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소년기(129) - #크렐루스 씨
내가 놀라서 굳어버린 사이에도 반짝이는 빛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침내 하늘에서 내 시야를 가득 채운 끝에서야 빛이 멈췄다.
아울러 느닷없이 등장한 빛이 크렐루스의 눈동자일 거라는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깜빡.
크렐루스의 커다란 눈동자가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할 때마다 덩달아 마른침이 삼켜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예전에 인터넷을 돌아다니면서 우연찮게 본 문구가 있다.
내가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심연도 너를 들여다보고 있다.
나는 이게 그냥 우스갯소리로 떠도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유명한 철학자인 니체가 했던 말이라기에 놀란 적이 있었지.
내가 이 문구를 떠올린 이유는 지금의 내가 그런 심정이기 때문이다.
미지의 공포라고 해야 할까.
그저 날 응시하는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건만, 막연한 공포감이 자꾸만 나를 옥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후우······.”
긴장에 굳어버린 턱 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들숨과 날숨.
으레 자연스러워야 할 호흡이 지금 이 순간에는 괜스레 낯설고 힘겨웠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어떻게든 뗐다.
“안녕하세요!”
극심한 긴장감 때문인지, 내 목소리에 내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어르고 달래며, 재차 인사를 건네기를 몇 차례.
크렐루스는 분명히 날 보고 있음에도 그저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었다.
혹시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건가 걸까.
으음······.
다른 건 몰라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상대하기가 좀 껄끄러운데.
수신호라도 보내야 하나 갈등하던 차였다.
돌연 비눗방울이 요동치더니 후욱, 뒤로 밀려났다.
흔들림이 어찌나 심하던지.
마치 태풍에 휩쓸린 것처럼 거칠게 흔들리는 탓에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느닷없는 사태에 허둥지둥 비눗방울을 제어하던 중.
-정신력이 꽤나 강한 녀석이로구나.
뭐야, 말을 할 줄 알잖아?
어딘가 중성적인 목소리라고 해야 할까.
초면부터 나를 얕잡아보는 듯한 말투긴 했으나 크렐루스의 목소리는 꽤 듣기 좋았다.
아니, 그것보다.
방금 비눗방울이 거세게 밀려났었다.
나는 그게 왜 그런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크렐루스 씨가 말을 하면서 뱉은 호흡이 원인이었던 모양이다.
대체 얼마나 몸집이 크기에 태풍이 분 것처럼 입김이 저렇게 센 거지?
어떻게 보면 이렇게 컴컴해서 보이지 않는 게 약이 된 걸지도 모르겠네.
그건 그렇고.
일단 말이 통한다는 걸 알고 나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연신 내 어깨를 짓누르던 압박감도 목을 옥죄던 공포감도 조금은 가신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한결 가벼운 톤으로 인사를 건넸다.
“어······. 안녕하세요! 혹시 크렐루스 씨인가요?”
-크렐루스 씨······? 지금 나에게 하는 말인가?
응?
크렐루스라는 이름을 지닌 자가 또 있기라도 한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내가 노인에게 듣기로는 이곳의 관리자는 크렐루스이며, 유일한 존재라고 했으니까.
-흐음······. 이 크렐루스에게 씨라는 호칭을 쓰다니. 자그마한 몸집에 비해 당돌한 녀석이로구나.
아하!
굳이 나한테 저런 질문을 던진 건 호칭이 생소해서 그런 거였구나.
어······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지?
습관처럼 생각을 삼천포로 보내려던 차에 다시금 크렐루스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떤 버릇없는 녀석이 내 구역에 멋대로 들어왔나 궁금했는데, 흐음······. 너는 인간인가?
인간이냐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인간이에요.”
-특이하군. 인간은 나약한 존재. 내 기세를 버티긴커녕 차원의 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는 게 정상인데 말이야. 흐음······.
어쩐지 크렐루스의 눈동자에 흥미라는 감정이 떠오른 것 같았다.
-연구할 가치가 있어 보이는구나.
“어······. 방금 연구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요.”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묻자 크렐루스 씨가 작게 웃었다.
말이 작게 웃은 거지, 내 입장에서는 호랑이가 귀에 대고 으르렁대는 것처럼 들렸다.
-바로 들었다. 후후후, 그동안 지루했는데 여러모로 잘됐군. 부디 찰나의 시간이나마 내게 즐거움을 주거라.
낌새를 보아하니 나를 실험용 쥐.
아니, 지루함을 달랠 장난감으로 쓰려는 것 같았다.
이거 자칫 잡혔다가는 진짜 끔찍한 일을 당할 수도 있겠는데?
“잠깐만요!”
무언가가 내게 가까워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나는 퍼뜩 손을 들었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내 제지에 기분이 상했는지 크렐루스 씨의 목소리에 노기가 감돌았다.
“저는 평범한 인간이거든요? 연구를 해봐야 별로 재미있는 건 없을 거예요.”
침착하게 말했지만, 정작 크렐루스 씨는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이라. 방금 말하지 않았나? 평범한 인간이라면 차원의 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정확히는 내 기세를 버티지 못하고는 그 자리에서 소멸을 당하지. 거기다 너는 내 시선을 정면으로 받고도 멀쩡하다. 이게 어찌 평범한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어······. 그건······.”
이게 또 저렇게 말을 해버리니 딱히 할 말이 없네.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할 순 없는 노릇.
“아!”
나는 비눗방울이 흔들릴 때 재빨리 품에 넣었던 초롱꽃을 꺼내 보였다.
“아마도 이것 때문일걸요?”
-흠?
출렁!
내 손에 들린 초롱꽃을 확인한 크렐루스가 콧김을 뿜어냈다.
-이 기운은······. 그 녀석의 것과 똑같군.
여기서 말하는 그 녀석이란 내게 초롱꽃을 준 노인을 말하는 거겠지.
“저는 이곳으로 오기 전에 그분을 만났고, 이걸 받았어요! 그러니까, 아마 이 꽃 때문에 멀쩡한 걸 거예요.”
물론 이 말은 순전히 뻥이다.
사실 이 초롱꽃은 정령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줄 뿐, 나를 보호를 해주는 기능 같은 건 없었으니까.
-그게 사실인가? 흐음······. 그 녀석의 기운이 느껴지는 걸 보면 거짓은 아니겠군.
다행스럽게도 크렐루스 씨는 내 말을 믿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안심한 것도 아주 잠시였다.
-그 녀석에게 그걸 받았다는 건 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곳은 엄연한 나의 구역. 따라서 네가 이곳에 온 이상 너는 나의 관리를 받는 게 당연하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나?
“대충은요.”
-그래, 너는 나의 것이다. 그러니, 내가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는 이야기지.
대충이나마 이해했다는 데도 크렐루스 씨는 굳이 자기의 것이라는 걸 강조했다.
이거 이대로 가다가는 정령은 구하는 건 고사하고 나마저 이곳에 갇힐지도 모르겠는데.
나의 걱정을 눈치챈 것인지 품에 숨어있던 반디가 꿈틀거리며 밖으로 나오려고 했다.
“안 돼.”
나는 가슴에 손을 얹어 반디가 나오지 못하게끔 막았다. 괜히 반디가 나와봐야 긁어부스럼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으음······.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나.
나는 크렐루스 씨의 눈을 직시하는 한편, 서둘러 머리를 굴렸다.
그러고 보니, 크렐루스 씨가 날 연구대상으로 삼으려는 건 순전히 지루함을 달래기 위함이라고 본인이 직접 말했었지.
그럼 달리 생각했을 때,
“지루함을 달랠 수만 있다면, 굳이 저를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겠다는 이야기죠?”
내 질문에 정곡을 찔렸는지, 크렐루스 씨는 한동안 말없이 눈동자를 깜빡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래, 나의 지루함을 달래준다면야 굳이 널 연구대상으로 삼을 이유는 없지.
잠시 말을 멈춘 크렐루스 씨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말은 내 지루함을 달랠 자신이 있다는 이야긴가?
자신이 있냐라······.
어느 정도 실마리는 잡힌 것 같긴 한데, 막상 뭘 해야 크렐루스 씨의 지루함을 달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음······.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걸로는 부족한가요?”
-후후후. 솔직히 말하지. 네 녀석과의 대화는 무척이나 신선하다. 그래, 지루함이 조금은 가시는 느낌이야. 흐음······. 그렇군. 생각해 보니 인간은 수명이 짧다지? 네 녀석의 수명이 다 할 때까지 말동무로 삼아도 좋을 것 같구나.
어째 역효과가 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나만의 착각일까?
“그럼 평소에 좋아하는 건 있으세요?”
-좋아하는 거라······.
내 질문에 크렐루스 씨가 고심했다.
노인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렇고, 갑작스럽게 나타나 연구대상 운운했던 것도 그렇고.
첫인상은 다소 무서웠는데, 이렇게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려는 걸 보면 제법 순진한 구석이 있는 신이었다.
-어려운 질문이로군.
“어려운 질문인가요? 음······. 그럼 취미나 그런 건 없어요? 예전에 뭔가 재미있게 했었던 게 있다거나.”
-후후후. 나는 눈을 뜬 순간부터 이곳에 있었다. 이걸로 답변이 되겠나?
“아!”
그랬구나.
이제야 왜 날 보자마자 지루함을 언급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하기야.
나는 차원의 틈이 들어온 지 길어 봐야 서너 시간째다.
만약 여기가 지상이었다면 주변 풍경이라도 구경할 텐데, 그동안 내가 본 것이라고는 어둠이 전부.
나야 정령들을 찾기 위해서 쉼 없이 주변을 살펴봤지만, 눈만 아플 뿐 즐길 구석을 코빼기도 없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이곳에 있었다는 건 그만큼 무언가를 한 경험도 적다는 거겠지.
크렐루스 씨의 사정을 듣고 다니 어쩐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음? 왜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지?
아차.
내 시선에서 감정이 느껴졌나 보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 그러니까, 이렇다 할 취미나 좋아하는 건 없다는 거죠?”
-그렇다.
“흠······.”
어디 보자.
나는 크렐루스 씨의 눈을 보면서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 둘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나는 환생한 뒤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것도 단순히 스쳐 지나는 인연이 아닌, 친구 혹은 그 이상의 관계만을 따져도 세 자리 숫자는 가볍게 넘어간다.
하물며 마을에 사는 모든 이가 가족이라고 봐도 무방했고.
시작점이라고 해야 하나.
생전 처음 보는 종족과 사람들과 만나 마음을 열기까지. 그 시작점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많이 애용했던 게 있었다.
음식이었다.
자고로 상대의 마음을 빼앗으려면 위장부터 사로잡으라고 했던가.
비록 종족이 다르다고 한들 이 음식이라는 것 앞에서는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된다는 걸 매번 느끼곤 했던 것이다.
그래, 구관이 명관이라고 했지.
“혹시, 크렐루스 씨는 평소에 뭘 드세요?”
-씨······라는 호칭을 계속 쓸 생각인가?
“어, 불편하면 바꿀까요?”
-······됐다. 그나저나 뭘 먹느냐라······. 후후, 영겁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듣는 질문이로구나. 네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진 모르겠다만, 나는 먹는다는 행위를 해본 경험이 없다.
“진짜요?”
내가 눈을 크게 뜨며 반문하자 크렐루스 씨의 눈동자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섭취라는 건 몹시도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에게나 필요한 행위다.
“에이, 그런 말 하면 섭섭하죠.”
레비아 선생님만 하더라도 마나만 있으면 음식을 따로 먹지 않는다고 했었다.
하지만 내 요리를 맛본 뒤로는 완전히 달라져 완연한 미식가가 되셨다.
게다가 꽤 건강을 회복한 레스티아 씨도 툭하면 우리 집을 찾아와 은근슬쩍 밥을 먹고 가곤 하고.
“지루함을 달래고 싶으시다면서요. 그럼 그저 기다릴 게 아니라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게 좋죠. 어때요? 이참에 그 먹는 행위라는 걸 해보는 건?”
말을 멈춘 크렐루스 씨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후후, 노력이 가상하구나. 좋다. 까짓 그 먹는 행위라는 걸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