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소년기(134) - #이거 방탄유리야 이······.
“이 정도면 됐겠지.”
에프렐 마을로 떠나기 전, 몇 가지 준비를 할 겸 아크니악으로 들어왔다.
더불어 내가 구한 정령들도 아크니악으로 이동시켰다.
정령들은 아크니악이 낯설었는지 다소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반디를 불렀다.
“여기는 위험한 곳이 아니라고 얘기해줄래? 그리고······. 이따가 에프렐을 만나러 갈 거라고도 얘기해줘.”
아무렴.
정령들은 줄곧 에프렐과 함께 지냈다.
거기다 둘 사이가 갑과 을의 관계였다고는 한들 모든 에프렐이 정령을 도구로 이용한 것은 아니라고 나르비 씨가 말했다.
아울러 다른 에프렐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맹약을 깨는 경우도 있었다지 아마.
즉 정령들 사이에서도 본래의 맹약자를 그리워하는 이가 있을 터.
나와 나르비 씨는 정령에게 자유를 준다고 한 만큼, 원해서 그들과 맹약을 맺는다면 말리지 않을 생각이다.
“어, 그리고 오늘은 이곳에서 대기해줬으면 한다고도 얘기해줄래?”
내 부탁에 반디가 동그랗게 원을 그리더니, 정령들을 향해 다가갔다.
“좋아. 그럼 나도 준비를 해볼까.”
나는 반디와 정령들을 뒤로하고 아크니악의 구석으로 향했다.
“크······.”
나는 아크니악의 공동에 줄지어 서 있는 탈것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꿈에도 그리던 스포츠카는 기본이요.
산악용으로나 쓰일 법한 소위 몬스터 트럭은 애교다.
군용 전투기처럼 날렵하게 생긴 비행기나 오토바이 등등.
이 세계에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탈것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전부 백색 마나로 만들었으며 디자인은 지구의 것을 그대로 따왔다.
전생이었더라면 평생을 벌어도 바퀴 하나 못 살 고급 탈것들을 보고 있노라니 엄청난 부자가 된 듯한 기분이다.
“뭘 타고 갈까나.”
사실 내 능력.
그러니까, 게이트를 활용한다면 이런 탈것은 그다지 필요하지가 않다.
드라고스 산맥 아니, 아티로스 대륙 어디라도 단숨에 이동할 수 있었으니까.
“그럼 재미가 없지.”
물론 오늘 해야 할 건 어디까지나 데모스와 관련된 일이다. 하물며 정령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에프렐을 만나러 간다.
그것도 협상이나 논의를 통해서 정하는 게 아닌 일방적인 통보에 가깝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옛말에 공은 공이고 사는 사랬다.
“퇴근하고 집에서 잔업하는 것만큼 짜증 나는 것도 없으니까.”
제아무리 중요한 일이라고 한들 가능한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거기다 데모스 자체는 이미 내가 흡수했고, 정령들도 무사히 구출했다.
그냥 알려주기만 하면 되니까, 어려울 건 하나도 없었다.
다소 귀찮을 뿐이지, 그다지 딱히 어려울 건 없었으니 이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거고.
“좋아. 오늘은 너다.”
나는 몬스터 트럭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녀석이 라이트를 깜빡이더니 부드럽게 움직이며 내 앞으로 왔다.
아무렴.
들판이나 초원처럼 평지라면 모를까.
산맥의 험한 길을 달려야 하는 만큼, 몬스터 트럭이 제격이겠지.
“어디 보자······.”
차에서 간단하게 먹을 간식이나 요깃거리는 좌석에, 혹시나 모를 상황에 쓸 도구들을 짐칸에 실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이윽고 에프렐 마을로 향할 준비를 마친 나는 몬스터 트럭에 올랐다.
운전대를 잡고 가볍게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러자 바퀴가 돌아가며 부드럽게 출발했다.
마그테리움으로 제작한지라 흔들림은커녕 특유의 엔진소리조차 나지 않는다는 게 조금 아쉽긴 했지만, 또 안전을 생각한다면 조용한 편이 더 좋긴 했다.
후우우우웅!
아크니악의 내부를 빠르게 주행하며, 시범 주행 겸 놀던 나는 나르비 씨가 올 때쯤이 되어서야 지상으로 향했다.
“아, 오셨네.”
아니나 다를까.
금세 나르비 씨가 도착했다.
그녀의 옆에는 엘리니아 씨도 함께였다.
“안녕하세요! 나르비한테 듣기로는 아이넬이 저한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던데요!”
엘리니아 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실은요.”
나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더불어 나르비 씨는 정령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 하며, 이를 위해서 에프렐 마을로 향한다는 것 또한 덧붙였다.
“엘리니아 씨도 에프렐이니까, 어떻게 생각하실지 의견을 듣고 싶어서요.”
말을 마친 나는 엘리니아 씨를 쳐다봤다.
우리의 이야기가 의외였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청하던 엘리니아 씨가 환하게 웃었다.
“저는 찬성이에요! 정령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다니,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심지어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 엘리니아 씨는 방방 뛰며 우리의 의견에 찬성한다고 말했다.
“진짜 괜찮겠어요?”
“그럼요!”
혹시나 싶어 다시 물었지만, 역시나 엘리니아 씨는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혹여나 그녀가 안 된다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네.
나르비 씨도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바로 출발하는 건가요?”
“네. 기왕 이렇게 된 거 바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엘리니아 씨는 어떻게 하실래요?”
“당연히 같이 가야죠! 근데, 에프렐 마을까지 가려면 꽤 오래 걸릴 텐데요?”
“그건 걱정할 거 없어요.”
나는 저 멀리 세워둔 몬스터 트럭을 가리켰다.
“우리는 저걸 타고 갈 거거든요.”
“으응?”
* * *
“우화아아아아아!”
엘리니아 씨가 시원한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펄럭펄럭.
옷은 물론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산발이 되었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바람을 즐겼다.
“엘리니아도 참······. 그나저나, 이것도 아이넬이 직접 만든 거예요?”
운전대에 앉은 나르비 씨가 물었다.
그녀는 자동차가 무척이나 신기한 듯 한시도 눈을 쉬지 않았다.
하기야.
나르비 씨가 아무리 박학다식하다고 해도 자동차는 지구의 것이다.
나처럼 환생한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생소한 게 당연하겠지.
“네. 이동할 때 쓰려고 만들었어요. 어때요? 되게 편하죠?”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는데도 흔들림도 없고, 바람도 막아주니까 너무 신기하네요.”
나르비 씨가 몸을 돌리더니 창문에 손바닥을 붙였다.
“이게 유리라는 거군요. 근데, 마을에서 쓰이는 유리랑은 다르게 되게 단단하네요?”
그렇겠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유리랑 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저건 일반적인 유리가 아니다.
애당초 재질부터가 마그테리움이니까.
“거기다 이거······. 마나를 품고 있는 거죠? 아니, 이 자동차라는 것 자체가 아예 마나의 덩어리처럼 느껴져요. 아주 정순한 마나.”
호오.
역시 요정이라서 그런지, 마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구나.
“맞아요. 이건 마그테리움이라는 걸로 만들었어요.”
“마그테리움? 그건 뭐죠?”
“어······. 저도 자세한 걸 설명할 만큼 아는 게 아니라서요. 아, 렐리크라고 하면 아시려나?”
“렐리크······. 네. 들어본 적은 있어요. 고대에 존재했던 문명이라고 들었어요.”
고대에 존재했던 문명이라.
사실 문명이라기보다는 조금 애매하긴 하다.
대다수의 렐리크는 이로나스 씨가 남긴 유산이었으니까.
그리고 최근에 기억을 뒤지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내가 처음으로 렐리크를 봤을 때, 셀리오스 씨는 이런 말을 했었다.
아크니악의 문을 고칠 수 있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이다.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은 과거 이로나스가 창조한 호문클루스였다.
이로나스 씨도 엄연한 사람이다.
할 일은 많은데 몸은 하나밖에 없었으니 그를 도와줄 이가 필요했다.
특히 수많은 렐리크를 일일이 관리할 수 없었던 이로나스 씨는 백색 마나로 호문클루스들을 창조했다.
그리고 몇 안 되는 그들에게 지식을 전수했고, 그게 지금까지도 이어져 온 것이다.
어떻게 보면 셀리오스 씨가 운용하는 비밀 조직, 네클레스와 비슷한 이들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위치야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었으니, 나중에 시간이 나면 그들도 한번 찾아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긴 하다.
“응? 그럼 이 자동차라는 것도······. 렐리크예요?”
“그런 셈이죠.”
“와······. 렐리크를 직접 두 눈으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나르비 씨가 눈을 반짝였다.
글쎄올시다.
그녀는 렐리크가 처음이라고 하는데, 그건 아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내가 착용하고 있는 각종 악세사리가 렐리크니까.
어디 이게 전부일까?
마을의 어딜 가더라도 렐리크가 존재한다.
단지 마을에서는 항상 막대한 양의 마나가 흐르거니와 내가 꼭꼭 숨겨뒀기에 모르고 있을 뿐인 거지.
“배고프죠? 이거라도 좀 드실래요?”
나는 미리 조수석에 실었던 도시락을 열었다.
“우와! 쿠키다! 어, 이건 뭐죠?”
누가 쿠키 러버 아니랄까 봐.
쿠키를 보자마자 군침을 삼키던 나르비 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건 초콜릿 쿠키라는 거예요.”
“초콜릿 쿠키?”
“네. 음, 초코레트라는 열매로 만든 건데. 달고 씁쓸한 맛이 나요. 축제가 열렸을 때 구했죠.”
어디 초코레트만이 전부겠는가.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선물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정말로 내가 필요했던 작물은 물론, 어지간하면 보기 힘든 것들도 잔뜩 있었다.
비단 작물만이 아니다.
몇몇 종족들은 자신들이 기르던 가축을 선물이라고 가져왔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카우드라는 마수가 새끼를 낳았었지.
숫자가 적어서 그냥 풀어놓고 키웠는데, 새끼를 낳은 이상 따로 울타리도 만들어야겠구나.
“아, 그리고 이건 커피라는 건데. 쿠키랑 같이 먹으면 진짜 맛있어요.”
나는 나르비 씨를 위해 따로 만든 소위 미니어처 머그 컵에 커피를 따라 내밀었다.
따뜻한 커피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나르비 씨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이 향기는······. 처음 맡아보는 향이네요.”
커피 특유의 고소하면서도 향긋한 냄새를 음미하던 나르비 씨가 호록, 커피를 마셨다.
“앗!”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맛이었는지, 나르비 씨가 눈을 크게 떴다.
“쓰죠?”
“네. 조금 쓰네요.”
“이걸 좀 넣으면 달아질 거예요.”
나는 나르비 씨의 커피에 시럽을 탔다.
“아, 맛있어요!”
커피의 향이 마음에 들었는지, 단숨에 잔을 비웠다.
“여기 많이 있으니까 마음껏 드셔도 돼요.”
간식 무제한 제공에 기꺼워하는 나르비 씨를 보며 흐뭇하게 웃은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조금만 가면 도착인가.”
에프렐의 마을의 위치는 네크론.
드라고스의 목이라고 불리는 지점이었다.
이 목이라는 이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산세가 험한 지역이라고 한다.
거기다 협곡이라서 방심했다가는 그대로 낭패를 볼 수 있다지.
실제로도 점점 네크론에 가까워질수록 길이 험해지는 게 실감된다.
그나마 이 자동차가 렐리크였기에 망정이지, 그냥 평범한 자동차였더라면 진작에 고장 나고도 남았으리라.
어쩌면 이런 지형의 특성 때문에 에프렐이 네크론을 터전으로 삼은 걸지도.
* * *
쉬우우우우욱!
팅!
“으앗!”
“꺅!”
앞 유리에 부딪힌 화살이 튕기며 나는 소리에 나르비 씨와 엘리니아 씨가 허둥지둥 귀를 막았다.
“괜찮아요?”
“으······. 저, 저는 괜찮은데······. 위, 위험한 거 아닐까요? 유, 유리는 깨, 깨지기 쉽다고 들었는데요!”
엘리니아 씨가 겁에 질린 얼굴로 물었다.
아까 바람을 즐기느라 얘기를 못 들었구나.
“걱정할 거 없어요. 이건 평범한 유리가 아니거든요.”
내가 웃으며 말하는 사이에도, 다시금 수십 발의 화살이 날아와 앞 유리를 두들겼다.
역시나 나란 놈도 양반이 되긴 글렀는지, 유명한 영화 대사인 “이거 방탄유리야 이······.”라는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