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3)

“많이 기다렸어?”

“아니.”

“........”

안색이 파리한 샨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어보였지만 그 미소아래는 불안과 초조가 숨어 있었다. 혹시 내가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한 걸까. 

안심시켜 주려고 잡아온 토끼를 한 구석에 던져 두고 약간은 뻣뻣한 머리카락을 한손으로 쓰다듬어 주자 샨은 고개를 내 가슴에 파묻으며 허리를 세게 끌어안는다. 

....귀엽다.

미미하게 떨면서 내게 매달린 있는 샨을 어떻게 달래줄까 고민하고 있는데 무언가에 밟힌 듯 가지런했던 풀들이 이러저리 누워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흔적으로 보아 분명 성인 남자의...그것도 무술에 상당히 단련된 남자의 발자국임에 틀림없었다. 

시선을 내려 슬쩍 샨을 살펴보자 확실히 복장이 흐트러져 있다. 게다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피 냄새. 아까와는 다른 위화감이 느껴졌다. 

“누군가....왔었어?”

“아니.”

즉시 돌아오는 대답.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가. 

살아남은 비쉬들이 샨을 발견한 거라면 녀석은 이렇게 멀쩡할 수 없다. 숲에서 발견했을 때 처럼 처절하게 능욕당하거나 죽임을 당했을 거다. 

하지만 샨은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기는 해도 상처 입은 곳 하나 없다. 가만히 녀석의 눈을 응시하자 맑은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서서히 일그러지더니 시선을 피한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건가. 

내게 무언가를 감추려는 모습에 서운함을 느끼며 잡아 온 토끼를 다듬었다. 

내가 믿음 직하지 못한 걸까....역시 인간은 비밀을 공유함으로써 좀 더 가깝게 느껴질 수 있는 존재 인 것 같다. 

내가 가진 비밀을 샨에게 이야기 하면 샨도 내게 지금의 거짓말에 감춘 진실을 말해줄까?

능숙하게 껍질을 벗기고 내장을 빼내면서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샨의 시선이 느껴졌다. 

“류. 너는 왜 내 곁에 있는 거야?”

“.....동료니까.”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궁색하기 그지없는 낯 뜨거운 변명이었다. 

“....나도 비쉬였으면 좋았을 텐데....그럼 적어도 이런 꼴로 네게 기대 있지는 않을 거잖아....”

샨은 자신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자책하지만 오히려 나는 조금 기뻤다. 

“쓸데 없는 말 하지마. 라쉬가 없으면 비쉬도 없어. 넌 단지 부상자 일 뿐이야. 그런 구분은 상관 없어.”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늘 멀리 있는 느낌이었다. 나를 바라보되 결코 다가서지 않는 녀석이 안타까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먼저 다가갈 용기는 없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은 정말 겁쟁이 였기에 가까워 지는 간격보다 멀어지는 간격을 더 크게 느끼며 두려워했다.

“페어라서 그런 말 해줄 필요 없는데....나는 내 역할을 잘 아니까 말이야.”

그런 게 아니야.

난 너를 페어로만 생각하지 않았는 걸.

“.......넌 필요한 사람이야.”

넌 내게 정말로 필요한 사람이야. 

“.......”

말재주가 없어서 잘 설명할 수 없지만 너는 그래.

보고 있는 것만으로 많은 위안이 되고 마음이 편해지는 온기가 있는 사람.

마치 그 기분 좋고 따뜻한 그 느낌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어.

“.......”

“나는 누군가를 죽이는 전투를 하지만 너는 누군가를 살리는 전투를 해. 그 차이를 모르겠어? 

난 네가 필요하기 때문에 곁에 있는 거지 페어의 의무감 때문에 곁에 있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 안했으면 좋겠다. 부상으로 인해 불안 한 건 알겠지만 우리는 결국 이 숲을 무사히 빠져 나갈 거니까.”

말을 길게 한 탓에 목소리가 빡빡하게 굳어져 있다. 하긴 그게 아니라도 샨의 앞에선 언제나 긴장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굳어 버린다. 

손질한 토끼를 장작불에 구으면서 어줍지 않은 내 말에 대한 샨의 반응을 세심하게 살폈다. 

녀석의 다리 부상역시 심각하지만 더욱 심각한 건 수태로 인한 쇼크 인 것 같다. 

남성의 수태는 여성의 임신과는 달리 강압적인 관계에 의해 이루어 지고 신체적인 차이로 인해 여성의 배는 더 고통스럽다. 

4개월 만에 출산이 이루어지고 배가 부푸는 것 말고는 신체적인 변화가 거의 없지만 

수태가 되는 순간 자신을 범한 남성에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완벽히 속박 당하게 된다. 

수컷의 본능으로 자신의 수태 대상을 알 수 있는 비쉬들은 라쉬가 엄청난 출산의 고통을 이겨낸 후 살아 있다면 반드시 찾아내서 자신의 노리개로 삼았다. 

샨 같은 경우에는 한 명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서 여러 명에 의해 공유된다는 게 다른 점이지만. 

나는 샨이 그런 꼴을 당하기 전에 상대가 된 녀석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생각이다. 

아아.....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때때로 소름끼친다.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에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후 샨에게 한 조각 내밀자 한 입 베어문 후 오물거리며 씹는다. 

기름으로 반질거리는 연한 핑크색의 입술이 매혹적이다. 혀를 낼름거리면서 토끼 고기를 먹고 있는 샨을 보자니 아랫도리가 뜨거워져 오는 게 느껴졌다. 

전투에 참가한 이후 제대로 욕구를 풀어준 적이 없어서 일지도 모르지만 자신도 결국 다른 비쉬들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에 자조하며 씁쓸히 고개를 돌렸다.

“류는 안 먹어?”

“.....먹어.”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는 맛있었지만 위는 받아 들이지 않는다. 엉망진창으로 당해서 쓰러져 있던 그를 발견한 순간의 통증이 되새겨 지면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자신 역시 비정한 정부에 의한 희생양이지만 라쉬들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용당할 수 있을 만큼 다 이용당한 후 버려지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라쉬들 만큼 능욕 당하지는 않는다. 

국가를 위한 다는 명목 하에 가디언을 만들고. 시하임까지 만들어 내는 간악한 인간들에 치를 떨면서도 그 아래에 예속되어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게 분노한다. 

“류.”

“.....응.”

“라쉬들 사이에 도는 소문 같은 것들....류는 잘 모르지?”

뜬금없는 샨의 말에 돌아보자 샨은 싱긋 웃음 지으며 나를 쳐다 보고 있었다.

“네가 라쉬들 사이에서 어떻게 불리는 지도 모를거야. 그치?”

“.......그래, 몰라.”

“....하하. 너 다워. 세심한 편이지만 정작 주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니까.”

어떤 소문일까.

어두워서 기분이 나쁘다거나, 지나치게 말이 없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으면 한다. 

사실이긴 하지만 샨에게 자신이 그런 이미지로 새겨지는 것은 참을 수 없이 싫으니까. 

불안한 내 마음을 전혀 눈치 못채는 샨은 초록색 눈동자에 반짝거리는 생기를 띠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 너랑 페어를 짜게 되었을 때 다른 라쉬 녀석들이 얼마나 날 부러워 했었는 지 아냐? 

다른 비쉬들과는 달리 너는 굉장히 신사적이었으니까 우리 사이에선 정말 특별했었어....

네가 검은 군복을 입고 복도를 지나갈 때면 모두들 훈련하다가도 널 쳐다보느라 정신 없었지. 네가 이안처럼 고위 귀족의 후손이 아닐까 멋대로 상상하고 그랬었어.”

“.....그럴 리가 없잖아.”

“하하. 그래도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였어. 너랑 자고 싶어 하는 라쉬들이 줄을 섰었는데 넌 정작 아무 관심도 없었지. 

그게 서운하기도 하고 멋져 보이기도 했어. 페어를 짜기 위해 널 처음 봤을 때 내가 얼마나 긴장했었는 지 넌 상상도 못할거야.”

“.......”

나도 심장이 떨려서 죽어버리는 줄 알았다.

“그래서...네가 내 쪽에 서줬을 때 기뻤다. 지난 2년간 페어로서의 정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 해도 응. 정말 기뻤어.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분명히 난 남겨져야 하는 데 진저를 그렇게 만들면서 까지 내 편에 서준 네가 고맙고 또 미안했어. 

동료를 소중히 생각하는 너 다운 행동이었지만 난 가슴이 두근거려서 터져버리는 줄 알았어."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샨의 말을 고백으로 해석해도 괜찮은 건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매혹되어 버린 존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달콤하게 속삭인다. 

카오스의 숲이 만들어낸 환청이 아니기를 바라며 숨을 가다듬었다.

“....페어로서의 정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긴장으로 인해 혀가 매끄럽게 움직이지 않아 입안에서 튀어나온 말은 내 귀에도 지나치게 무뚝뚝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런 내말이 들리지 않은 듯 샨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나한테만 묘하게 다정하게 구는 너를 많이 좋아했어. 나를 부러워 하는 다른 라쉬들의 눈빛을 느낄 때마다 우월감에 소름이 돋았다. 

제일 가까운 곳에서 너를 바라보고 알아가면서 나만이 너를 독점하고 있다고 느꼈어. 그래서 만약에...수태를 한다면 네 상대이고 싶었다. 

아니 그러기를 바랬었어. 비록 이 꼴이 되어버렸지만......지나친 욕심이지만...그래도 상상하는 것 쯤은 괜찮잖아.”

시원한 풀의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푸르스름한 달이 나와 녀석을 비춘다.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희미한 피냄새를 맡으며 갑작스러운 샨의 고백에 내 심장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동요한다. 

정작 시선을 뺏기고 있던 사람은 나였다. 

손에 피를 묻히는 매일 매일 속에서 따뜻한 시선과 밝은 미소에 침식당해 정작 가슴앓이를 하는 쪽은 이 쪽이었다. 

가디언에게 동료애 따위 있을 리가 없다. 물러터진 나라도 군인으로서의 행동과 의무를 자각하고 있었다. 

녀석이라서...샨이라서 진저와 잭을 적으로 돌리면서 까지 감싼 것 뿐이었다. 샨이 알고 있는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남자였다. 

“그만 둬. 이제.”

샨이 한마디 라도 더 하면 나는 이성을 잃고 수태를 한 녀석을 덮쳐 버릴 지도 모른다.

“아니. 숨기고만 있었는데....이제는 말하고 싶어. 네가 날 이상한 눈으로 볼까봐 말 못하고 전전 긍긍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다 털어 버릴래. 

이렇게 까지 네가 날 생각해 준다면 말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아.”

“......”

그만 둬 줬으면 좋겠다. 

더 이상 샨이 무언가를 말하면 힘겹게 지키고 있던 내 자신이 무너질 것 같았다. 

하지만 샨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더 무모했고 또 용감했다.

“류, 나는 널 사랑해.”

혈관 속을 흐르는 온 몸의 피가 심장으로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짜릿한 전율에 호흡이 가빠져 온다. 

둘만 남은 이 공간에서 솔직하게 부딪혀 오는 녀석을 감당하기 힘들다. 무엇이 샨을 이렇게 용감하게 만들었을까. 

짝사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순식간에 나를 집어 삼키는 감정의 홍수에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맑은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한다. 

“대답해 주지 않아도 좋아. 류. 동료애든 동정이든 네가 날 아껴주는 것 만으로 만족할 수 있으니까 무리할 필요 없어. 

그냥 오랫동안 차곡차곡 쌓여 있던 감정이 터져 버렸다고 생각해줘. 계기가 뭐든 중요한 건 그것인 것 같아. 

네가 날 거절한다고 해도 멀리한다고 해도 정작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을 내 마음이니까 말이야.”

“..........”

그런 거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대답 같은 거 멋지게 할 수 있을 만큼 난 이성이 남아 있지 않은 걸.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지금 당장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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