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4 회귀(回歸) =========================================================================
샌디에이고 주립 대학(San Diego St. Aztecs)의 스타일은 거칠고 튼튼한 수비를 바탕으로 한 짠물 농구다.
공격력도 평균은 되지만 상대를 빡빡하게 만드는 수비력은 그야말로 NCAA를 통틀어 감히 최상급이라고 평가할 수 있었다. 특히 상대적으로 외곽수비는 약하지만, 포스트 수비만큼은 우승후보들에게도 쉽사리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수비 조직력을 만든 피셔 감독은 나름대로 수비 농구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샌디에이고 주립 대학은 수비의 팀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피셔 감독은 샌디에이고 주립 대학 농구부를 11년째 맡고 있었다.
(2014년도에도 전국 수비 1위로 평가받았습니다. 일례로 1픽 위긴스와 3픽 엠비드를 보유한 캔자스를 원정에서 수비의 힘으로 이겨버립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단한 수비력을 자랑하던 샌디에이고 주전 2팀이, 한 명의 동양인 신입생 때문에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윤영재.
같은 신입생중 한 명인 카와이 레너드 처럼 캘리포니아 주 미스터 바스켓 볼 선정, 라이벌스 닷컴 유망주 48위 등의 화려한 이력도 없는 그저 쓸만한 가드로 생각했었던 선수.
영재를 중심으로 한 1팀의 공격은 간결했다. 영재가 탑에 서서 리딩을 하고 좌 우측 외곽에 체이스 타플리와 알렉 윌리엄스가 섰다. 카와이 레너드와 말콤 토마스는 번갈아 가며 영재에게 스크린을 걸어 주었다.
영재는 스크린을 받아 매치업 상대를 따돌린 후 골밑으로 파고드는 레너드와 토마스에게 바운드 패스를 찔러 주거나, 헬핑 수비를 오면서 빈 외곽의 타플리나 윌리엄스에게 킥아웃 패스를 찔러 주었다.
"......"
영재를 전담마크 하던 4학년 주전 켈빈 데이비스는 경기 시작 후 10분 만에 멘탈이 너덜너덜 해 질 만큼 영재에게 처참히 당하고 있었다. 영재는 영리하게 스크린을 받아 데이비스를 떼어 내었다. 게다가 스피드마저 데이비스보다 빨랐다.
데이비스와 상대 빅맨이 스위치(매치업 상대를 바꿈. 이 경우 빅맨이 영재를 마크하게 된다)하게 되면 미스매치가 생기는 레너드와 토마스가 데이비스의 수비를 무시하고 슈팅을 쏠 수 있었다.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스피드가 빠른 데다가 스텝 스킬이 매우 뛰어나고, 페이크까지 영리하게 걸면서 디펜스 자체를 붕괴시키고 있었다.
게다가 데이비스는 빠르고 수비가 좋은 선수가 아니었기에 영재의 픽 플레이 한번에 뚫리는 것이 반복되었다.
"윽!"
마음대로 패스를 뿌리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영재를 막으려 하면, 어느샌가 레너드가 영재의 길목에 서서 스크린을 걸어준다. 그러면 영재는 재빨리 레너드의 스크린을 이용하여 뒤로 돌아 골밑으로 돌파를 시도했고, 그와 동시에 레너드도 골 밑으로 빠르게 파고 든다. 흔히 말하는 2:2플레이의 정석인 픽 앤 롤이다.
"훗차!"
완벽하게 레이업을 올라가려는 동작. 골밑을 단단히 지키던 브라이언 카웰은 레이업을 올리려는 영재의 손목을 박살이라도 낼 기세로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영재는 허공에 힘껏 팔을 휘두르는 카웰을 보며 웃으면서 옆으로 파고드는 레너드에게 가볍게 패스를 건네준다.
쾅!
묵직한 원 핸드 덩크를 꽂아넣은 뒤, 레너드는 빠르게 백코트 하는 영재의 옆으로 다가가 주먹을 내밀었고 영재는 빙긋 웃으며 그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맞대 주었다.
피셔 감독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NCAA에서도 프로들만큼은 아니지만, 팀 훈련을 통한 다양한 팀 전술을 사용한다. 지금 영재와 레너드가 깔끔하게 해 낸 2:2 플레이, 그 중에서도 픽 앤 롤은 주전들도 많이 상대해 보고, 많이 막아 보았던 공격 전술이다.
그런데 막지를 못한다. 바로 영재 한 명 때문에. 보통 픽 앤 롤은 롤러(=스크리너, 주로 빅맨)의 실력이 더 중요하다고 하지만, 이를 활용하는 볼 핸들러의 수준에 따라서도 차이가 크다.
'저건...일반적인 대학생의 수준이 아니다.'
5:5 게임이고 후보 명단이 없이 간단한 연습경기로 구성한 것이기에 전후반의 구분이 없는 20분 풀경기였는데 아직까지 턴오버가 단 한개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위험한 장면 자체가 연출되지 않았다.
보통 가드들은 드리블과 패스를 많이 하고, 볼을 오래 손에 쥐기에 턴오버가 많은 편이다. 그러나 영재의 플레이는 안정적이면서도 꾸준히 찬스를 만들어 내었다.
'저게 진짜라면... 물건이야. 물건이다.'
피셔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곤 영재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피셔는 1팀도, 2팀도 특별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다만 신입생으로 이루어진 1팀에게는 '가능성을 보여라' 라는 말을 하며 각자의 포지션을 지시했고, 주전으로 이루어진 2팀에게는 '주전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줘라' 고 말하며 실전처럼 플레이할 것을 주문했다.
고교 기록에 따르면 신입 팀의 가드인 체이스 타플리와 윤영재는 3점이 그리 뛰어난 가드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주전들에게 기본 맨투맨 수비를 지시하되, 가드들에게는 타이트하게 붙기보다는 거리를 두고 돌파를 우선 저지하는 수비를 지시했다. 게다가 센터인 브라이언 카웰은 페인트존을 지키면서 돌파의 2차 저지선을 형성하도록 했다.
그런데도 영재를 막지 못한다. 초반 데이비스가 영재에게 느슨하게 붙자, 바로 슈팅을 쏘아 올렸다. 3점이 3개 연속으로 메이드되자 데이비스는 영재에게 새깅 디펜스(상대방이 약하다 싶은 거리에서는 슈팅을 막지 않지만, 그 보다 가까운 지역에서 슈팅을 쏘게 하지 않도록 하는 극단적 디펜스. 주로 3점이 약한 선수들에게 3점 라인 뒤의 슈팅을 막지 않고, 그 보다 안쪽 지역에서의 슈팅은 내 주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새깅 디펜스다.) 대신 악착같이 따라붙는 수비로 바꾸었다.
3점이 연속으로 꽂히자 한 달 동안 엄청난 훈련을 하였고, NBA 선수였다곤 하지만 속으로는 영재도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어찌되었든 영재는 손쉽게 데이비스를 따돌리고 페인트존까지 돌파해냈다. 그리고 상대의 헬핑을 유도해내고 오픈 찬스의 동료에게 공을 뿌렸다. 그리곤 계속 악순환이 반복된다.
레너드나 토마스의 스크린이 뛰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재의 돌파를 아무도 막지 못했다. 영재는 자신의 패스를 받은 슈터가 완벽한 오픈이 나지 않으면 자신이 가서 스크린을 걸어주거나 다시 패스를 받아 또 다른 찬스를 만들어 내었다.
영재는 슈팅과 패스, 돌파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팀원들에게 찬스를 만들어 주고 템포를 조절했다. 패스를 받은 동료의 성공률이 좋지 않아도 영재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픈 찬스의 점퍼가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NBA에서도 실전에서 오픈에서 다 들어가는 경우는 없다. 결과가 어떻든 영재는 빠르게 백코트를 해서 수비에 가담한다.
그렇다고 영재가 수비력이 좋지 않는가? 라고 하면 큰일 날 소리이다. 영재는 공격 매치업과 반대로 수비에서는 상대 포인트가드인 D.J 게이를 마크했다. 전체적으로 볼핸들링이 좋지 않은 주전 선수들에게 실상 유일한 볼핸들러인 포인트가드를 락다운시켜버리면 오펜스는 엉망이 되버릴 수밖에 없다.
"이익!"
샌디에이고 주립 대학의 주전 포인트가드 D.J게이는 3학년으로 영재보다 2년 많은 NCAA경력을 가지고서도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아이솔레이션 돌파나 점퍼는커녕, 픽을 받고서도 제대로 된 돌파 한번 하지 못했다. 자신과 스크리너의 틈을 파고들어 빠르게 자신을 압박해왔다.
페이크를 사용해도 요지부동, 게이는 시간에 쫒겨 슈팅이나 죽은 패스를 하게 되고 자연스레 턴오버가 늘어난다. 2팀의 오펜스는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었다. 게이를 제외한 팀원들은 제대로 된 어시스트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패싱라인을 빠르게 읽고 차단하며 속공 찬스를 내주고야 말았다. 때로는 여유있게, 상대의 다른 팀원에게 더블팀을 들어가며 턴오버를 유발해냈다.
센터 롤의 말콤 토마스 역시 브라이언 카웰보다 2인치가 작지만, 투박한 카웰의 약점을 활용해서 슈팅을 막진 못할 지언정 끈덕지게 붙고, 특유의 유연성으로 극강의 리바운드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옆에서 레너드도 쏠쏠하게 흐르는 리바운드를 잡아내며 세컨볼 찬스를 최대한 내주지 않고 있었다.
'?!'
피셔는 알아챘다. 결국 이 팀의 수비도 영재가 중심이고 영재의 손짓에 따라 팀원들이 움직였다. 영재 자신은 마크맨을 완벽히 막아내는 것도 모자라 이곳 저곳 헬핑수비를 통해 턴오버를 유발해 냈다. 레너드와 토마스가 페인트존을 제대로 수비해주고, 영재가 외곽의 선수들을 제어하는 방식이었다.
어느새 경기 종료가 30초 남았다. 스코어는 37:21. 처참한 숫자였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주전 팀이 신입팀을 더블 스코어로 이기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음..."
영재는 영재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다. 자신이 NBA에서 뛰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선수들의 표정은 이미 굴욕감에 울그락불그락한 상태였고, 피셔 감독은 넋을 잃고 영재를 바라보고 있다.
경기 시작하면서 영재의 지시에 따라줄 것을 요청받은 팀원들은 의문을 품었던 초반과는 달리 어느덧 영재를 신뢰하게 되었다. 팀원들은 20분 남짓을 풀로 뛰었음에도 지친 기색보다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영재는 짧은 시간이었기에 단순한 지시로 팀원을 정해주고, 양 손에 따라 방향을 정해주었다.
마지막 10초. 이 대로 끝내더라도 영재는 충분히 선수들과 코치, 감독에게 자신을 어필했다. 경기 조율, 패스, 전무한 턴오버, 3점과 미드레인지 슈팅 능력, 스팟업, 풀업 점퍼 슈팅... 적어도 포인트가드와 슈팅가드로써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사람 욕심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가라앉지 않듯, 영재도 이 정도에서 멈추기는 싫었다.
토마스와 레너드에게 신호를 보내자, 그들은 슬글슬금 한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아이솔레이션을 하기로 한 것이다. 코트의 한 쪽에 4명이 몰려있고, 볼핸들러 1명이 1:1로 공격하는 지극히 올드스쿨한 전술이었다.
퉁퉁-
눈 앞에 서 있는 D.J 게이. 켈빈 데이비스와 이야기를 한 건지, 마지막 몇 분 부터는 게이가 직접 영재를 마크하고 있었다. 초반 이후 슈팅을 잘 쏘지 않는 탓 때문인지 키는 작지만 차라리 발이 빠르고 패스 스틸이 괜찮은 게이가 마크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렇단 말이지.'
영재는 처음으로 드리블에 기교를 섞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정말 정석이라고 보일 정도로 군더더기 없는 헤지테이트 스텝. 그리고는 상체를 앞으로 확 숙여 돌파를 시도했다.
"?!!"
하지만 바로 그 다음. 찰나의 순간. 영재의 상체는 스텝에 따라 2번 움직였다.
오른발 왼발. 그에 따라 상체도 오른쪽 왼쪽. 무게중심이 너무나도 가볍게 바뀌었고, 게이는 첫 번째 스텝까지만 해도 몸이 따라갔지만 두 번째 스텝은 따라가지 못하고, 완전히 영재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마지막 스텝. 폭발적인 스피드와 함께 안전하고 재빠르게 공을 지킨 채 치고나간다.
"유, 유로 스텝 이라고?!"
단박에 게이를 제쳐버린 영재는 그 속도를 늦추지 않으며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게이가 뚫리자마자 카웰은 골밑으로 달려와 영재를 막을 준비를 했다. 영재는 자신보다 30cm 가까이 큰 빅맨이 막아섬에도 웃으면서 옆으로 파고들며 점프했다.
카웰은 한참이나 작은 신입생이 자신을 농락하는 것 같아 시원하게 블락을 시도했으나, 그의 손에 걸리는 건 공이 아닌 허공이었다. 더블 클러치였다. 자신의 블락을 지나쳐 레이업을 시도한 것이었다.
코트 위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0.7초가 남았으나, 아무도 시간을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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