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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의 숲에서 살아 남은 생물은 유전자 변형을 일으킨 돌연 변이로서 온순하게 보이는 작은 토끼라 해도 꽤 위험한 생물이었다.
그래서 비록 토끼라고 해도 맨손으로 잡다가는 숨겨진 날카로운 이빨에 손가락이 잘리는 일이 태반이었다.
류가 기척을 죽인 채 사냥감을 노려보다 손가락 사이에 걸려 있던 날카로운 침을 날리자 풀을 뜯어 먹고 있는 토끼가 한순간 부르르 떨더니 축 늘어진다.
가까이 다가가 토끼의 목에 꽂힌 침을 푹 찔러 넣고 단도를 꺼내 토끼의 입을 벌리자 예상대로 3cm가 넘는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난다.
생각 같아선 몇 마리 더 잡아 가고 싶지만 이미 어스름이 짙게 깔린 데다 부상을 당해 혼자 있는 샨이 걱정되어
류는 토끼를 한 손에 쥔 후 우거진 나무 사이를 재빠르게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중량감과 혈향에 류는 언젠가의 영상을 떠올렸다.
가디언의 후보로 뽑혀 자격을 인정받기 위한 테스트를 받았던 날 류는 처음으로 이안과 만났다.
온통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그의 사파이어 눈동자는 투명하고 부드러웠지만 결코 웃고 있지는 않았다고 기억한다.
어떤 의미에서건 그는 상당히 인상적인 느낌을 가진 인간이었다.
부드럽지만 건조한 느낌.
특별히 튀는 행동을 하는 건 아닌데 그 화려한 외모와 나른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상반되는 바삭거리는 눈동자,
또래의 소년보다 한 뼘이나 큰 키 등이 그를 돋보이게 했다.
같은 팀을 짰던 적은 없지만 연습장에서 여러 번 부딪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는 있되
특별히 말을 걸거나 하는 친분은 없었지만 가끔 생각지도 않게 눈이 마주쳤던 것은 기억한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지만 그 몇 번의 응시 속에 아주 뜸하게 한 두번은 이안의 눈동자가 웃고 있다는 느낌이 미약하게 들기도 했었던 것 같다.
검술. 사격술. 정신능력. 격투기. 냉정하고 날카로운 판단력.
군인이 가져야 할 모든 것을 완벽하게 소유한 그는 무수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출세가도를 달리더니 19살 때는 최연소로 장교에 임명 되었다.
그가 장교에 임명되는 날 나는 그의 부관이 되었고 우리 팀은 적을 참혹하게 전멸 시켰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길고 긴 전투가 끝난 후 모두 승리의 여운을 만끽하며 알코올에 취해 있었다.
시체가 나뒹구는 숲 한가운데서 사냥한 토끼와 들짐승을 껍질을 벗겨 구워 먹는 그들의 모습은 일상적인 것이었지만
실전인 전쟁과 살육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던 소년티를 벗지 못한 나에게는 엄청난 쇼크였다.
빨갛게 가죽을 벗긴 토끼에서 떨어지는 시뻘건 핏물을 보는 순간 속이 뒤집어 지는 느낌과 함께 구역질이 올라와서
그 자리에서 허겁지겁 빠져 나와 인적이 없는 깊은 숲으로 뛰어 들어갔다.
고기를 뜯고 있는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번들거리는 기름이 내 안의 결코 참을 수 없는 어떤 부분을 자극한 것 같았다.
“우욱....우욱...콜록.”
몸 속에 있는 더러운 독을 뽑아 내듯이 위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 냈다.
온몸에 배여 있는 역겨운 피 냄새에 가슴이 벌렁 거렸다. 언제나 사람을 벨 때 마다 가슴 한구석이 쪼그라 드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그들은 적이어야 하는데 나에게는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였다.
어째서 이런 무의미한 전투를 반복해야 하며 나는 또 얼마나 이 손에 피를 묻혀야 할까.
무자비한 전투로 희생된 누이를 위해 다시는 그런 아픈 상실을 맛보기 싫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전쟁이 싫어서,
생명을 지키고 싶어서 가디언이 되었는 데 어느새 나는 허울 좋은 대위명분 하에 살육을 저지르고 있었다.
더 이상 무엇이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인 지 알 수 없었다. 내 손에 묻어 있는 혈향이 나날이 나라는 존재를 파먹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 참 동안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비워 내고 있을 때 미묘하게 틀려진 공기의 느낌에 뒤돌아보자 나무에 기대어 나를 쳐다보고 있는 이안의 눈과 마주쳤다.
언제부터 그 곳에 있었는 지 모르겠지만 투명한 푸른 눈동자에 응시당하는 동안 이상하게도 토기가 서서히 가라앉아 가는 것이 느껴졌다.
장교로서의 첫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고 화려한 연회의 주인공이 되어 있어야 할 그가
어째서 인적이 드문 그 곳에 있었는 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고 엘리트 용병이라 불리는 가디언 주제에 한낮 토끼고기를 보고 토하는 나약하고 한심스럽기 그지 없는 사실에 대해서 무언가 변명을 해야 했지만
그저 손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나를 응시하는 그를 조용히 쳐다보고 만 있었다.
숲은 상당히 고요했고 하늘에 떠 있는 가느다란 초승달이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들어와 풀 숲 사이사이에 배여 있던 혈향을 정화시켰다.
하얀 군복을 입은 이안은 그 상태로 오랫동안 나를 응시하다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곧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피가 난다.”
“........”
이안의 시선을 쫓아가자 왼쪽 어깨부분이 살짝 칼에 베어져 검은 군복을 더욱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오른 손을 들어 올려 살짝 감싸자 그가 팔을 뻗어 그런 내 팔을 떼어내고는 자신의 손가락으로 환부를 후벼팠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자 이번에는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같은 가디언은 처음 봐. 피에 경악하고 죽음이 무서우면서 왜 굳이 여기에 남아 있는 거지?”
“......”
“대답해.”
“.....피와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야.”
오히려 무서운 건 나 자신.
나날이 죄책감 때문에 파 먹혀 지는 심장.
옭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는 이성.
그러고도 계속 이 곳에서 버티고 있는 난 과연 무엇을 위한 가디언인가.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힘겹게 이 자리에 서있는 거지? 그런 의문들이 스스로를 사정없이 몰아쳐 가고 있었다.
이안은 사각거리는 투명한 눈동자에 약간 힘을 주며 나를 쳐다봤다.
“......너 답군.”
“....무슨 뜻이야?”
“스나이퍼로서의 사격술. 비쉬로서의 격투기. 상황판단 능력 등으로만 판단한다면 최고의 가디언이지만 정신적인 부분이 터무니없이 약해.
3년이나 훈련을 받고도 동정심이나 죄책감을 버리지 못했다니 넌 정말 희귀한 생물이야. 류 아리마사.”
방금 전 내가 토하고 있던 것을 새삼스럽게 비웃는 것처럼 그의 입 꼬리는 드물게 휘어져 있었다.
최고의 군인인 그에게 가디언으로서의 자질을 적나라하게 지적당하자 얼굴이 뜨거워져 왔다.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고 살짝 고개를 젖히자 낮은 웃음소리 까지 들려왔다.
“...이만 가겠어.”
수치심에 귓가를 파고드는 나른한 웃음소리를 외면하며 돌아서자 부드럽게 손목이 붙잡혔다. 무심결에 뒤돌아보자 그가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준다.
흰 빵과 약간의 육포.
“..쓰러지기 전에 그거라도 먹던가.”
전투가 시작된 초기에나 볼 수 있었던 것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게 믿기 어렵다. 과연 장교라는 건 감투 뿐 인 게 아니로군.
구역질 때문에 거의 5일간 물 이외에는 먹은 것이 없는 상태에서 내밀어진 그것들은 지나치게 유혹적이었다.
“식사 때....내 숙소에 와도 좋아. 조금 더 남아 있으니.”
왜 내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 거지.
아니 그보다 내가 그동안 별로 먹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더 이해하기 힘들다.
이안의 부관이 되긴 했지만 나는 거의 모든 전투의 최전선에서 싸웠고 가까이에서 그를 보필하는 이는 따로 정해져 있었다.
이안은 자신을 쳐다보는 나의 눈에서 그런 의문을 읽어 냈는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니까.”
달싹거리는 그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를 해독하지 못한 채 야영지로 돌아갔다.
오랜 시간 동안 연마된 감각이 등 뒤의 시선을 고스란히 느끼게 했지만 끝까지 뒤돌아 보지 않았다.
3년의 훈련동안 같은 공간에 머물면서 처음 가지는 접점이었다.
늘 일정거리를 유지하는 라인 밖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좁혀진 거리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허기에 지쳐가면서도 결국은 한번도 그의 숙소로 찾아가지 않았고 어느새 전투는 끝나버렸다.
그 때에 비해 지금은 어떤가. 아무렇지도 않게 동료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피 냄새가 진동하는 밀림에서 살아있는 육고기를 사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