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소년기(137) - #라그나
“이, 이럴 수가······.”
크나프가 황망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초점이 흐릿한 그의 시야에 한 소년이 보였다.
소년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욱더 짙고 어두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종횡무진.
그야말로 신기와도 같은 몸놀림으로 정령들 사이를 누비는 아이넬은 모든 에프렐의 혼백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비단 아이넬의 유려하고도 화려한 검무만이 그들을 놀라게 한 건 아니었다.
“매, 맹약이······. 맹약이 깨지고 있어······?”
그의 말대로였다.
어째서인지 아이넬과 접촉한 정령들은 하나같이 형체가 흐릿해지더니 돌연 자취를 감췄다.
이것이 맹약이 깨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걸 모르는 에프렐은 없었다.
무리의 리더를 맡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던 건지, 크나프가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그, 그만! 그만하란 말이다!”
하지만 이런 크나프의 외침에도 아이넬의 검무는 멈출 줄 몰랐고, 끝끝내 모든 정령들의 맹약을 깨버렸다.
“휴우. 이걸로 걱정 하나는 덜었네.”
마침내 검무를 마친 아이넬이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에프렐들의 반응과는 달리 아이넬은 흡사 동네 마실이라도 나온 듯한 여유로움마저 내비치고 있었다.
“아아······.”
크나프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
모든 것을 다 잃은 사람과도 같은 크나프의 시선에는 텅 빈 공터가 들어왔다.
방금까지만 해도 바글바글했던 정령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
달리 말해서,
“이제 에프렐과 맹약을 맺은 정령은 없는 건가?”
아이넬이 작게 중얼거린 혼잣말이 크나프의 고개가 돌아갔다.
뻥긋뻥긋, 무어라 반박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그의 입에서는 그 어떠한 소리도 나오지 못했다.
아이넬의 말이 정답이었으니까.
“자, 그럼 장로라는 사람을 만나러 가볼······”
한 가지 일을 끝낸 아이넬이 보무도 당당하게 자동차에 탑승하려던 찰나였다.
“그럴 필요 없다.”
중저음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아이넬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난데없이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걸음을 멈춘 아이넬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응?”
그곳에는 30대로 보이는 청년이 서 있었다.
아이넬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저 사람이야말로 모든 에프렐을 통솔하는 우두머리인 웰버른이라는 것을.
“이, 이 목소리는······.”
“자, 장로님!”
“장로님이 오셨다!”
웰버른의 등장에 크나프를 비롯한 모든 에프렐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쯧. 못난 놈들. 고작 저런 아이 하나를 막지 못하다니, 에프렐의 수치로구나.”
웰버른의 질책에 에프렐들이 푹,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장로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다소 안심한 크나프가 변명하기 시작했다.
“며,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 저자는 이상한 힘을 씁니다! 예, 장로님이 말씀하셨던 그 어둠의 힘을······. 어둠의 힘을 쓰는 자입니다!”
“어둠의 힘을 쓴다?”
웰버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크나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 확실합니다!”
크나프의 외침에 아이넬이 픽 웃었다.
‘뭐, 맞는 말이긴 하지.’
아이넬이 맹약을 깨기 위해서 사용한 흑색 검은 엄연한 데모스의 힘이다.
즉 크나프가 언급한 어둠이 데모스를 지칭하는 거라면 틀린 말이 아닌 셈이다.
크나프의 확신 어린 말에 웰버른이 이번에는 아이넬을 눈에 담았다.
“나는 웰버른이라고 한다. 에프렐의 장로를 맡고 있지. 그래서 이곳까지 행차하신 이유를 물어도 되겠는가?”
마치 이곳에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질문에 아이넬이 입맛을 다셨다.
저런 여유로운 태도만 보더라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님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일단······. 상황을 파악하는 게 먼저겠지.’
의구심을 잠시 접어둔 아이넬이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아이넬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아이넬은 에프렐의 구역에 멋대로 침입했다.
하믈며 에프렐과 다툼을 벌였고, 거기다 모든 정령들과의 맹약을 강제로 깼다.
웃으면서 안녕이라고 인사를 건넬 상황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웰버른은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았다.
“안녕하신가.”
“웰버른 씨라고 했죠? 그쪽한테 볼일이 있어서요.”
“호오, 나한테 볼일이 있다고?”
아이넬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그전에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대체 언제부터 그랬던 건가요?”
“뭐?”
“저거요.”
아이넬이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장로가 기거하는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모른 척하시기는. 라그나요.”
“라그나······? 서, 설마 너는 라그나가 보이는 건가?”
웰버른이 처음으로 동요했다.
“보이기만 하겠어요? 다시 물어볼게요. 대체 언제부터 라그나가 저렇게 변한 건가요?”
“라그나가 변하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에, 엘리니아! 아이넬이 얌전히 차에 있으라고 했잖아. 응? 이러지 말고 어서······.”
난데없는 소란에 아이넬이 뒤를 확인했다.
어느 틈엔가 자동차에서 나온 엘리니아와 이를 뜯어말리는 나르비가 있었다.
“내가 안 된다고 했는데······. 미, 미안해요.”
나르비의 사과에 아이넬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방금 그건 무슨 말이에요? 라그나가 변했다니요?”
재차 이어진 엘리니아의 질문에 아이넬이 뺨을 긁었다.
“음······. 그러니까······.”
아이넬이 네크론에 진입하기 전이었다.
그때도 그는 활활 타오르는 검붉은 불길을 목격했다.
다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워낙 거리가 멀었거니와 그냥 원래 라그나의 불길이 검붉은색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당장 우리가 쓰는 불만 하더라도 파란색, 붉은색, 주황색, 등등.
다양한 색깔이 존재하니까.
하지만 조금씩 네크론에 가까워질수록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건물을 눈앞에 둔 순간.
아이넬은 저 검붉은 불길은 그저 라그나가 뿜어내는 게 아니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고로 세상의 모든 색깔을 합치면 검은색이 된다고 했던가.
지금 라그나가 뿜어내는 불길에는 다양한 정령들의 기운이 녹아들어 있었다.
달리 말해서 라그나는 다른 정령들을 흡수했고, 이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힘을 키워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데모스의 힘이겠지.’
데모스가 가진 파괴의 힘이라면 정령이 지닌 힘은 물론 그 원천까지도 파괴할 수 있다.
애당초 데모스가 이로나스의 영혼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이 파괴의 힘 덕분이었고.
이윽고 신색을 회복한 웰버른이 짐짓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이내 모든 설명을 들은 엘리니아가 경악한 얼굴로 웰버른을 쳐다봤다.
“웰버른 아저씨. 지금······. 아이넬 님이 말씀하신 게 사실인가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웰버른. 당신은 정말······.”
나르비 또한 덩달아 웰버른을 질책했다.
“내 말보다 저자의 말을 믿는다는 건가? 후후. 엘리니아, 나르비. 크나큰 실망을 안겨주는구나.”
“먼저 우리를 실망시킨 쪽은 누구지?”
나르비의 말에 웰버른이 혀를 찼다.
“쯧. 너희 둘은 에프렐의 규율을 어긴 것도 모자라 저자를 이곳으로 안내했다. 응당 죗값을 치러야 할 거야.”
“엘리니아 씨, 나르비 씨. 뒤로 물러나세요.”
잠자코 대화를 듣던 아이넬이 엘리니아와 나르비의 앞으로 나섰다.
“하, 하지만······”
“괜찮아요. 자, 여기는 저한테 맡기고 뒤로 물러나세요.”
아이넬의 단호한 태도에 두 사람이 뒤로 물러났다.
웰버른의 저 뻔뻔한 태도를 보아하니 쉽게 입을 열 것 같진 않았다.
‘아니, 못 여는 거라고 봐야겠지. 이걸 어쩐다.’
잠시 고민하던 아이넬이 픽,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뭐, 고민할 게 있나.’
아이넬이 누군가.
그는 맨몸으로 비스테르를 구하고, 산맥에 흩어져 사는 종족들이 지닌 고민과 갈등을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거기서 끝인가.
축제를 통해 종족의 화합을 이뤄냈다.
나아가 아브륄을 물론, 드라고스 산맥 각지에 퍼진 이들은 먼 사촌이 아닌 가까운 이웃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굳이 아이넬이 나서지 않더라도 다들 교류에 힘을 쓰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게 쉬웠을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지.’
평화를 사랑하고 다툼을 싫어하는 그다.
옛말에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했던가.
툭 터놓고 말해서 아이넬이 지닌 지식과 힘이라면 모든 종족을 통일시키는 건 아주 간단하다.
그냥 그가 알고 있는 무기.
대표적으로는 핵이나 생화학 병기같은 무기 몇 개만 제작해도 모두가 알아서 머리를 조아릴 터.
만약 아이넬이 마음만 먹었다면 진작 드라고스 산맥은 하나가 되었으리라.
‘힘으로 상대를 꺾는 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니까.’
만약 강제로 모두의 화합을 이뤄낸다면, 그것이 데모스와 다를 바가 뭐 있겠는가.
그래서다.
아이넬은 아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조차 그는 쉽게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쉬운 길을 두고 돌아가는 선택을 마다하지 않았다.
모두가 만족하고 불만이 생기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하물며 최대의 적이라 일컫는 데모스마저 물리쳤다.
이제 막 11년을 살아온 소년치고는 참으로 다이내믹한 인생을 살아온 아이넬에게는 거칠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그래,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하면 되겠지.’
결심했으니 이제는 행동할 일만 남았다.
아이넬이 웰버른을 직시했다.
그에게서도 작게나마 데모스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다만 웰버른에게 느껴지는 데모스의 기운은 무척이나 미약했으며, 특정한 지점에 뭉쳐있었다.
‘속전속결이다.’
아이넬이 주먹을 쥐었다.
“핫!”
목표를 눈에 담은 아이넬이 그대로 땅을 박찼다. 전광석화와도 같은 몸놀림이었다.
“헛!”
순식간에 자신의 코앞에 나타난 아이넬을 본 웰버른이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아이넬이 한발 더 빨랐다.
후우웅!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아이넬의 손이 그대로 웰버른의 뒤통수에 닿았다.
‘부서져라!’
그와 동시에 파괴의 힘이 웰버른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크······ 으아아아아아악!”
갑작스러운 사태에 저항하던 웰버른이 비명을 지르며 털썩, 쓰러졌다.
이에 아이넬이 그대로 웰버른의 뒤쪽으로 향해 흑색 검을 휘둘렀다.
파악!
‘좋아.’
찰나간에 일을 끝마친 아이넬이 웰버른을 쳐다봤다.
“크으으으······.”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던 웰버른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그동안 무슨 짓을······.”
중얼거린 웰버른의 혼잣말을 들은 아이넬이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성공이구나.”
이로써 확실해졌다.
본래라면 정령을 지배했어야 할 웰버른이 도리어 라그나에게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넬이 웰버른을 부축했다.
“어때요? 이제 정신이 좀 들어요?”
“나는······.”
“뭐, 할 말은 많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네요. 이봐요, 크나프 씨.”
아이넬의 호명에 크나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예, 예?”
“잠깐 이쪽으로 와봐요.”
“예!”
크나프는 자신의 입에서 존댓말이 나왔다는 것도 모른 채 다급히 아이넬에게로 향했다.
“무, 무슨 일로······?”
“무슨이 아니라, 일단 웰버른 씨 데리고 피신하세요.”
“피신······?”
“예. 아무래도 라그나가 화가 난 것 같아서요. 여긴 위험할 거 같으니 크나프 씨가 모두를 데리고 피신하세요.”
아이넬이 힐끗 건물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자,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다 데리고 이곳에서 벗어나세요. 얼른!”
“아, 알겠습니다.”
이내 크나프의 지시에 따라 모든 에프렐이 자리를 벗어났다.
이윽고 검붉은 불길이 거세지더니, 아이넬의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