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3 2010-11 올스타전(All-Star Weekend) =========================================================================
이른 아침부터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호텔 근처의 조깅코스를 걷다가 뛰다가 반복하는 한 여자. 새하얀 피부색을 가졌고, 얼굴에 살짝 보이는 잡티 때문에 더 어리게 보였다. 그녀는 반짝이는 금색 머리를 위로 틀어올리고는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평상시 따뜻한 LA지만, 2월의 날씨는 조금 쌀쌀했기에 얇은 가을용 자켓을 입고 있었다. 조깅을 하며 온 몸으로 맞는 선선한 바람은 적당하게 그녀의 열을 식혀주고 있었다.
"어?"
마침 멀리서 보이는 야외 농구코트. 여자는 어젯밤 들었던 이야기가 사실인지 궁금했기에 농구코트를 지나가는 척하며 안쪽을 슬쩍 훑어보았다.
슉-
슉-
깔끔하게 들어가는 슈팅과 함께 공이 그물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작게 들려오는 자신의 목소리에 여자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The parting glass..."
그 남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저 예의상 인사로 하는 말이겠거니 싶었는데, 정말로 개인연습을 하는 동안에 The parting glass를 들으면서 남자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농구선수답게 큰 키는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샤프하면서도 어려보이는 외모에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의 전체적인 스타일이 정말로 괜찮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어리게 보이는 건 아니었고, 단단한 눈매와 짙은 눈썹은 남자로서의 향기도 풍기도 있었다. 게다가 자신보다 6살이나 어린데도 불구하고 행동이나 대화에서 배려와 여유, 그리고 신중함이 엿보였다. 마치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 같았다.
"후!"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오른쪽 사이드에서 부터 왼쪽 사이드까지 다섯 개의 지점에서 3점슛을 다섯 개씩 쏘아올리고, 여기저기 흩어진 공을 가지고 오는 것을 반복한 남자는 마지막 공까지 챙기고 나서야 땅에 내려놓은 수건을 집어올려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어, 에밀리. 굿모닝."
여자와 남자는 바로 에밀리와 영재였다. 영재는 자연스럽게 에밀리에게 인사를 건넸고, 에밀리는 타이트하게 달라붙는 옷이 신경쓰였는지 약간 부끄러운 표정으로 영재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직 꽤 이른 시간인데 조깅을 하네요. 굉장히 부지런한가봐요."
"아, 그건 아니에요. 오늘따라 눈이 일찍 떠져서 그래요. 그러는 윤은 피곤하지 않아요?"
사실 영재도 에밀리도 살짝 피곤한 상태이긴 했다. 영재는 한밤중에 스티브와 은밀한 접선을 하느라 제대로 잠을 못 잤다. 에밀리 역시 간밤에 꽤나 많은 사념에 잠겨 있었기에 제대로 잠을 잔 상태는 아니었다.
"제가 존경하는 선수 중, 코비 브라이언트라는 선수가 있어요."
에밀리는 그 선수를 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선수는 시즌 기간이든 비시즌 기간이든 항상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그만의 훈련을 시작한다고 해요. 그리고 코비는 지금까지도 그 훈련을 하고 있을 거에요. 평상시보다 조금 일찍 눈이 떠지긴 했지만, 훈련을 게을리 할 순 없잖아요. 에밀리도 배우고 가수니까 건강 관리를 하는 것 처럼요."
에밀리는 영재가 과연 스무살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신기했다.
'정말로 조깅을 하러 나왔네.'
그런 에밀리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재는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영재가 매일 아침 슈팅과 유연성 운동을 거르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항상 6시 30분쯤 일어나 7시 30분부터 가벼운 훈련을 시작한다. 약속 시간이 8시였기에 조금 일찍 일어날 생각은 했지만 지금 시간은 아직 7시 반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다.
[에밀리? 시즌2에서 베스 역할로 캐스팅이 되기 전 부터 건강관리를 철저하게 했대. 특히 가수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으니까 유산소 운동 위주로 해서 폐활량도 꾸준히 유지한다고 하나봐. 그러던 와중에 캐스팅이 되었으니 근력운동도 조금씩 늘리고 있다고 해. 로렌 말로는 새벽 6시나 6시 반쯤 꼬박꼬박 조깅을 한다고 하더라고?]
[이런 날에도 할까요?]
[응. 아마도? 에밀리는 그런 면에서 성실하지.]
간밤에 이루어진 회동에서 영재는 스티브에게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스티브가 영재의 속내를 눈치챘긴 했지만 되려 모른척하고 재미있게 구경할 사람이라고 판단한 영재는 그리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의외로 음흉하네.]
[음흉한 게 아니고 신중한 거라고 해 줘요. 스티브. 나는 스티브처럼 매력남이 아니잖아요?]
[하~ 하긴. 내가 이 매력 때문에 살 수가 없어!]
[그러니까 남자도 가리지 않고...]
퍽!
회동의 마지막은 가벼운 펀치였지만 영재는 6시 반부터 코트에 나와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스티브는 자신만 믿으라며 에밀리가 은근슬쩍 들을 수 있도록 호텔 주변에 조깅 코스가 좋다는 말로 농구코트를 지나가게 해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리고, 정말로 에밀리가 찾아 온 것이다.
'정말로 훈련을 하고 있네...'
하지만 빠른 눈치에 노련미까지 갖춘 영재도 알 수 없었던 사실 하나는 영재가 예상했던 모든 것을 에밀리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에밀리, 윤이 내일 아침에도 훈련을 한다고 하던데?]
[정말요?]
[응. 방금 만나고 왔는데 내일 아침에 약속이 있으니까, 평상시보다 일찍 훈련을 시작해야겠다고 하면서 뭘 챙겨야 하고, 내일 뭘 할건지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간단하게 알려주고 왔어.]
[그... 추천한 조깅 코스 믿어도 되죠?]
[그럼! 호텔 근처라서 조깅을 하고 와서도 충분히 약속시간 전에 준비할 수 있어. 그리고 경치도 좋고. 거기 큰 체육관 있지? 바깥에 설치되어 있는거. 거기쯤에서 다시 그대로 돌아오면 시간이 딱 될꺼야.]
스티브의 능청스런 말에 에밀리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결과적으론 이 둘이 모두 스티브 연이라는 배우에게 속아넘어간 꼴이 되었지만 스티브와 로렌은 그들 나름대로 항변할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한발 뒤로 물러나 흥미진진한 영화를 보듯 두 사람을 보며 즐기고 있었다.
"조깅은 더 하실 건가요?"
영재의 말에 에밀리는 '아니요, 이제 슬슬 돌아가려 했어요.' 라고 대답했다. 영재는 그럼 같이 가자고 말하며 주섬주섬 공을 챙겨 가방 안으로 집어넣었다. 농구코트를 나와 호텔로 걸어가는 길. 땀이 식어서 그런지 에밀리는 살짝 몸을 떨었고, 영재는 가방 안에서 여유분으로 가져온 져지 하나를 에밀리에게 걸쳐주었다.
"고마워요."
둘은 한적한 조깅코스를 산책하듯 서로 나란히 걸어가며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고, 가벼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내일도 경기에 출전하시나요?"
"네. 정규 경기는 아니지만, 3점 콘테스트(Three-Point Contest)에 나가요."
에밀리는 어제 보여준 영재의 환상적인 퍼포먼스에 매료되었기에 영재가 우승할 거라는 확신이 담긴 한마디를 던졌다. 만일 스티브나 아즈텍스 멤버들이 그런 말을 했다면 장난끼 섞인 말투로 설레발 치지 말라고 했을 법 했지만, 영재는 그저 그말을 듣고는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아, 윤. 부탁, 하나만 해도 되요?"
"네. 말씀해보세요."
에밀리는 주머니에 넣어놨던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어제 찍은 사진을 띄워놓곤 영재에게 건넸다.
"오우, 이게 저에요? 정말 잘 나왔네요."
"그쵸? 원본은 나중에 보내드릴께요. 아... 그래서 말인데. 혹시 사인, 해 줄 수 있을까요?"
에밀리의 말에 영재는 잠시 스마트폰을 받아들더니 어떤 사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이윽고 영재는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씨익 웃으며 터치펜으로 사인을 슥슥 써내려갔다.
"자, 여기요."
"고마워요."
에밀리는 사인을 받았다는 것에 기뻐서 사진을 확인했다.
[[email protected]]
사인 밑에는 영재의 SNS 주소가 적혀 있었다.
"......"
영재와 에밀리는 난감한 표정으로 스타박스에 앉아 있었다. 같이 만나기로 했던 스티브와 로렌, 멜리, 데이비드 가족이 그야말로 싹 사라져 버린 것이다. 차라리 예상이라도 할 수 있게 오늘 못 만날 것 같다는 뉘앙스라도 풍겼다면 준비라도 했을 텐데, 그런 것 하나도 없던 사람들이 사라져버리니 두 사람으로서는 이제 뭘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상태였다.
영재는 영재 나름대로 에밀리와 단둘은 처음이었기에 난감했고, 에밀리는 에밀리 나름대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해했다.
"아... 혹시 피곤하신가요?"
"네? 아,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괜찮아요."
영재는 혹시라도 피곤하다고 말하면 에밀리를 그냥 방으로 데려다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밀리도 괜찮다고 했고, 자신에게도 이런 휴일은 흔치 않은 기회였기 때문에 우선은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 뭘 할 것인지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두 사람은 살짝 어색한 느낌을 풍기며, 테이블에 놓인 메뉴판을 기웃거리며 뭘 마실까 고민하다가 영재는 항상 마시던 아메리카노, 에밀리는 카페라떼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에밀리는 LA에 대해 잘 아나요?"
"방송 촬영이나 공연 같이 일 때문에 몇 번 오긴 했지만 도시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영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메리카노를 한 입 홀짝였다. 영재는 이렇게 시간만 축낼게 아니라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아메리카노를 한번 더 홀짝이고는 스마트폰을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사실, 어제 스티브에게 들었던 곳 중에 여기는 꼭 가보고 싶었어요. 지금 당장 하고 싶으신 게 떠오르지 않으시면, 우선 여기부터 들러봐도 될까요?"
해맑게 웃으면서 기대하는 영재의 순수한 표정에 에밀리는 어색했던 분위기가 좀 가시고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이래서 어리지만 어리게만 보이지 않는것 아닐까라고 생각한 에밀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영재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런데, 가려는 곳이 어떤 곳이에요?"
"제가 요리에 취미가 있어서요. 마침 이 근처에서 톰 콜리코의 특별 요리수업이 있대요. 요리 잘 하세요?"
에밀리는 스티브에게서 들은 것이 참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요리를 좋아하는 것도 스티브가 이야기 해 준 그대로였다.
"좋아는 하는데 직접 하는 건 잘 못해요. 배울까 싶기도 하구요."
둘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톰 콜리코의 요리 수업을 같이 듣기 시작했다. 에밀리는 요리 수업을 경청하면서 앞에 놓인 재료를 능숙하게 손질하고 칼질하고, 간을 맞추고 불 온도를 재는 영재의 모습에 살짝 가슴이 뛰는 느낌이 들었다.
흔히 말하는 쿡(cook)남의 매력이 영재에게서 뿜어져 나온 것이다. 게다가 농구선수이다 보니 훤칠한 키에 탄탄한 체격이 다른 사람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탕탕탕탕탕-
양파를 다지자는 콜리코의 말에 영재는 거침없이 양파를 반으로 가르고 일정한 굵기로 양파를 채썰었다.
"오우, 생각지도 못한 분이 이렇게 능숙하실 줄이야. 여러분? 분발하셔야죠. NBA 루키챌린지에 나섰던 영재 윤마저도 이렇게 양파를 채 써는 데 능숙한데!"
콜리코는 그렇게 말하곤 옆에서 후라이팬을 뒤적이는 에밀리 앞에 다가갔다.
"이것도 윤이 한 건가요?"
"네."
콜리코는 뜨겁지도 않은지 손으로 웜 샐러드 (따듯하게 먹는 샐러드란 의미로써 채소 등으로 스톡, 육수를 내고 채소를 익혀 내는 특이한 방식의 샐러드) 를 집어냈다.
"음, 음! 좋아요, 나쁘지 않군요."
콜리코의 수업이 끝나고 시식의 시간. 웜 샐러드와 함께 곁들일 수 있는 간단한 해산물 파스타와 등심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에밀리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요리를 한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잘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맛있어요?"
그리고 음식을 먹으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영재의 표정과 눈빛.
"네, 맛있어요. 정말 맛있어요."
"다행이네요."
마지막으로 그 미소. 아이와도 같이 천진한 미소에 에밀리는 경기장에서 봤던 영재와는 또 다른 모습에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설렘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 쿠폰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파이널까지 3일 남았네요.
@일상은 다음 파트에서 마무리합니다. 이번 일상은 올스타전과 겹쳐서 조금 길었네요. 이젠 다시 시즌으로 돌아가야겠죠.
캐바밤님///ㅎㅎ 첫코시네요. 코멘 감사합니다!!
찬란한유산님, 쿤다라님, 천상별리님, 파이넨시아님, 오마리온님, 여신유리찬양님, -DarkANGEL-님, 망포동님/// 항상 코멘에 감사드립니다~~
안티(anti)님/// 엌ㅋㅋㅋ 잘못 이해했네요. 2주만의 재회인가요ㅋㅋ
미얄마님/// 연참을 자주 못해드려 죄송해요 ㅠ.ㅠ
냥사장님/// 앞으로도 노력할게요~~
블락장인보도블락님/// L.O.V.E
misscherry님/// 올스타전은 화려한 게 제맛이죠ㅋㅋ
개구리파워님/// 노블란이고, 소설이니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 같아요
넙띠뚱띠님/// 이전편 코멘에 감사드립니다. 말씀대로 지금 영재는 주변인물들이 다 농구관련이고, 혼자다보니 더 그렇지요.
얏홍이다님/// 쿠폰 감사합니다!! 얏홍이다님도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