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소년기(127) - #재회
공공장소에 있는 화장실에 가보면 곧잘 볼 수 있는 문구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내 심금을 울렸던 게 하나 있다.
큰일을 먼저 하라, 작은 일은 저절로 처리될 것이다.
데일 카네기라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 남긴 말이라나.
화장실 변기 앞에 새겨뒀다는 게 기묘하긴 했지만, 참으로 뜻깊은 말이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말은 환생한 지금의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기도 했다.
“벌써 3개월이나 흘렀나.”
내게, 나아가 아티로스에서도 단연 큰일이라고도 볼 수 있는 데모스를 흡수한 지 어언 3개월이 흘렀다.
내가 무사히 녀석을 처리한 뒤로도 축제는 쭉 이어졌고, 무려 3번이나 기간을 연장했다.
그렇게 얼추 한 달에 걸친 축제를 마무리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그동안 뒤처리에 집중했다.
뭐, 뒤처리라고 해봐야 별 건 없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가장 큰 일이었던 데모스를 처리한 이상, 추종자에 대한 건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였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고, 데모스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만천하에 알려야 했지만 말이야.
그리고 그 뒤처리의 일환으로 나는 가장 큰 집단인 에프렐을 찾아가기로 되어 있었다.
물론 미리 약속된 건 아니고 내가 쳐들어가는 거지만, 아무렴 어떠랴.
“그전에……. 일단 영웅들부터 깨우는 게 먼저겠지.”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찾아가야 할 사람이 있었다.
과연 그곳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또 나를 만나줄지 확신할 순 없다.
그래도 해보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나으니까.
“휴우, 슬슬 가볼까.”
내가 홀로 중얼거리자, 내 가슴팍이 간질거리더니 품속에서 잠들어 있던 반디가 바깥으로 나왔다.
호롱!
마치 소풍을 떠나기 전날의 어린아이처럼 내 주변을 바삐 돌아다녔다.
“그래, 그래. 너도 많이 기다렸지?”
호롱!
“자, 그럼 바로 문부터 열어볼까?”
힘차게 외친 나는 눈을 감고 흑색 마나를 끌어올렸다.
뒤이어 데모스의 기억 중 일부를 떠올리며, 마치 검을 휘두르듯 손날로 허공을 때렸다.
그러자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온 흑색 마나가 그대로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말 그대로 허공이 쩌저저적, 쪼개지더니 시커먼 틈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지.”
나는 데모스를 흡수한 뒤로 그의 기억과 능력을 이해하기 위해서 상당한 노력을 투자했다.
그렇게 조금씩 이해도가 높아질수록 이 흑색 마나가 가진 힘이 엄청나다는 걸 깨달았다.
일례로 나는 백색 마나를 일컬어 창조의 힘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그저 내가 원하는 걸 상상하는 걸 그대로 실현시키는, 그야말로 신이나 가질 법한 힘인 것이다.
반면에 흑색 마나는 파괴하는 힘이다.
말 그대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심지어 존재하되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파괴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데모스가 지구의 지식을 몰라서 다행이었지.”
일례로 내가 가진 지식을 활용한다면 세포나 분자 단위까지 파괴하는 게 가능했으니, 말 다 했지.
만약에 데모스가 과학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더라면, 나는 그를 흡수하긴커녕 얼굴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정한다.
진작 아티로스를 손아귀에 넣고도 남았겠지.
그만큼 이 흑색 마나가 가진 힘은 무시무시했다.
근데, 독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서 약이 될 수도 있다고 했던가.
파괴라는 단어만 본다면 꽤 꺼림칙하다.
하지만 이 파괴라는 힘은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아주 좋은 쪽으로 쓰일 수도 있었다.
방금 내가 만들어낸 허공의 틈만 보더라도 그렇다.
“설마하니, 공간까지 파괴할 수 있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방금 내가 만든 틈은 흑색 마나를 이용해 강제로 차원의 문을 연 것이다.
달리 말해서 이 파괴의 힘만 있다면 나는 차원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내가 살았던 지구로 돌아가는 것 또한 가능할 터.
그래 봐야 뚜렷한 목적지를 알지 못하면 엉뚱한 곳으로 간다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이었다.
“뭐, 밑져야 본전이니까.”
이미 나는 몇 번이고 차원 이동을 연습했다.
가까운 거리부터 시작해 점진적으로 거리를 늘려갔고, 이제는 아브륄까지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해졌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아티로스 대륙에 한해서 이동했으니, 차원 이동이라기보다는 공간 이동이라는 말이 어울리긴 했다.
즉 진짜 차원 이동은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가자.
나는 미리 쌓아둔 배낭을 짊어지고는 차원의 틈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흡!”
마치 우주 한복판에 던져진 느낌이 이러할까.
사방이 컴컴한 공간에 덩그러니 서 있자니 극심한 공포감이 찾아왔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이었다.
급격하게 뛰는 심장을 어르고 달래며, 나는 머릿속에 한 장면을 떠올렸다.
뒤이어 재차 흑색 마나를 이용해 허공을 때렸다.
쩌저저적!
그와 동시에 시커멓던 허공이 깨져나가며, 밝은 빛이 눈을 찔렀다.
눈이 시릴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눈을 질끈 감은 나는 그대로 빛을 향해 몸을 던졌다.
솨아아아아아아!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소리였다.
마치 파도가 밀려드는 것처럼 청량한 소리가 내 귓가를 맴돌고, 따스한 바람이 내 전신을 감쌌다.
잠시 우두커니 서서 바람을 맞던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아!”
나는 눈에 들어온 장면에 짧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드넓은 황금색 바다.
전생에 내가 사고를 당한 후 눈을 떴던 바로 그곳이었다.
“성공이구나.”
내심 가능하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진짜로 이곳에 도착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기분이 좋은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호롱!
반디 또한 이곳이 마음에 들었는지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기뻐했다.
괜스레 가슴이 근질거려 콧잔등을 쓸고 있자니, 저 멀리서 무언가가 달려오는 게 감각됐다.
왕왕!
“아, 너는!”
기억난다.
복슬복슬한 털, 격하게 흔들리는 꼬리.
둥글둥글, 순둥순둥한 얼굴.
내가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만났던 그 강아지였다.
나는 자세를 낮췄다.
그러자 녀석이 냉큼 뛰어올라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아쿠!”
헥헥헥!
왕왕!
아주 잠깐 봤음에도 날 기억하고 있는 걸까.
녀석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것처럼 날 반겨줬다.
“그래, 그래. 나도 반갑다. 읏차!”
나는 쉴 새 없이 내 뺨을 핥던 녀석을 안아 들었다.
마음 같아서야 조금 더 놀아주고 싶지만,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편안한 자세로 안긴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초원을 가로질렀다.
강아지가 안내했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자 거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밑에는 익숙한 얼굴의 노인이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라고 해도 되는 거죠?”
내가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노인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안녕하다네. 그래, 젊은 친구는 안녕하신가.”
“그럼요! 저는 매일, 매일 안녕하죠!”
“그것참 다행이로구만. 차 한잔하겠나?”
나는 노인의 제안에 메고 있던 배낭을 내렸다.
“아, 이럴 게 아니라 제가 한잔 타 드릴게요.”
“호오.”
노인이 흥미로운 눈으로 배낭을 쳐다봤다.
“아, 그나저나 말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해요.”
나는 배낭에서 티 세트를 꺼내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허어? 자네가 날 찾아온다는 말을 20번은 넘게 들었네만?”
“우와. 진짜로 기도를 올리면 들리시는 거구나.”
나는 이곳으로 오기 전에 노인에게 몇 번이고 기도를 올렸다.
별 내용은 아니고, 조만간 한번 찾아뵙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도이자 일방적인 통보였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했던 건데, 진짜로 내 기도가 노인에게 들릴 줄은 몰랐네.
“허허헛. 어디 자네뿐이겠는가. 덕분에 잠도 설친다네.”
노인의 너스레에 나는 멋쩍게 웃었다.
“읏차, 여기……. 제가 제일 좋아하는 차예요.”
“향이 좋구만. 그래, 이곳까지는 어쩐 일로 왔는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어, 이미 알고 계신 거 아니에요?”
“알고야 있지. 그래도 직접 물어보는 게 예의 아니겠는가? 호오, 차 맛이 아주 좋군.”
“마음에 드시면 자주 좀 보내드려야겠네요.”
“허헛. 사양 않고 받겠네. 굳이 오기 귀찮다면 신전에 두게나, 내 따로 챙겨가도록 하지.”
직접 챙겨간다니.
빈말이 아니라 진짜 마음에 쏙 드신 모양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신한테 인정을 받으니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자네가 찾아온 이유라면……. 그것 때문이겠지?”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을 뒤져 나무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에 노인이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알록달록한 보석들이 들어있었다.
흑색 마나의 사이에 껴 있던 영혼의 파편들이었다.
그렇다.
내가 오늘 노인을 찾아온 이유는 데모스에게 흡수당한 영웅들을 깨우기 위함이었다.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아요. 그래도 그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아티로스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노인이 보석들을 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본인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아티로스는 이제 안전하다는 말도 하고 싶고. 또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하고 싶어서요.”
말을 마친 나는 잠자코 노인을 바라봤다.
“이미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는 건 순리에서 벗어날 일이라네.”
노인의 말에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나도 실현 가능성이 없는 부탁이라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굳이 노인을 찾아와 이런 부탁을 한 이유는 단순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나 혼자 생각하고, 또 판단해서 마음을 접는 것보다는 일단 시도라도 해보는 쪽이 마음이 후련했으니까.
“허나…….”
“네?”
“부활이 아닌 나의 사도로 삼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
“사도……요?”
“그래. 자네도 내 사도 아닌가?”
“아아.”
그랬지.
본의는 아니었지만, 지금의 나는 노인의 사도다.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제가 얼마나 민망한데요. 신전에 갈 때마다 진짜 쥐구멍으로 숨고 싶다니까요?”
신전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내 닉네임을 언급하면서 기도를 드리는 걸 듣고 있노라면, 차마 얼굴을 못 들겠더라.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래서 그 사도로 삼는다는 말씀은…….”
“자네의 생각대로라네. 단, 여기는 조건이 있다네.”
“조건이요?”
“자네는 이들과 만날 수 없다네.”
만날 수 없다라…….
“실망할 건 없다네. 아예 만날 수 없는 건 아니니까. 내 사도가 된 이상 그들도 밥값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인연이 된다면 마주칠 수 있을 게야.”
“아!”
그런 거였나.
“네. 이해했어요.”
노인은 대답 대신 보석을 꺼내 손바닥에 올리고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이윽고 노인의 손에서 옅은 빛이 흘러나오더니, 보석이 점점 커졌다.
번쩍!
부지불식간에 강렬한 빛이 터져나왔다.
“웃!”
이윽고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영혼의 파편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다 됐다네.”
“감사합니다.”
비록 인사를 나누지 못해서 아쉽긴 했지만, 노인의 말대로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만날 수 있겠지.
내가 감상에 빠져 있자니, 노인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러고 보니 말일세.”
“네?”
“자네가 만든 신상 말일세. 아무리 봐도 나랑은 닮은 구석이 없는 것 같아서 말이야.”
“아! 헤헤…….”
확실히 내가 그 신상을 만들 때 떠올렸던 건 이로나스 씨였으니까.
보아하니 노인도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도리아 아주머니가 말씀하시더라고요. 파메르의 신상을 다시 만들어야 할 것 같다고요.”
“호오.”
아마도 도리아 아주머니도 직접 노인을 만났으니, 실제와 다르다는 걸 알아차린 거겠지.
사실 파메르의 신상을 만드는 건 별로 어려운 게 아니다.
그냥 노인을 그대로 본떠 만들면 되니까.
“근데요……. 알렌의 신상도 만들어달라고 하시더라고요.”
내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노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이제 여기서 볼일은 끝난 겐가?”
“아, 그게요……. 실은 한 가지 부탁이 더 있는데…….”
내 말에 노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들을 찾고 싶은 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