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소년기(136) - #흑색 검
자동차에 이어 또 다른 지구의 문명이 등장했기 때문일까.
방금 시끌벅적했던 숲속이 적막해졌다.
나는 두려운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에프렐들을 뒤로한 채 총을 만지작거렸다.
이에 에프렐들은 다시금 총을 쏠까 두려웠는지, 하나같이 파랗게 질리더니,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격한 반응에 픽 웃어준 나는 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넣고는 빙글빙글 돌렸다.
”자, 이제 길을 비켜줄 마음이 생겼어요?“
내가 여유로운 태도로 도발하자, 마찬가지로 잔뜩 긴장한 채 굳어있던 크나프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뭐, 뭐냐 그, 그건!”
“이거요? 글쎄요. 제가 알려준다고 알 수 있어요?”
재차 이어진 도발에 크나프 씨의 눈가에 분노가 맺혔다.
전에 만났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저 사람은 감정을 참 쉽게 드러낸단 말이지.
잠시 이를 벅벅 갈던 크나프는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그랬군. 네놈이 쓰는 그 무기! 네놈 필시 어둠과 손을 잡은 거구나!”
“어둠이라.”
아마 크나프 씨가 말하는 어둠이란 데모스를 의미하는 거겠지.
생각해보면 웃기네.
그도 그럴 게, 어떻게 보면 데모스를 흡수한 사람이 나였으니까.
“그거야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아무튼······.”
나는 빙글빙글 돌리던 총을 바르게 잡고는 총구를 겨눴다. 졸지에 표적이 된 크나프 씨가 움찔하더니 목을 움츠렸다.
“이제는 길을 좀 비켜줬으면 하는데요. 자꾸 방해하면 그때는 알죠?”
“빌어먹을! 기고만장하지 마라! 에프렐의 진정한 힘은 아직 내보이지도 않았으니까!”
잔뜩 겁을 먹은 것치고는 그럭저럭 강단 있는 대사였다.
어깨를 으쓱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호오, 그 힘이라는 게 뭘 말하는 거죠? 아아아, 혹시 정령을 말하는 건가요?”
질문에 도발을 섞어 말하자 크나프가 주먹을 쥐며 말했다.
“네놈이 아무리 어둠의 힘을 사용한다고 해도, 정령을 이기진 못할 거다!”
정령 이야기가 왜 안 나오나 했다.
좋아.
조금만 더 속을 긁어볼까?
“호오······. 근데, 왜 정령을 안 부르는 걸까나. 혹시 말로 그러지 실제로는 엄청 약한 거 아니에요?”
나는 일부러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했던가.
평소에는 짓지 않는 표정이라서 영 어색하구만.
그래도 이런 내 속마음을 모르는 크나프 씨는 더욱더 열을 내며, 이제는 아예 삿대질까지 했다.
“헛소리!”
“헛소리라······. 그럼 불러봐요. 그 정령이라는 거.”
“뭐?”
“정령이요. 어디 한번, 불러보세요. 아, 맞다!”
나는 뒤늦게나마 생각난 것처럼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정령이랑 맹약을 깨지 않으셨어요? 맞네. 그쪽은 더 이상 정령을 부릴 수 없는 거잖아요? 에이, 그럼 정령을 안 부르는 게 아니라 못 부르는 거네요?”
이 말이 결정타였다.
“후회하지 마라!”
내 도발에 홀랑 넘어간 크나프 씨가 몸을 팩 돌렸다.
“의식을 준비하라!”
나왔구나.
그러니까, 내가 이곳으로 오기 전이었다.
나는 늘 가슴에 품고 다니는 말이 있다.
만사 불여튼튼이다.
물론 과유불급이라는 말처럼 뭐든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안전. 특히 혹시나 모를 불상사가 생길 우려가 있다면 다소 과할 정도로 준비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따라서 나는 이곳으로 오는 내내 엘리니아 씨와 나르비 씨에게 여러 질문을 던졌다.
그중에는 에프렐만이 알고 있는 내용.
쉽게 말해서 남에게 밝히면 안 되는 질문도 더러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민감한 질문은 받은 엘리니아 씨는 크게 당황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녀는 에프렐이 지닌 몇 가지 비밀들을 이야기해줬다.
그리고 방금 크나프 씨가 언급한 의식 또한 에프렐만이 알고 있는 비밀 중 하나였다.
아울러 내가 굳이 그들을 도발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통해서 다행이네.
따지고 보면 나는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끌지 않더라도 모든 에프렐을 단숨에 제압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굳이 트럭에서 내려 저들의 앞에 섰던 이유.
나아가 굳이 마법을 쓰지 않고 총이라는, 어지간해서는 쓰고 싶지 않았던 무기까지 꺼내 무력의 차이를 보여준 이유는 의식을 치르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미리 계획했던 건 아니다.
단지 내가 크나프 씨의 성향을 알고 또 파악했기에 내지른 임기응변에 가까웠다.
뭐,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만사 오케이지.
“크, 크나프 님! 장로님께서 의식은 함부로 하지 말라고······.”
“시끄럽다! 우리는 에프렐이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멋대로 우리 구역을 침범한 것도 모자라, 에프렐을 모욕했다! 지금 이걸 참으라는 것이냐!”
“하, 하지만······.”
“의식을 진행하라! 어서 빨리 저 빌어먹을 꼬맹이한테 매운맛을 보여주란 말이다!”
크나프 씨는 부하의 만류에도 길길이 날뛰며 의식을 강행하라고 재촉했다.
“······알겠습니다.”
바른말을 했다가 호되게 혼난 에프렐이 뒤로 물러났고, 끝끝내 의식이 시작됐다.
이내 에프렐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며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았다.
“의식이라더니, 꼭 무슨 강강수월래 같네.”
뭔가 주인공의 변신을 기다려주는 악당이 된 듯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아무렴 어떠하랴.
때아닌 강강수월래를 감상하던 중이었다.
“호?”
서로의 손을 맞잡은 에프렐들에게서 녹색 마나가 흘러나왔다.
양이 상당한 걸 보니 다들 자신이 가진 녹색 마나를 모조리 뽑아내는 것 같았다.
마침내 녹색 마나가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원의 중앙으로 모였다.
마법진과 비슷한 형태로 모인 녹색 마나를 보던 크나프 씨가 번쩍 손을 들었다.
“우리의 부름에 응하라! 네필림!”
그와 동시에 뒤쪽에 서 있던 에프렐들도 덩달아 손을 들었다.
이어서 마법진이 빠르게 회전하더니, 돌연 정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 둘, 셋······.
에프렐의 숫자는 얼추 40명 남짓.
반면에 소환된 정령의 숫자는 딱 봐도 세 자릿수가 넘어가고 있었다.
듣자 하니 평범한 에프렐이 맹약을 맺을 수 있는 정령이 한 명이라고 한다.
물론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소위 천재들은 동시에 서너 정령과 맹약을 맺는 것도 된다고 했다.
즉 여기 있는 이들이 모두 다 천재라고 한들 세 자리가 넘는 정령을 소환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셈.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저 의식이었다.
“역시, 엘리니아 씨의 말이 맞았구나.”
지금 저들이 의식을 통해 소환한 정령들은 강제로 소환된 정령이다.
정확히는 다른 에프렐과 맹약을 맺은 정령을 공유하는 의식이었다.
음, 강제라는 말은 조금 애매한가?
애당초 정령을 공유하는 것 또한 맹약이 지닌 특성 중 하나였으니까.
나는 정령을 뒤로하고 의식을 끝낸 에프렐들을 스윽, 훑어봤다.
아니나 다를까.
정령이 소환되자마자 표정이 어두워지는 에프렐들이 있었다.
저들도 본래는 정령과 맹약을 맺었으나, 어떤 이유로 인해 정령과 헤어졌기 때문이겠지.
여기서 말하는 어떤 이유란 특정 인물의 강요일 가능성이 지배적이었다.
씁쓸함을 애써 털어낸 나는 손가락으로 가슴팍을 톡톡, 두드렸다.
“반디야, 준비됐어?”
내 목소리를 들은 반디가 꿈틀거리며 사인을 보냈다.
오케이.
때마침 의식을 끝낸 크나프 씨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정령들을 바라봤다.
“저기요, 이제 다 끝났어요?”
내가 말하자 크나프 씨가 팍, 미간을 구기더니 날 노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금세 입가에 비웃음을 띄운 크나프 씨가 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후후후훗. 끝났냐고? 그래, 의식은 끝났다. 그리고······. 버르장머리 없는 꼬마, 네놈도 이제 끝이다!”
나는 짐짓 겁에 질린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어이쿠, 무서워라!”
이런 내 장난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라도 한 것인지, 크나프가 호쾌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이제 와서 후회해도 늦었다! 네놈은 에프렐의 구역을 침입했으며, 에프렐을 모욕했다. 죗값은 치러야 할 거야!”
크나프의 기세등등한 태도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따지고 보면 에프렐이 의식을 치르고, 또 맹약을 맺은 모든 정령들을 소환하게끔 유도한 당사자는 나다.
따라서 내가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진짜 창피하네.”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지?”
“창피하다고요.”
아니,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 모든 결과를 이끌어낸 건 나다.
아무리 그래도······.
“저 같은 꼬마를 상대로 그렇게 기뻐하면, 막 자괴감 들고 그러지 않아요?”
막말로 지금 이 상황만 놓고 본다면, 어린아이에게 힘자랑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야 하나.
하물며 크나프 씨는 진심이다.
오로지 내게 매운맛을 보여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부하의 충언마저 무시한 채 의식을 강행했다.
근데, 저렇게 순수하게 기뻐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괜스레 내 얼굴이 뜨끈뜨끈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크나프 씨가 입을 오물거렸다.
보아하니 그도 지금에서야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깨달은 눈치였다.
“뭐, 됐어요. 아무튼 의식 치르느라 고생하셨어요. 덕분에 일일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됐으니, 고맙네요.”
이건 빈말이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크나프에게 고마웠다.
아무렴.
정령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는 그들이 맺은 맹약을 깨야만 한다.
과연 에프렐이 순순히 맹약을 깨줄까?
설령 내가 협조적으로 나온다고 한들 일일이 찾아가서 처리하는 건 너무나도 비효율이었으니까.
근데, 크나프가 나서서 모든 정령들을 한자리에 모아줬으니 어찌 고마워하지 않고 배기겠느냔 말이지.
“쯧.”
끝으로 모두에게 들리게끔 혀를 차준 나는 성큼,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이에 무어라 한마디 하려던 크나프 씨가 다급하게 신호를 보냈다.
“막아라! 저 어둠의 도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해라!”
보아하니 내가 또 총을 쓸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막으라니······.
아예 정령을 총알받이로 쓸 생각이구나.
보면 볼수록 밉상이란 말이지.
후우우우웅!
이런 내 생각과는 별개로 얼떨결에 소환된 정령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왔다.
다만 정령들은 적극적으로 나서긴커녕 굼벵이처럼 굼떴는데, 아마도 크나프의 명령이 내키지 않기 때문이리라.
“자, 그럼 시작해볼까.”
나는 가볍게 다리를 굽혔다가 힘차게 폈다.
후우웅!
주변 풍경이 휙휙, 지나가더니 금세 정령들의 지척에 도착했다.
나는 몸속에 잠들어 있던 흑색 마나를 손으로 보냈다. 이윽고 내 손바닥에 기다란 검이 생겨났다.
“반디야!”
호롱!
내 말에 반디가 재빨리 옷에서 튀어나왔다.
지금이다.
나는 흑색 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목표는 정령과 에프렐 사이에 연결된 선이었다.
“잘려라!”
파악!
모든 것을 파괴하는 힘이 담긴 흑색 검은 녹색 선을 간단하게 끊어냈다.
아울러 녹색 선과 함께 맹약이 깨진 정령들의 몸이 흐릿해졌다.
차원의 틈으로 갇히기 전에 보이는 현상이었다.
“반디야!”
호롱!
이내 반디가 녹색 마나를 뿜어내 맹약이 깨진 정령과 자신을 연결했다.
“좋아!”
이로써 하나의 정령을 구했다.
“뭐 하는 거냐!”
크나프의 당혹스러운 외침이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령과 정령 사이를 오고 가며, 흑색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