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난 괜찮으니까...이거 네가 입어.”
“......”
샨은 내가 벗어준 군복을 내밀었지만 나는 그런 녀석의 손을 무시하고 환부를 살폈다.
잔인하기로 소문난 진저 답게 샨의 허벅지는 십자 모양으로 깊숙하게 찢어져 있었다.
상처는 가장 효과적으로 벌어져 연신 붉은 피를 뿜어낸다.
붉은 피가 땅으로 스며드는 것을 바라보면서 지사제를 바른 후 압박 붕대를 감자 고통을 참는 신음 소리가 샨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다.
“진통제가 없다. 미안.”
“.......네가 왜 미안한데. 류.....내가 칠칠맞게 다치지만 않았더라도...지금쯤 이 숲의 절반은 빠져 나갔을 텐데....
진저와 잭하고 싸울 필요도 없었을 거고....네가 돌봐줘도 이런 몸이면 여기서 못 나갈 게 뻔한데 왜 남은 거야.
지금은 낮이라서 어떻게든 버티지만 곧 피냄새를 맞고 그것들이 다시 몰려 올거야.
아무리 너라도...그 괴물들을 혼자 상대할 수는 없잖아. 총알도 다 떨어져 가는데....
대체 왜 남은 거야. 난 네 짐이 되기 싫어. 나 때문에 네가 위험해지는 게 싫어. 지금까지도 충분하잖아.
그러니까 그만하지 그랬어. 네가 그대로 돌아섰다고 해도 나 티끌만큼 원망 안했을 거야. 당연한 거니까.
한사람이라도 더 살아야 하니까 납득하고 이해했을 거야. 이대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안이 눈감아 줬어도 결국 우린 수배될 게 분명한데....
나 때문에 진저를 그렇게 만들다니...제정신이야?”
“말 많이 하지마. 창백하다.”
“류!!!!”
“....진저는 네 다리에 칼을 꽂았어.”
“.....알아. 하지만...”
“그래서 난 그 녀석의 다리를 잘랐다. 뭔가 잘못됐나.”
“.....아니 하지만 전혀 너답지 않잖아.”
“.......”
“보통은 그러지 않는다는 거 알아. 류. 비쉬이면서도 넌 사람을 베는 걸 무척 싫어한다는 것 잘 알고 있어.
네가 사람을 죽일 때마다 얼마나 괴로운 눈을 하는 지 뻔히 아는데.... 날 위해서 동료의 피를 손에 묻히다니....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워. 이상해......많이 기쁘지만....네가 내 쪽에 서준 건 정말 기쁘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파.
진저가 걱정되는 게 아니라 네가 걱정 돼..어째서 그렇게 까지 한거야.”
“......그만 해라.”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고 되돌릴 수 없어. 너와는 상관없이 한 행동이야. 네가 아닌 그 누구라도 난 똑같이 행동했을 거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책하지 마.”
“.....응”
굳이 자신이 아니라도 같은 행동을 했을 거라는 류의 말에 샨은 명치끝이 따끔거리며 아파왔다.
진중한 말투와 그 속에 담긴 진심은 사람을 따뜻하게 감동시키고 아리한 아픔을 선사한다.
낮은 한숨을 쉬는 류를 바라보며 샨은 죄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는 지 자신의 상처를 살피는 류의 안색을 살피며 입술을 조그맣게 달싹거린다.
류는 그런 샨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고요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심했어. 하지만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낙오자는 당연하게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녀석이니까...스스로 납득하겠지.
나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고. 그러니까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응.”
“낙오자는 없어. 버려지는 자는 있을지 몰라도.”
“....하지만 모두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분명 모두를 위한 전투를 해.
실상은 어떨지 몰라도 한 사람이라도 더 평온하게 살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힘으로라도 평화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적을 죽이고 살아있는 자신의 양심과 인간성을 죽여.
그렇다면 우리가 현재 믿어야만 하는 가치가 무엇이라고 생각해?”
“.......”
“모두를 위해서 누군가를 당연히 희생시킬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모두는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어째서 잊고 있는 걸까?”
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결코 가디언이 입에 담을 만한 말이 아니었다.
“죽어도 당연한 생명은 없어. 소중한 목숨과 그렇지 않은 목숨도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왠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건 자신이 버려질 목숨이었기 때문일까 하고 샨은 생각했다.
류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마친 뒤 샨의 뺨을 부드럽게 만졌다. 은회색의 눈동자는 불투명하게 보였지만 언제나처럼 아름다워서 샨은 또다시 자연스럽게 설득 되어 버렸다. 파트너 로서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다정함에 짜릿한 우월감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언제 잃어버릴지 몰라 초조하고 안타까웠다.
진저가 샨을 공격했을 때 이안의 말없는 관망아래서 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진저의 다리를 잘라 버렸다. 누군가가 말릴 틈도 없이, 진저가 신체가 분리되는 아픔에 비명을 채 지르기도 전에 류는 전투 때처럼 순식간에 상대의 공격력을 빼앗아 버렸다.
검은 군복을 입은 류의 냉정하게 가라앉은 회색의 눈동자와 하얀 피부는 붉은 피의 분수 속에서 더욱 투명하게 보였다. 그렇게 가끔씩 보여지는 모습에 류라는 인간의 본질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그를 평가했고 쉽사리 규정지어 버렸다. 최대한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단칼에 목을 베어 버리는 류를 민간인을 비롯해 같은 가디언들 까지 그를 지키는 자(guardian)가 아닌 살육자(killer)라고 불렀다.
진저가 쓰러지자 잭이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며 발악했지만 그 누구도 어떤 선에서 멈춰서서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리더인 이안 조차도.
바닥을 뒹굴며 신음을 내지르는 진저와 그런 그를 무감정한 눈동자로 내려다 보는 류. 공포에 떨고 있는 샨. 그런 모두를 팔짱만 낀 채 관망하는 이안. 모든 것이 이 숲처럼 비정상 적이었다.
그 상황을 종식시킬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것은 리더이면서 능력자인 이안이었지만 그는 사파이어가 무색할 정도로 푸른 눈동자로 그저 지켜만 뿐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리더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그 자리에서 팀의 분열의 초래한 샨과 류를 제거했어야 하는데도 팀에서 떨어져 나오는 그들을 무시했다. 상처가 쑤셔 오는 것을 참아가며 샨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도무지 알 수 없는 인물이었던 이안에 대해 떠올렸다.
이안 레이시하.
16세에 전투 가디언이 되고 19세 때 이미 정부군 최고 장교가 된 그의 실체에 대해 정확히 아는 이는 드물지만 고위 귀족의 혈통일 거라고 모두 생각했다. 엷은 갈색머리와 심연의 바다빛 눈동자, 군인 답지 않은 단정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는 피비린내를 풍기는 살육자 치고 지나치게 매력적인 존재 였으며 전투 용병인 가디언의 대다수가 그의 전투를 가장한 살육을 동경해서 군에 입대 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이 쪽 계통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며 강한 사내들의 지향점 이었다.
“먹을 걸 구해 올게.”
“.....아.”
멍하게 이안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다 류의 목소리에 살짝 고개를 들자 류가 그런 샨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곧 올테니까 걱정마...’ 류는 무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걱정이 되는 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면서 숲 속으로 사라진다.
샨은 그런 류의 모습을 보자 다리의 상처보다 가슴이 더 욱신거리며 쑤셔 왔다.
어떡하다가 이 꼴이 되었을 까.
계기는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 기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