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소년기(140) - #진짜로 끝이다!
“전해야 할 것?”
“또 뭐가 있는 건가?”
내 말에 에프렐들이 웅성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옆에 서 있는 엘리니아 씨와 나르비 씨를 쳐다봤다.
나와 시선을 마주친 두 사람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은 꾹 다물고 있었지만 마치 올 것이 왔다고 말하는 듯했다.
나 또한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에프렐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부터 정령은 자유입니다.”
무척이나 짧은 말이었지만, 이 안에 담긴 의미는 몹시도 길고 무거웠다.
말을 마친 내가 스윽, 에프렐들을 살펴봤다.
몇몇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내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놀란 얼굴로 이쪽을 쳐다봤다. 비록 그 표정이 제각각이었지만 하나같이 사실이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마도 내 옆에 있는 웰버른 씨에게 사실 확인을 하려는 거겠지.
“그, 그럼 앞으로 정령과 맹약을 맺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까?”
한 에프렐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맹약을 맺을 수 없습니다.”
아무렴.
방금 내가 했던 건 부탁이 아닌 일방적인 통보다.
달리 말해서 에프렐의 우두머리인 웰버른 씨를 비롯한 모든 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된다는 이야기.
그냥 강제라고 봐도 무방했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큰 싸움이 난다고 한들 이상할 게 없는 셈.
“만약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또 다른 에프렐의 질문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따르든, 따르지 않든 상관없어요. 자, 그럼 역으로 질문을 하나 해볼게요. 이곳에 계신 여러분들 중······. 정령과 맹약을 맺은 분은 손을 한번 들어봐주세요. 아, 여기서 말하는 건 지금 이 순간에도 맹약을 맺은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덤덤한 어조로 질문을 던진 나는 장내를 훑어봤다.
쭈뼛쭈뼛.
모두가 서로를 쳐다볼 뿐 당장 손을 드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이에 내게 질문을 던졌던 에프렐이 도리어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예상컨대, 저 사람이 저런 질문을 던진 건 오늘 모든 에프렐의 맹약이 깨졌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겠지.
“방금 여러분도 보셨다시피 에프렐과 맹약을 맺은 정령은 없어요. 그리고 이건 앞으로도 이어질 거예요. 혹시 불만이나 건의할 게 있으시면 질문하셔도 돼요.”
나도 사람이다.
비록 맺고 끊는 걸 확실하게 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끝내기는 다소 찜찜했기에 나름 Q&A 시간을 주고자 했다.
이윽고 비교적 어려 보이는 소년 에프렐이 손을 들었다.
“저, 저는 궁금한 게 있어요.”
자신 없는 투로 말하는 소년 에프렐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네, 말씀하세요.”
“저, 저······. 혹시 저, 정령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정령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고요?”
내가 반문하자 소년 에프렐이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정령의 위치라······.
어감상 소년 에프렐이 말하는 건 단순히 정령의 위치를 묻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뭐, 지금 이 타이밍이면 괜찮겠지.
애당초 모두에게 정령이 무사하다는 걸 보여줄 겸 마지막 인사를 나눌 시간을 주고자 했다.
특히 차원의 틈에 갇혀있던 정령들 중에는 아직도 맹약자를 그리워하는 정령들이 있기도 했고.
나는 속으로 아크니악을 호출했다.
그러자 내 바로 뒤에서 커다란 게이트가 생겨났다. 갑작스러운 게이트의 등장에 다시금 소란이 일었다.
나는 손을 들어 모두를 진정시켰다.
“이건 위험한 게 아니니까 다들 놀라지 않아도 돼요.”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한 나는 반디를 불렀다.
호롱!
“가서 정령들을 데리고 나와줄래? 아, 에프렐과 만나는 걸 꺼리는 정령도 있으니까, 그들한테는 그냥 거기서 그대로 대기하고 있으면 된다고 해줘.”
호롱!
힘차게 답한 반디가 게이트로 들어갔다.
물론 반디를 볼 수 없는 에프렐들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긴장한 채 게이트를 응시했다.
그렇게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어······. 저, 정령?”
게이트와 가장 가까이 있던 웰버른 씨가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듯했지만, 놀란 기색마저 감추지는 못했다.
그럴 만도 하겠지.
웰버른 씨가 에프렐의 장로를 역임하는 동안 이렇게 많은 정령을 보는 건 처음일 테니까.
“정령들이다!”
“지, 진짜다! 어디서 저렇게 많은 정령이!?”
뒤이어 정령들을 발견한 에프렐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게이트를 통해 꾸역꾸역 나오는 정령들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이윽고 아크니악에서 대기하던 정령들이 게이트 밖으로 나왔다.
그 숫자는 공터에 모인 에프렐보다 많았으며, 금세 내 뒤에는 형형색색을 넘어 오색찬란한 동산이 생겨났다.
호롱!
나는 내 앞에서 신호를 보내는 반디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와도 된다고 말해줘.”
호롱!
이내 반디가 정령들에게 향해 내 말을 전했다.
그와 동시에 정령들이 조심스럽게 날 지나쳐 에프렐들에게로 향했다.
느닷없이 자신들에게로 달려드는 정령을 본 에프렐들이 당황했다.
개중에는 자신들을 공격하는 거라고 착각한 채 다급하게 전투태세를 갖추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령들에게서 적개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는지, 금세 자세를 풀었다.
이윽고 에프렐의 지척에 도달한 정령들이 뿔뿔이 흩어지더니 빠르게 그들의 사이를 누볐다.
알록달록한 빛을 흩뿌리는 게 흡사 주인을 만난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정령들의 행동에 당혹스러워하기도 잠시.
에프렐들 사이에서 크고 작은 외침들이 들려왔다.
“아······. 실론? 실론이야?”
“케, 케이프!”
자신과 맹약을 맺었음에도 어쩔 수 없이 맹약을 깨야만 했던, 졸지에 생이별을 했던 에프렐들이었다.
늘 그리워했지만 만날 수 없었던 친구를 발견한 에프렐들은 몹시도 반가운 목소리로 정령의 이름을 불렀다.
심지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는 대성통곡하는 에프렐도 있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자니, 옆에 서 있던 엘리니아 씨가 코를 훌쩍였다.
“다행이다.”
“그러게, 정말 다행이야.”
나르비 씨는 눈물을 보이진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밝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에프렐과 정령의 만남을 지켜봤다.
“아이넬 님, 정말 고마워요. 아이넬 님이 아니었다면······. 정말······.”
나는 꾸벅 허리를 숙이는 엘리니아 씨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저 혼자서 한 것도 아닌데요, 뭐. 아마 엘리니아 씨랑 나르비 씨가 없었더라면 정령들을 구할 수 없었을 거예요.”
환생한 후로는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경우가 많단 말이지. 이쯤 되면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어찌 된 게 들을 때마다 낯이 뜨거워진단 말이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에프렐과 정령들의 만남을 지켜보던 중.
누군가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저, 저기······.”
아까 내게 질문을 던졌던 소년 에프렐이었다.
소년 에프렐은 단풍잎과 비슷하게 생긴 정령을 품에 안고 있었다.
“네, 말씀하세요.”
“그게······. 저, 정령들과 맹약을 맺을 수 없다는 건 알겠어요. 그, 그럼 저는 앞으로······ 메이프랑 만날 수 없는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그럼!”
나는 기대하는 눈빛의 소년 에프렐에게 양해를 구한 뒤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저는 앞으로 에프렐과 정령의 맹약은 없다고 말씀드렸어요. 단, 어디까지나 맹약이 없는 거지 만날 수 없는 건 아니에요.”
그렇다.
나라고 에프렐과 정령의 사이를 아예 갈라놓을 생각이 아니었다.
단지, 지금까지의 관계라고 해야 할까.
물론 모든 에프렐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맹약이라는 점 하나로 인해 갑과 을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좋게 말하면 비즈니스적인 관계요.
있는 그대로 보자면 써먹기 좋은 부하······ 아니, 이것도 좋게 말해서 부하지 실상은 살아있는 도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쉽게 말해서 정령과 친구로 지내신다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요. 물론, 앞으로 정령이 살게 될 지역까지 오셔야 하겠지만요.”
아울러 굳이 말을 하진 않았지만, 나는 이곳에도 우리 마을과 이어진 게이트를 설치할 생각이다.
순전히 에프렐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나는 우리 마을에 오고 가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드라고스 산맥의 전 지역에 게이트를 설치할 생각이다.
이미 아브륄과 장터는 개통이 되어 있는 상황이기도 했고.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소년 에프렐이 연신 감사를 표했다.
그래, 이렇듯 진심으로 정령을 아끼고 친구처럼 여기는 에프렐이 있으면 그것으로 된 거지.
그 후로도 몇 가지 사항을 전달한 나는 못내 아쉬워하는 정령들을 다독이며 마을로 돌아갔다.
* * *
데모스에 대한 걸 밝히고, 에프렐과 정령의 관계를 정립하겠답시고 나선 지도 어언 3개월이 흘렀다.
그 후로 에프렐의 자발적인 도움······은 아닌가.
정확히는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기 위한 봉사활동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
이유야 어찌 되었든, 에프렐들은 데모스의 추종자를 수색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대단하긴 하네.”
늘 얘기했던 것처럼 드라고스 산맥은 어마어마하게 넓다.
제아무리 숲의 전문가라고 한들 이 넓은 지역 곳곳에 숨어있는 추종자들을 모두 찾는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나 또한 느긋하게 그들을 찾으려고 했다.
근데, 이게 웬걸.
누가 숲의 종족 아니냐고 욕이라도 할까 싶었는지, 에프렐은 눈에 불을 켜고 수색했고,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추종자들을 찾아내더라.
물론 에프렐만의 힘이 아닌 정령들도 함께 합세했기에 가능한 일이긴 했는데, 이 또한 두 종족 간의 시너지가 잘 맞았기에 그런 거겠지.
그리고 나는 오늘 드라고스 산맥에서도 가장 춥다고 일컫는 지역.
윙그롬에 서 있었다.
나는 새하얀 눈밭에 쓰러진 사람들을 힐끗 쳐다봤다.
전신이 새하얀 털로 복실거리는 게 예티를 연상하게 만드는 외모였다.
왜 갑자기 윙그롬에 왔고, 또 속칭 예티들이 쓰러져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이 또한 뒤처리의 일환이었다.
그 증거라고 해야 할까.
사방이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탓에 잘 모르겠지만, 자세히 보면 그들의 앞에는 하얀 부스러기들이 떨어져 있었다.
그 부스러기는 다름 아닌 데모스의 힘이 담긴 가면이었다.
이전에 피오는 마봉석을 들고 도망 다닐 때 윙그롬에 온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면의 사람들 다수를 목격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아마 지금 내 앞에 쓰러진 이들이 피오가 본 사람들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제아무리 에프렐의 탐색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들 한계는 있기 마련.
특히 윙그롬처럼 추운 지역을 탐색하기에는 적잖은 애로사항이 있었다. 그걸 알기에 이곳은 내가 맡아서 탐색했다.
약 3일에 걸쳐 돌아다니던 나는 마침내 추종자들의 흔적을 발견했고, 하나하나 붙잡아 가면을 부쉈다.
“뭐,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사실 이곳에 더 많은 추종자들이 있을 것 같긴 했지만, 굳이 전부 소탕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소수의 추종자를 남겨두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게, 추종자들도 어떻게든 연락을 주고받을 터.
그렇게 되면 알음알음 나에 대한 소문이 퍼지게 될 거고, 그러다 보면 데모스가 소멸했다는 것까지도 알게 될 테니까.
새하얀 입김을 휘휘 저어 날려 보낸 나는 쭈우욱, 기지개를 켜면서 힘차게 외쳤다.
“진짜로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