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에필로그 - 즉위식
웅성웅성.
과거, 오롯이 풀과 나무만이 빽빽했던 그곳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어휴, 사람이 많긴 많구만. 대체 오늘이 무슨 날이야? 뭐, 축제라도 열리는 거야?”
“허. 오늘이 그날이잖아?”
“그날? 오늘이 무슨 날인데?”
“이 친구 보게나. 매일 술만 마시지 말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좀 들으라고.”
“대체 무슨 날인데?”
“아이넬이라고 기억하지?”
“음? 아이넬이라면 예전에 우리 마을에 왔던 그 작은 아이잖아? 크, 그때 먹었던 삼겹살이 진짜 맛있었지. 근데, 아이넬이 왜?”
“이 친구도 참 무지하구만! 오늘 아이넬 그 친구의 즉위식이 있다고.”
“즉위식? 그게 뭔데?”
“왕이라고, 왕! 왕이 된다고!”
“뭐? 왕이면 그 제일 높은 사람 아니야? 아이넬이 왕이 된다고?”
“그래, 이 친구야.”
“이야! 내 친구가 왕이라니······. 이거 경사구만! 이럴 게 아니라 오늘도 거하게 한잔 걸쳐야겠군!”
“쯧. 안 그래도 오늘 즉위식이 끝나고 축제가 열린다던데?”
“그으래? 아이넬 만세다!”
“자자, 이러지 말고 어서 광장으로 가자고.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자칫 늦었다가는 손가락만 빨 거야.”
“그래, 어서 가자고!”
비단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금일 즉위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런 인파에 이리저리 치이며 휘청이는 한 남자가 있었다.
“끄응······.”
새하얀 로브를 깊게 눌러 쓴 남자였다.
기껏 차려입은 로브가 흐트러지고, 이를 매만지다가 결국 포기한 남자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남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세계 각지 나아가 차원을 떠돌며 임무 수행에 전념한 지도 어언 10년.
최근에서야 휴가를 얻은 그는 마침내 친구를 만나기 위해 이곳 아티로스 대륙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고향이기도 했던 아티로스에 돌아온 남자가 감회에 젖는 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할 세월이라고는 하지만······.’
남자가 저 멀리 초원이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하늘을 찌를 만치 높다란 건물들이 솟아있었으며, 그 주위에는 당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것들이 날아다녔다.
특히 마을의 가장 안쪽에 서 있는 화려하고 장엄한 건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을 갖게 만들었다.
‘거 참······.’
남자는 기억한다.
과거 이곳에는 널따란 초원이 있었다.
아울러 이곳에는 그 어떤 종족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그저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게 존재하던 종족인 인간이 살고 있었다.
근데, 이제는 이토록 화려하고 웅장한 도시로 탈바꿈했으니 놀라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하물며 옛말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이곳에 친구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것까진 좋았으나 하필이면 즉위식이 겹치는 바람에 때아닌 고생을 하고 있었다.
‘게이트라고 했던가?’
그나마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자하니 게이트라 불리고 있고, 그것을 통해서 이 인파를 벗어나는 건 물론 즉시 마을.
아니, 도시로 곧장 이동할 수 있다고 들었다.
“이래서 만날 수나 있을지 모르겠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남자가 힘겹게 몸을 가누며 인파를 헤치고 나아가기를 30분여.
마침내 남자가 게이트 앞에 도착했다.
‘어디 보자······. 1번 게이트는 도시의 입구고. 2번 게이트가 식당가······. 3번은 상점가······. 4번 게이트가 관공서······. 5번 게이트가 광장? 아아, 저기군!’
그 외에도 다양한 장소로 이동할 수 있는 게이트가 있었지만, 남자의 목적지는 광장이었다.
이내 안내 표지판을 읽던 남자가 고개를 주억이며 5번 게이트로 향했다.
5번 게이트 앞에는 한 작고 귀여운 소녀가 열심히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음? 비스테르······인가?”
남자의 말에 게이트 앞에서 사람들을 안내하던 비스테르 소녀가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여기가 광장으로 가는 게이트가 맞습니까?”
“네! 5번 게이트를 통해 광장으로 가실 수 있어요. 아, 그전에 잠시 신원 확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신원확인?”
“아, 수도에는 처음으로 방문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음. 임시 신분증을 발급해드릴까요?”
“임시 신분증?”
남자의 질문에 소녀 비스테르가 간단하게 설명했다.
요컨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고, 또 혹시나 불미스러운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도입한 일종의 안전 대책이었다.
소녀 비스테르의 설명을 들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로브를 벗어주시겠어요?”
조심스럽게 로브를 벗었다.
그와 동시에 소녀 비스테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왜 그러십니까?”
“어······. 실례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소녀 비스테르의 질문에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이로나스라고 합니다.”
“······이로나스?”
역시나 이번에도 소녀 비스테르가 멈칫했지만, 이내 활짝 웃더니 손에 들고 있던 도구를 만지작거렸다.
이윽고 소녀 비스테르가 남자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이건 임시 신분증입니다! 혹시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찢으시면 돼요!”
“호?”
임시 신분증을 받은 남자가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게, 그곳에 자신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자주 방문하실 예정이라면, 관공서에 가서 신분증을 발급받으실 수 있어요.”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화합의 도시 이로아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남자의 인사에 소녀 비스테르가 활짝 웃으며 외쳤다.
“이로아스?”
어쩐지 자신의 이름과 무척이나 흡사했다.
이내 시답잖은 생각을 털어낸 남자.
이로나스가 게이트로 발을 디뎠다.
* * *
커다란 전신 거울 앞이었다.
진짜로 중세시대의 왕이나 걸칠 법한 치렁치렁한 복식을 갖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거······. 너무 화려한 거 같은데요?”
이런 내 말에 옷매무새를 만지던 엄마가 호호, 웃었다.
“화려하긴 뭘. 잘 어울리기만 하는데? 어쩜, 우리 아들은 뭘 해도 멋있다니까. 안 그래요?”
엄마의 말에 아빠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넬이 누구 아들인데!”
“제 아들인데요?”
“어허. 당신도 인정할 건 해야지. 넬을 보면 날 쏙 빼닮았잖아. 안 그래?”
예나 지금이나 팔불출인 건 여전하다니까.
두 사람의 장난을 보며 웃은 나는 고개를 내렸다.
내 시선이 닿은 곳에는 작고 귀여운 소녀가 서 있었다.
이제 5살이나 됐을까.
커다란 눈과 올망졸망한 이목구비의 소녀였다.
소녀의 이름은 이렐리아.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이었다.
내 시선을 느낀 걸까.
내 옆에 찰싹 붙은 채 대기실을 둘러보던 이렐리아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헤헤헤. 오빠아!”
이렐리아가 양팔을 활짝 벌렸다.
이에 나는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여 이렐리아를 품에 안았다.
“헤헤.”
아우, 귀여워라.
내 동생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 이렐리아는 천사의 환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귀엽고 깜찍했다.
그래서다.
행여나 내가 이런저런 일로 바빠진다면, 이렐리아와 함께 놀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
그건 안 돼.
사실 나는 왕이니 뭐니.
이런 높은 자리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한사코 즉위하지 않겠노라고 거절해왔다.
근데, 이런 내 맹렬한 거부 의사에도 불구하고 다들 내가 왕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 즉위식에 관한 얘기가 나온 것은 약 3년 전이었고, 최근까지도 하냐 마냐를 두고 옥신각신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로아스의 대표를 비워둘 수도 없는 노릇.
날 왕으로 앉히고자 노력하던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이대로 버티다보면 끝끝내 다른 사람이 왕의 자리에 앉을 게 분명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이런 내 굳건한 의지를 단박에 무너뜨린 이가 있었다.
바로 이렐리아였다.
“에헤헤헤. 오빠, 왕! 왕이다!”
그렇다.
자고로 가장 무서운 적은 가장 가까이에 있다고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또 뭘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아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이런 호불호에 관련된 것들로는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게, 내 능력이라면 저 차원의 틈에서도 삼겹살을 구워먹을 수 있으니까.
근데, 딱 하나.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가 있었다.
이렐리아였다.
나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은 내가 이렐리아에게 약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렐리아가 날 찾아와서 “오빠, 왕 해!”라고 하는데 내가 어쩌겠나.
해야지.
그래, 이렐리아가 하라고 하면 하는 게 맞는 거다.
“보자, 그래. 오늘 즉위식 끝나고 오빠랑 같이 놀러 갈까?”
“놀러? 오빠랑?”
“응. 놀이동산 갈까?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아, 이번에 오빠가 회전목마라는 걸 만들었거든?”
아무래도 이렐리아의 나이가 어린 만큼, 탈 수 있는 놀이기구에 제한이 있다.
그래서 회전목마를 비롯하여 비교적 안전하면서도 즐길 수 있는 놀이기구들을 만들었다, 이 말이지!
“회존몽마?”
이렐리아가 자그마한 입을 움직이며 말했다.
“응. 엄청 재미있어. 그거 타러 갈까?”
“응응! 갈래!”
“좋아!”
오늘 오후에는 이렐리아랑 함께 노는 거로 결정됐다.
내가 한창 이렐리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곧 즉위식이 거행될 예정입니다.
스피커를 통해 곧 즉위식이 열린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윽. 이제 가야 할 시간인가.”
“이제 즉위식이 시작하는구나. 아들, 너무 긴장하지 말고, 알았지?”
“그래, 그냥 씩씩하게 가서 인사하고 와라.”
부모님이 내 등을 토닥였다.
나는 그런 두 분을 보며 장난스레 웃었다.
“오히려 저보다 엄마랑 아빠가 더 긴장한 거 같은데요?”
말이야 즉위식이지만 실상은 이렇다 할 절차는 없다.
아빠가 말했듯 그냥 왕성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테라스에 가서 가볍게 인사만 하면 끝난다.
물론 명색이 즉위식이다.
게다가 처음으로 맞이하는 즉위식인 만큼 이것저것 한다고는 했으나 내가 모조리 빼버렸다.
“그, 그러니? 호호. 아무튼! 잘 하고 오렴.”
“크흠. 잘하고 와라.”
“네. 그럼 다녀올게요! 이렐리아, 오빠 갔다 올게.”
“응응!”
세 사람에게 인사를 마친 나는 곧장 대기실을 나갔다.
“충성!”
“고생하십니다.”
마주치는 기사들의 경례를 받으며 복도를 걷고 있자, 저 멀리서 우다다다다다다,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저 모퉁이에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인물이 있었다.
하얗고 멋들어진 갑옷과 붉은 망토를 걸치고 있는 기사였다.
아울러 높은 직위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온갖 견장과 휘장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그들이야말로 왕국의 수호자이자 왕의 직속 기사단인 비스트 부단장이었다.
하여간, 복도에서 뛰면 안 된다니까 그러네.
“부, 부단장님! 여기서 뛰시면······”
“비켜어!”
부단장이 부랴부랴 말리는 기사를 향해 소리쳤다.
마치 나를 막으면 그대로 밟고 지나가겠다는 듯.
어마어마한 기세로 달려오는 부단장이 기사를 가볍게 뛰어넘더니 척, 내 앞에 착지했다.
부단장이 투구를 벗어 던졌다.
“대장!”
투구 안에 가려져 있던 오렌지색 머리칼이 촤르르 흘러내리며 그 사이로 시원시원하면서도 귀여운 인상의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준비는 끝났어?”
부단장의 정체는 다름 아닌 록시였다.
아까 말리던 기사를 대신하여 무어라 한마디를 날리려던 찰나였다.
“록시. 복도에서 뛰어다니면 안 된다고 했지.”
나보다 먼저 록시의 행동을 꾸짖는 이가 있었다.
좋게 말하면 차분하고, 들리는 그대로 말하자면 무뚝뚝한 느낌의 어투였다.
나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어느 틈엔가 내 뒤에 기사가 서 있었다.
그녀가 바로 기사단의 단장인 루나였다.
“우와아! 대장 멋있다!”
이제는 훌쩍 커버린 록시가 눈을 빛내며 감탄했다.
비록 다들 어엿한 성인이 되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괜스레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단 말이지.
“그래? 잘 어울린다니 다행이네. 그나저나, 둘 다 여긴 웬일이야?”
“오늘 대장의 그······. 뭐지?”
“즉위식.”
“아, 맞아! 즉위식이라면서! 그럼 나랑 루나가 옆에서 지켜야지!”
아니, 뭐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닌데 지키긴 뭘 지킨대.
“곧 즉위식 시작하니까, 가면서 얘기하자.”
그렇게 록시와 루나를 대동한 채 걷던 나는 금세 테라스에 도착했다.
나는 테라스 너머를 힐끗 쳐다봤다.
정말 수많은 인파가 모여있었다.
괜스레 목이 타서 시원한 물을 들이켰다.
어우······.
무대공포증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곳에 오니 긴장되네.
이런 내 모습을 보던 루나가 방긋 웃더니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대장. 긴장했어?”
“긴장은 무슨······.”
“긴장할 거 없어.”
이에 루나도 내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다녀올게.”
가자.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테라스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