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IY천재의 힐링생활백서-150화 (148/159)

150. 소년기(132) - #정령들

차원의 틈이 넓다는 건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며칠 정도는 이곳을 떠돌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44년이라니······.”

그러고 보니 노인이 내게 위험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었지.

확실히 이런 암흑을 44일도 아닌 44년을 떠돌아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가지 더 알려줘야 할 게 있다만, 네가 찾는 정령들은 차원의 틈 각지에 떨어져 있다.”

“네? 그, 그럼······.”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정령의 위치까지 도달하는데 44년이라는 말이다.”

이어지는 크렐루스 씨의 말에 본능적으로 이마를 짚었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느낌이 이런 걸까.

터무니없는 소식에 머리가 띵하다 못해 눈앞이 아찔해졌다.

44년도 미치고 팔짝 뛰겠는데, 거기서 끝이 아니라 더 먼 곳에도 정령이 있다고?

비록 이곳에 버려진 정령의 숫자를 알진 못하지만, 못 잡아도 세 자리 숫자는 넘어간다.

즉 그들은 하나하나 찾아가서 모은다고 생각한다면······.

44년은 개뿔.

농담이 아니라 진짜 444년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노인은 내 육체의 위험 그러니까, 누군가가 나를 해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위험을 경고한 걸 수도 있겠네.

“하아.”

그렇다고 이제 와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어떻게든 가긴 가야 하는 건 맞다.

와, 이거 정령들을 모두 모을 수는 있는 건가?

진짜 막막하네.

내가 얼빠져 있자, 크렐루스 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제라도 있나?”

문제가 있냐고 묻는 크렐루스 씨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라면 문제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말하라. 나는 너의 수호신이다. 네게 문제가 있다면 나에게 들을 의무가 있다.”

귀여운 외모와는 다르게 근엄하기까지 한 크렐루스 씨의 말에 나는 간략하게나마 사정을 설명했다.

“흐음······. 그러니까, 인간에게 44년이란 시간은 굉장히 길다는 얘기로군.”

“네. 제아무리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해도······ 정신적인 피로는 쌓이기 마련이거든요.”

하물며 내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더라면 크렐루스 씨를 만나기는커녕 진작 미쳐버리고도 남았으리라.

“흐음······. 정신적인 피로라. 그게 쌓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정신적인 피로가 쌓이면 어떻게 되느냐라.

나는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떠올려봤다.

“음.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냥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이 될걸요?”

비록 그 원인은 다를지언정 극심한 스트레스에 절었을 당시의 나는 말 그대로 숨만 쉬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은 탈력감과 무기력함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듯한 기분마저 느끼게 했었지.

내 설명에 크렐루스 씨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곤란하군. 나는 너의 수호신이다. 너는 나에게 삼겹살을 구워줘야 할 의무가 있다.”

“삼겹살을 구워줘야 할 의무라니······.”

내가 살면서 이런 의무는 또 처음 듣는다.

어떻게 보면 막무가내 같은 느낌도 없잖아 있었지만, 삼겹살을 구워주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거기다 저렇게까지 좋아해주니 괜스레 흐뭇해지기도 하고.

뜬금없는 크렐루스 씨의 말에 웃은 나는 고개를 털었다.

그래, 자고로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다.

까짓 44년을 44일로 단축시키면 그만 아니겠는가!

내가 의지를 다잡고 있자니, 돌연 크렐루스 씨가 내 어깨를 잡았다.

“좋다.”

“네?”

“나는 너의 수호신이다. 너의 고충을 들어줄 의무가 있다. 내가 너를 정령이 있는 곳으로 보내주도록 하지.”

“어, 그게 가능한 일이에요?”

“음? 이곳은 차원의 틈이다. 나, 크렐루스가 관리하는 곳이지.”

물론 크렐루스 씨가 차원의 틈을 관리한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말이 관리지.

그의 말을 들어봤을 땐 그저 이곳에서 태어났기에 쭉 지내왔다는 느낌이 강했다.

명목상 관리인.

지구인의 감각으로 말하자면, 바지사장쯤 될 뿐, 차원의 틈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근데, 막상 크렐루스 씨의 태도를 보아하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 호기심 어린 시선에 크렐루스 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지?”

“아뇨. 그냥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하자 크렐루스 씨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힘을 쓰는군. 흐음······. 정령들이 있는 곳이······.”

힐끗, 정령들이 모여있다는 방향을 응시하던 크렐루스 씨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는 홀로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됐다.”

음?

뭐가 됐다는 거지?

내가 말문을 열려던 찰나였다.

“어······?”

저 멀리 무언가가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무수히도 많은 빛이었다.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단지 평범한 빛은 아닌데.

그도 그럴 게, 내가 아는 빛이라면 하얀색이었는데 지금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알록달록했기 때문이다.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째선지 빛이 시시각각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증거로 먼지처럼 작았던 빛이 조금씩 커졌다.

차원의 틈이라는 걸 가정했을 때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더불어 그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빛의 숫자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래선 은하수가 아니라 별똥별 아니, 별똥비라고 해야겠는데?

내가 감상에 젖는 것도 잠시였다.

금세 빛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어어어······.”

설마 이대로 부딪히는 건가 싶어, 비눗방울을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

우뚝!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면 별똥비가 멈췄다.

“휴우······.”

알게 모르게 긴장했던 탓인지, 이마에는 진땀이 다 흘렀다. 간질거리는 땀방울을 훔친 나는 코앞까지 온 빛을 유심히 살펴봤다.

“정령이잖아?”

확실하다.

저 무수히도 많은 빛은 다름 아닌 정령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크렐루스 씨를 쳐다봤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아뇨! 그게 아니라······. 이거 크렐루스 씨가 한 건가요?”

내 말에 크렐루스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들이 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한곳으로 모았다. 힘을 쓰는 게 오랜만이긴 했다만, 어떻게든 된 거 같군.”

“와······.”

크렐루스 씨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나는 벌려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무려 44년을 가야 할 거리다.

그걸 4년도 아닌 44일도 아닌, 4초로 줄였다.

하물며 방금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정령들은 한곳에 있었던 게 아니라 이곳저곳에 떨어져 있었고, 이렇듯 그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걸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겠냐고.

“고맙습니다.”

“고맙다? 이게 고마운 일인가? 나는 너의 수호신이다. 너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해결해주는 게 나의 의무다.”

크렐루스 씨의 말에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이건 단순한 의무감이 아닌 날 위해서 행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서 가보는 게 어떤가? 저들이 동요하고 있다.”

크렐루스 씨의 말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방금 그의 말처럼 정령들의 움직임이 어쩐지 부산스러웠다.

보아하니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한 모양이다.

하기야.

차원의 틈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정령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적잖이 놀라운 일이겠지.

특히 몇몇 정령들이 서로를 향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거로 봐서는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이들도 있는 것 같았다.

나와 크렐루스 씨의 등장에 몹시도 당황한 듯한 기색이었다.

비단 그것만 놀라울까?

시커먼 어둠 속에 돌연 비눗방울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다.

기나긴 시간 동안 어둠을 떠돌았을 그들에게 우리의 존재는 신기루와도 같으리라.

그 증거로 우리와 가까이 있던 정령들은 겁을 먹은 야생동물처럼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데려가는 것도 데려가는 거지만, 일단 우리가 적이 아니라는 것부터 알려주는 게 먼저겠지.

정령의 왕인 반디가 나설 차례였다.

나는 아까 크렐루스 씨가 등장했을 당시에 꽉 여몄던 옷깃을 살짝 풀었다.

“반디야.”

내 목소리를 들은 반디가 슬그머니 품을 빠져나왔다.

호롱!

“우리가 적이 아니라 친구라는 걸 좀 알려줬으면 하는데. 괜찮겠어?”

내 말에 반디가 원을 그리더니, 즉시 비눗방울을 빠져나갔다.

이내 정령의 지척에 다가간 반디가 빛을 뿜어냈다.

유난히도 밝은 빛을 뿜어내는 반디는 흡사 밤하늘의 별을 비추는 달을 연상케 했다.

더불어 우리에게서 멀어지던 정령들은 물론, 초유의 사태에 당황한 정령들이 우뚝 멈춰섰다.

아마도 정령의 왕인 반디의 존재를 알아차린 거겠지.

아니나 다를까.

정령들도 저마다 고유의 색깔을 뿜어내더니, 서서히 반디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나, 둘 정령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반디의 빛이 점점 더 커졌다.

마침내 모든 정령들이 반디의 곁으로 모였다.

형형색색.

비록 그 색깔은 다를지라도 한곳에 뭉친 그 모습이 민들레 꽃씨와 똑 닮아 있었다.

“반디야!”

나는 큰 목소리로 반디를 불렀다.

이윽고 정령들을 한곳으로 모은 반디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와 더불어 민들레 꽃씨도 덩달아 두둥실 따라왔다.

좋아.

이 상태 그대로 아티로스에 가면 되겠지?

이동할 준비를 끝낸 나는 크렐루스 씨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누누이 말했지만, 너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걸요. 만약에 크렐루스 씨가 없었더라면 모든 정령을 구할 수 없었을 거예요.”

나도 사람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걸 떠나서 차원의 틈 전역으로 흩어진 정령들을 일일이 찾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근데, 이렇듯 크렐루스 씨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순식간에 모든 정령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으니까.

“마음대로 해라. 단, 내가 너에게 수호신의 의무를 행했듯, 너도 나에게 의무를 행해야한다.”

“삼겹살이요?”

“그래. 너는 나에게 삼겹살을 구워줘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이는 너의 존재가 소멸되는 그날까지 짊어져야 할 것이다.”

“하핫. 아, 미안해요.”

크렐루스 씨는 진지하게 말하는 거겠지만, 그 삼겹살을 구워주는 의무라는 말에 웃음이 터지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까짓 삼겹살이 문제겠어요? 아티로스에는요 삼겹살만큼 맛있는 게 많다고요.”

“호오, 그게 정말인가? 삼겹살만큼 맛있는 게 많다고?”

“그럼요! 그걸 다 먹어보려면 하루 이틀로는 안 될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크렐루스 씨의 손을 잡았다.

“언제든지 아티로스로 오세요.”

“아티로스로······오라고?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내 말이 의외였던 건지, 크렐루스 씨가 눈을 크게 떴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짐짓 크렐루스 씨의 흉내를 내며 물었다.

그러자 크렐루스 씨가 미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처음이다.”

“네?”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네가 처음이라는 말이다.”

아.

그러고 보면 노인은 크렐루스 씨를 일컬어 괴팍한 신이라고 했었지.

글쎄올시다.

신에게 이런 표현을 해도 될 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본 크렐루스 씨는 본성이 나쁜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말투와 행동을 보고 있자면 꾸밈이 없었다.

마치 아르젠 씨가 연상된다고 하면 적절할까.

인공적으로 태어난 호문클루스처럼 아직 감정에 대해 모르는 사람 말이다.

나는 크렐루스 씨의 손을 꽉 쥐었다.

“그럼요! 진심으로 하는 소리죠! 언제, 어느 때라도 괜찮으니까. 꼭 아티로스에 와주세요. 아니지. 제게 삼겹살을 구워야 할 의무가 있다면, 크렐루스 씨는 맛있게 먹어야 할 의무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반드시 와야겠네요!”

“의무······. 그래, 반드시 가도록 하지.”

“약속했어요! 그럼······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게요.”

나는 애써 아쉬움을 지르밟으며 크렐루스 씨와의 인사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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