동굴 입구 쪽으로 걸었다. 

환하게 햇살이 비치는 밖으로 나가면 이 꽉 막힌 숨통이 트여서 편하게 호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후들후들 떨리는 무거운 다리를 끌고 겨우 입구까지 걸어 나가자 지나지게 밝은 빛에 눈이 아파왔다. 

반사적으로 한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빛에 익숙해지기 위해 그렇게 잠시 서 있자 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정말 오래도 자는 군.”

낯익은 목소리. 

같은 팀이었었나. 

같은 팀이라고 해도 전혀 기억에 없다. 그저 나는 전쟁을 혐오하는 가디언이고...

언제나처럼 전투에 담겨진 의미도 알지 못한 채 참전해서 어떤 이유로 이곳에 있다는 것 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눈을 가린 손바닥을 치우자 시원한 초록색의 수목과 햇빛을 반사하는 맑은 강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우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 지 촉촉하게 젖어 있는 싱그러운 초록빛을 배경으로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에....정갈한 느낌이 드는 이목구비의....아름다운 인간.

“........”

눈을 살짝 찡그리면서 자세히 관찰하려 하자 그가 갑자기 너털 웃음을 터뜨리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그렇게 내게 다가오는 동안 나는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고 신경을 곤두세워 그의 기척 하나하나를 분석했다. 

분명 적대적인 느낌은 아니다. 군인답지 않은 여유로운 호감까지 느껴지는 그 유연한 분위기에 한 발자국 물러서며 경계하자 그는 싱긋 웃어 보였다. 

짙은 회색으로 보였던 그의 눈동자가 실은 푸른 색이었다는 걸 눈치 채는 순간 심장이 겉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몸의 흥분. 

“네가....내..상대인가?”

“......글쎄.”

애매하게 넘기는 웃음. 대답해 줄 마음이 없는 건가.

“....같은 팀..이었나?”

“.......”

“....무슨 이유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마치...의식이 군데 군데 잘려 버린 것 같이....하지만 너는....알고 있었던 것 같군. 

왜 여기 있는 지 모르겠지만...머리가 아파서...더 이상은 기억해 내기 힘들어. 토할 것 같아.”

“........”

그는 매우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뭔가 팽팽하게 날이 서 있는 것 같았다. 흡사 긴장하고 있는 것 같은....그런 느낌. 

“....어떻게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거지? 전투는? 다른 동료들은 어떻게 되었어?”

“.....류....”

“.......응.”

확실히 내 이름은 류 였다. 류 아리마사. 

분명히 익숙한 이름인데 음미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그 뉘앙스가 지나치게 자극적이어서 마치 어느 여자의 이름처럼 느껴졌다. 

“기억나지 않아? 그 무엇도?”

“그런 건 아니지만....”

구체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눈에 잠깐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진실인지 허상인지 알 수가 없어. 마치...꿈에 취해 있는 것처럼...현실이지만 현실 같지 않아. 

입고 있는 옷도...팔도...다리도...내 이름도 모두 익숙한데 무언가 허공에 붕 떠 있는 느낌이야.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럼 그대로 나둬.”

“.......”

“....스스로가 기억해 낼 수 있을 때까지....”

“....하지만....”

“네가 기억하든...기억하지 않든 진실은 변하지 않아..늘 그 자리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서두를 필요 없어.”

“.........”

“누군가에게 쉽게 얻은 진실은 때로 너 자신을 짓뭉개 버릴 지도 모르니까. 스스로가 그 무게를 감당할 만한 준비가 되었을 때 인식하고 받아들여.”

마치 암시에 걸리는 것 같은 묘한 분위기가 생각하려는 힘을 빼앗아 간다.

“.....그럼 네 이름은?”

“......”

순식간에 커지는 검은 홍채와 살짝 찌푸려지는 미간은 기분이 나쁘다기 보다 곤란하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었다. 

“.....이름을 모르면 널 부르기 곤란하니까...”

“......”

입술을 달싹거리다 결국 아무말 없이 돌아서려는 그의 팔을 잡아 채면서 재차 묻자 잠시동안 사파이어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눈꼬리가 미미하게 떨고 있다고 느낀 건 아직 빛에 익숙하지 못한 내 눈의 착시 현상일까. 

“네가...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

“......기억할 수 있다면...”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 마음대로 불러도 된다는 말인가?”

“그래.”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그는 약간은 감정에 들뜬 표정으로 나를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의 이름을 부르려는 내 입술을 바라봤다. 

그런 그의 표정에 약간 긴장이 되었다. 뭔가 굉장히 기대 받고 있는 느낌. 나 자신은 이런 창조적인 일에는 그다지 익숙한 인간이 아니었던 지라 더욱 그랬다. 

한참을 망설이다 어쩔 수 없이 아까까지 혀 끝 에서 맴돌던 이름을 내뱉기로 했다. 

그것은 까끌까끌하지만 매우 부드러운 기분 좋은 느낌.

“.......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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