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얼마나 걸었는 지 모른다. 발 아래 엉키는 수풀을 칼로 쳐내면서 앞으로 걸어 나가는동안은 숨쉬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지독한 습기가 숨통을 조여 왔지만 무성한 나무에서 생성되는 신선한 산소덕분에 머릿속은 굉장히 맑았다.
벌써 3일 째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한 위속은 잔뜩 뒤틀려 있었지만 지독하게 훈련되어 있는 몸은 좀처럼 쓰러지지 않았다.
시야를 가리는 수풀을 잘라내며 말없이 걷고 있는 동안 뒤 쪽에서 들리던 발자국 소리가 끊어진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자
어딘가에 발이 걸렸는 지 샨이 다리를 붙든 채 뒹굴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이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샨을 그저 내려다 보고 있다.
이안의 시리도록 차가운 푸른 눈동자에 살기가 깃들기 전에 얼른 다가가서 샨을 일으켰다.
“발목이 접질렸어.”
“......”
엄살 같이는 보이지 않았다. 일으키려고 했던 몸이 내게로 기울어 지면서 흉하게 부어올라 있는 발목이 눈에 들어 왔다.
시퍼렇게 부어올라 있는 것을 보니 조금 전에 넘어져서 생긴 것 같지는 않다. 짐이 되어서 버려 질 것이 무서워서 필사적으로 참아 왔을 거다.
에메랄드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잔뜩 실린다. 내 검은 군복을 잡고 있는 손가락이 희미하게 떨린다. 그러는 동안 나머지 녀석들이 다가왔다.
사흘 째 굶주림 속에서 이 진창의 밀림을 헤매고 있던 녀석들에게서는 인간다운 감정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어디 다친 건가. 샨.”
붉은 머리의 잭이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물었다. 약간은 즐거움이 담긴 그 어조에 내 옷깃을 잡고 있던 샨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약하다고 인식되는 동시에 샨은 제거되어 질 것이다.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는 궁지에 몰린 인간에게 있어 언제나 최대의 적으로 간주된다.
“괜찮아. 별 것 아니야.”
“그건...네가 판단한 문제가 아니지. 샨.”
진저가 총구를 샨의 머리에 겨냥하고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짧게 친 금발머리는 흙먼지로 인해 더렵혀져 있었지만 총구 끝만은 반들반들하게 빛나고 있었다.
돈이라는 단순한 목적을 가지고 모인 용병들에게서 동료에 대한 의리라는 걸 찾아보기 힘들었기에 충분히 예고 되었던 장면이었지만
지금 필사적으로 나를 잡고 있는 존재는 그 누구도 아닌 샨이었다.
“내가 책임진다.”
최대한 짧게 내 뱉은 뒤 샨을 내 가슴 안으로 끌어당기자 여러 개의 총구가 동시에 나에게 겨누어 진다.
붉은 머리의 잭이 느글거리는 낯짝으로 내게 다가오더니 총부리로 내 얼굴을 툭툭 치며 빈정거렸다.
“하하. 이 거 뭐야. 류. 너 돌았냐. 지금 이 커다란 짐덩이를 지고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
또다시 끔찍한 괴물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이 지긋지긋한 밀림 속에서 낙오자 따위를 끌여 들여서 어떡하겠다는 건데?
뒤지려면 혼자서 뒤져버리라고 그래. 그 녀석은 처음부터 걸리적 거리기만 했어. 다른 녀석들에게도 물어보지 그래?
식량만 축내는 그 녀석을 참아주느라고 모두 아주 폭발하기 직전이니까.."
"그만 둬.”
초록색의 잎사귀 사이로 투과된 햇빛이 총부리에 반사되는 순간 철컥하고 총알이 장전된다.
“왜? 너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잖아. 류. 잘난 척 하는 건 그쯤 해두지 그래. 적을 제거 하고 나서 우리의 최우선 목표는 생존이야.
나갈 구멍 다 만들어 놓고 시작하는 킬러와는 달리 우리는 복잡하고 꽉 막힌 미로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쳐 나가야 한단 말이다.
부상자 때문에 꾸물거리다가는 언제 죽어서 구더기한테 파 먹혀 버릴 지 몰라. 여기는 카오스의 숲이다. 류.
그러니까 그 같잖은 동정은 그만 두지 그래. 너한테는 전혀 안 어울리니깐.”
바짝 들이대고 있는 총구와는 달리 잭의 말투는 느긋했다.
“.....샨은 동료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잭과 진저가 기가 차다는 얼굴을 했다. 잭이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고개까지 절재 절래 흔들며 물러나자 이번에는 진저가 다가왔다.
진흙 투성이에 엉망인 모습이었지만 그 속에 다듬어진 예리한 살기는 조금도 그 빛이 퇴색되어 있지 않았다.
말라버린 입술이 비틀린 순간 잔뜩 비꼰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우리 중에서 너만이 그렇게 생각하지.”
노골적인 비웃음이 공기를 진동시켜 고막을 파고든다.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마친 진저가 잭나이프를 허리춤에서 꺼내든다.
나 역시 손목에 매어 뒀던 단도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아무말 없이 관망만 하고 있는 이안을 쳐다봤다.
리더인 녀석은 표정 없는 푸른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전투 용병인 가디언들의 가장 큰 약점은 응집력이 없다는 거다.
그렇기에 한 사람 한사람이 완벽한 프로페셔널이지만 단체로 움직이는 상황에서는 그런 강점 때문에 가장 많은 죽임을 당하는 이들도 가디언이었다.
정부는 그런 가디언들의 약점을 보강하기 위해 마지막 안전장치로 능력자인 리더를 임명했다.
돌연변이로 태어난 능력자로 구성된 리더는 우리의 감시자인 동시에 힘의 구심점이었다.
리더의 자질이라는 것이 어떤 기준으로 책정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팀의 일원에게 목숨을 위협당하는 이 상황에서 부상자를 마치 무기질처럼 쳐다보는 그에게 희미한 분노를 느꼈다.
“그럼 너희들 끼리 가. 샨하고 나는 남겠어.”
아름다운 사파이어 빛 눈동자가 내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탁하게 흐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지만 날카롭게 피부를 찔러오는 살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의 전투방식은 조용했지만 그만큼 잔인했으며 냉혹했다.
엄청난 소문의 주인공이었던 그가 처음 팀의 리더로 임명 되었을 때 그를 둘러싼 수군거림은 기대감과 경외감에 가득 차 있었다.
최연소자로써 가장 높은 위치까지 올라간 최고의 가디언.
하지만 그런 무성한 소문은 군내의 전투 뿐 아니라 그 무엇에 대해서도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안에 의해 점점 더 이상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훈련이라고 해 봤자 무언가 대강대강 설렁설렁 해치우는 느낌.
잠깐의 몸 풀기가 끝나면 그는 리더의 하얀 군복을 입은 채 훈련장 한 구석에 앉아 멍하니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외견만은 훌륭해서 그런 모습조차도 군내의 여자 대원들과 라쉬들의 한숨을 자아내게 했지만
맹목적인 강함을 추구하는 비쉬들의 정복욕과 호승심, 열등감과 질투심을 자극시켰다.
동경에서 실망으로 그러다 노골적인 경멸로.
심지어 그를 숭배하고 있던 가디언들 조차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 이안의 진짜 능력을 의심하며 그를 우습게 보기 시작했다.
이안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감정도 가지고 있던 나조차도 팀의 구심점이라기보다 오히려 소실점의 역할을 하는 그가 리더의 자각이 없다고 판단했을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안이 가디언의 본분을 완전히 잊고 놀고만 있었다는 건 아니었다.
군 인사자들은 썩을 대로 썩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언제나 가장 크고 중요한 전투에서 그는 확실히 공을 세우고 있었고 누구보다 최전방에서 가장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투의 방향을 결정 지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과가 팀 내의 비쉬들에 의해 제대로 인식되지 않은 이유는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되는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전투 대신 마치 흥미진진한 게임이라도 하는 듯한 그의 느긋하고 특이한 전투 감각 때문이었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 선 능력자만이 가지는 여유.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투명한 실선을 유려하게 만들어 내며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적을 몰살시키는 그는 항상 침착하고 단정했으며 조용했다.
가디언들이 집착하는 용맹이나 힘의 과시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자신이 처리할 분량이 대강 사라졌다고 판단되면
나머지는 다른 팀원들에게 맡긴 채 물러서는 게 이안의 버릇이었다.
군대처럼...그것도 단순한 다혈질의 용병들로 가득한 가디언들의 눈에 그런 그가 좋게 보일리 만무했다.
계속 되는 명령 불복종에 부대이탈.
심지어 전투에 관련이 없는 민간인 여자들까지 강간하는 녀석들을 알면서도
이안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그들의 무시와 노골적인 경멸을 인지하면서도 줄곧 조용한 침묵만을 지켰다.
그리고 전투가 막바지에 다달아 승리를 눈앞에 뒀을 때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야 했을 그들의 몸은 이안에 의해 갈갈이 찢겨갔다.
습기 찬 밀림 속에서 거듭된 전투는 거칠고 잔인하며 치열했다.
프로라고 자부하는 그 많은 가디언들이 제대로 된 반항 조차 못하고 이안의 칼에 의해 신체가 조각 조각 분리 되어 갔다.
자신의 목이 떨어져 나가기 직전 그들은 고통에 몸부림 치면서 이안 레이시하라는 이름의 실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역겨움을 자아내는 피 냄새.
밀림의 습기가 허파까지 차올라 완전히 잠식당해 버릴 것만 같았다.
눈 앞 에서 흩뿌려지는 피와 갈기 갈기 찢겨진 시체를 멍하니 쳐다보다 기척을 느낀 그에게 응시 당했을 때 몸이 오그라드는 공포로 인해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살기에 몸을 떨다 순식간에 다가온 그에게 목을 졸렸었다.
“류! 저 녀석들 말대로 난 상관하지 말고 그냥 가. 지체할 시간이 없잖아. 네 발목을 잡아 끌어서 원망 듣기 싫단 말이다. 그러니까 그냥 가. 밤이 다가오기 전에.”
샨이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잔뜩 겁에 질린 주제에 강한 척 한다.
등골을 파먹는 공포보다 나를 먼저 생각해주는 그 마음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부상당한 몸으로 혼자 남겨진다면 이 위험한 숲에서 반나절도 살아남을 수 없다.
언제 덮칠지 모르는 괴수와 파충류들에게 아득아득 몸뚱아리를 물어뜯긴 후 썩어 갈 것이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류. 넌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지만 저 녀석은 아니야. 이 지긋지긋한 숲을 빠져 나가기 위해선 너 역시 필요해.”
진저가 여전히 내 머리에 총구를 들이댄 채 힐끔 거리면서 이안의 눈치를 살핀다. 동조해달라는 거겠지.
가디언은 크게 3무리로 나뉘게 된다.
공격자인 비쉬와 방어자인 라쉬 마지막으로 저격자 스나이퍼.
근거리 접근 전에서는 공격자 비쉬와 방어자 라쉬가 한 짝이 되어 전투에 임하고 스나이퍼는 그들은 먼 곳에서 엄호한다.
그 중에서 나는 드물게도 비쉬와 스나이퍼의 능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샨이 라쉬이기 때문에 그동안은 비쉬로서 전투에 임했지만 라쉬인 샨 없이 없어지면 스나이퍼로 나를 써먹을 생각이겠지.
“너희가 샨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 다면 나도 더 이상 너희를 동료로 생각하지 않아.
샨에게 털끝 하나 건드리거나 방아쇠를 당기려 한다면 그 전에 너희 목을 전부 따버릴 거다.”
내 목소리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긴장으로 인해 진저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리는 순간 쥐고 있던 칼로 총구를 잘라버린 뒤 팔꿈치로 녀석의 명치 부분을 가격하고 칼끝을 목 위 에 바짝 들이댔다.
잭은 진저가 당하자 망설이지 않고 내 관자놀이에 총을 들이대었고 샨은 내 소매를 힘주어 잡았다.
지독한 정적.
한동안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며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만 둬. 류. 나 때문에 이러지마.”
“....너 때문이 아니야.”
샨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살기로 팽팽한 이 공간 속에서 위화감이 들 정도로 따뜻한 은회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비참함과 함께 가슴 저린 감동을 느꼈다.
그래도 라쉬로서 그의 등 뒤를 지켜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이깟 부상으로 그에게서 내 쳐질 까봐 이렇게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인상적인 잿빛 머리카락과 은회색 눈동자를 가진 류는 지독하게 무뚝뚝했지만 샨에게만은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는 다정한 녀석이었다.
차갑고 잔인한 가디언의 가면이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이 친구는 한 사람의 목숨을 앗을 때마다 죄책감에 괴로워 하며 혼자 안으로만 삭혔다.
“아니. 나 때문이야. 나는 괜찮으니까 너는 가.”
“.....너라면 그렇게 하겠니?”
“......”
조용하게 가라앉은 류의 목소리는 단호한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만 둬. 나를 알면서 그렇게 말 하지 마.”
“닥쳐! 입에 곰팡이가 쓴 줄 알았는 데 오늘 따라 꽤 나불거리잖아. 류. 그렇게 주절 거릴 때가 아닐 텐데. 그리고 누구한테 협박이야.
한 사람이라도 더 살아 남아야 하는 게 팀의 규칙이라는 거 너도 잘 알겠지. 비정하게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야.
이렇게 입씨름 할 여유가 있다면 한 발자국 앞으로 더 걸어 가겠어. 그러니까 이 쯤 해두지.. 팀의 분열은 원하지 않아. 여기서 깨어지면 우리는 끝장이라고.”
다혈질의 잭이 붉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리며 나름대로 냉정을 가장하고 말했지만 그의 총구는 아직도 나를 향하고 있었다.
피로과 공복에 지친 몸은 인내를 잊어 버리게 한다. 여기서 한 발만 잘못 움직이면 우리 다섯 중 누군가의 목이 순식간에 날아 갈 것이 뻔하다.
실제 전투에서 사망하기 보다는 전투 후 분열된 팀원에 의해 살해 되는 것이 일반적인 가디언의 죽음 이었다.
그것을 막기 위한 안전 장치인 리더 이안이 침묵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숨통을 더욱 더 바짝 죄어 갔다.
그리고 그 균형은 나에게 공격을 받고 뒤로 물러나 있던 진저가 샨의 다리에 칼을 꽂아 넣는 순간 산산 조각으로 깨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