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소년기(124) - #역전
도리아가 힘겹게 눈을 떴다. 멍한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은 그녀가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는?”
흐리멍덩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것은 새하얀 안개가 전부. 느닷없는 상황에 놀라기도 잠시.
애써 침착하자고 되뇌며, 차근차근 기억을 점검했다.
‘나는······. 그래, 남편이랑 함께 저녁을 먹었어.’
기억난다.
도리아는 분명히 남편과 함께 축제가 열린 곳을 돌아다녔다.
늦은 저녁임에도 활기가 넘치는 분위기에 새삼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으로 축제를 즐기던 중.
남편과 간단하게나마 요기를 면한 뒤, 늘 그렇듯 신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기도를 드렸었어.’
축제가 무사히 열렸다는 감사의 기도부터 시작하여, 앞으로도 이러한 행복이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간절함을 담아 파메르에게 기도를 올렸다.
그렇게 무아지경에 빠져 기도를 올리던 중이었다.
돌연 도리아는 정신이 눈앞이 빙글 도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사실 도리아는 괜찮다고 했지만, 늘 이것저것 신경 쓸 것이 많았다.
알게 모르게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기에 잠시 쉬면 괜찮으리라 생각하고 잠시 기도를 멈추려던 찰나.
정신이 아득해지더니 그대로 털썩 쓰러졌다.
후에 정신을 차렸을 땐 이렇듯 안개에 휩싸인 곳에서 눈을 떴다.
“음······.”
도리아가 침음을 흘렸다.
자신이 기도를 올리다가 정신을 잃었다는 것까지는 이해했다.
거기까진 괜찮다.
근데······.
눈을 떠보니 이런 듣도 보도 못한 장소였으니, 당혹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꿈······이겠지?’
초유의 사태를 설명할 수 있는 건 꿈이 유일.
문제는 이 꿈에서 어떻게 깨어나야 할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도리아가 심각한 얼굴로 안개를 쳐다보던 중이었다.
“음?”
돌연 안개가 후욱, 밀려나는 듯하더니 삽시간에 주변이 밝아졌다.
“어머······.”
도리아가 멍하니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게,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드넓은 초원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황금색으로 물든 초원이었다.
마을에서도 농사를 짓고 있기에, 도리아는 저 황금색 물결이 작물이라는 걸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쩜······.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을 수 있을까?’
시야를 가득 메운 황금물결을 보고 있노라면 괜스레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도리아를 놀라게 한 것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왕왕!
“어머?”
웬 자그마한 마수가 자신을 향해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있는 게 아닌가!
더군다나 지금 도리아에게 꼬리를 흔드는 마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마수였다.
‘귀여워라.’
마수라면 위험하다는 인식을 지닌 채 살아왔음에도 저 자그마한 마수를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꿈이니까······.’
물론 진짜로 꿈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았다.
그래도 도리아는 이것이 그저 꿈이겠거니,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왕왕!
재차 마수가 짖었고, 도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따라오라는 거니?”
왕왕!
신기하게도 마수는 도리아의 말을 알아듣는 듯했다. 이에 도리아가 조심스레 한 발 내딛자, 마수가 냉큼 앞서 나갔다.
그 기묘한 모습에 미소를 짓던 도리아가 마수를 따라 초원을 걸었다.
바스락, 바스락.
한 발, 한 발.
자신을 배려하듯 틈틈이 뒤쪽을 살피는 마수를 따라 부지런히 걷기를 10여 분.
마침내 도리아의 시선에 족히 수백 년을 살았으리라 짐작되는 거목이 들어왔다.
아울러 나무 밑에는 테이블이 있었고, 한 노인이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도리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노인이 자신을 이곳으로 불렀다는 것을 말이다.
조심조심, 노인의 앞에 당도한 도리아가 머뭇거리더니 용기를 내어 말문을 열었다.
“저······.”
무척이나 긴장한 듯 도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내 노인이 고개를 들고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허, 긴장할 것 없다네. 그래, 그대가 도리아로군.”
“네? 어떻게 제 이름을······.”
분명히 처음으로 만난 노인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자 도리아가 놀라며 반문했다.
“허헛,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올리지 않는가. 내 어찌 자네의 이름을 모르겠는가.”
“네? 기도······요?”
도리아가 깜짝 놀라 되묻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 설마······. 파메르 님?”
“그래, 내가 파메르라네.”
긍정하는 노인의 태도에 도리아가 휘청거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에 노인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땅속에서 나무가 솟아올라 도리아의 몸을 받았다.
“허어, 이거 괜히 나 때문에 놀란 것 같구만. 미안하네.”
파메르의 사과에 도리아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겨,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도리아가 차마 말을 잊지 못했다. 더불어 그녀의 눈가에 굵은 물방울이 맺히더니 그대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슬퍼서가 아닌 진심으로 기뻤기에 흐르는 눈물이었다.
파메르라 소개한 노인이 다시금 인자한 미소를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천천히 도리아의 곁으로 오더니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자네의 진심은 잘 알고 있다네. 마음 같아서는 진작 자네를 부르고 싶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란 말이지. 허허헛. 부디 이해해주길 바라네.”
마치 사랑스러운 손녀를 대하는 할아버지 같은 파메르의 말에 도리아가 눈가를 훔쳤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저는, 그저 파메르 님을 뵙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합니다.”
조금은 진정이 된 도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별말씀을요! 근데······. 저를 이곳으로 부르신 건······.”
도리아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녀도 눈치라는 게 있다.
파메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건 아니리라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음, 참으로 면목 없네만······. 내가 자네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부탁을 하나 하고 싶어서라네.”
“부탁······이요?”
“나에게는 친구가 한 명 있다네.”
“친구······.”
“음. 참으로 미련한 친구라네.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려고 하는 아주 미련한 친구야.”
미련한 친구.
듣기에 따라서는 욕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도리아는 알 수 있었다.
파메르는 그 미련한 친구를 욕보이려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아끼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 부탁이라는 것은······.”
“그래, 부디 내 친구를 도와줬으면 한다네.”
“제가······. 도울 수 있는 건가요?”
“물론이지. 아니, 자네가 아니라면 도울 수 없다네. 애당초 내가 이곳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자네뿐이거든.”
파메르.
도리아에게 있어서 파메르라는 존재는 그저 망상 속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파메르가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올렸다.
그랬기에 파메르는 도리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며, 꿈을 통해서나마 이곳으로 부를 수 있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
도리아의 질문에 파메르가 입을 열었다.
* * *
“후우······. 후우······.”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데모스를 쳐다봤다.
역시, 마왕은 마왕이라는 건가.
녀석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내 공격을 모조리 피해냈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여유를 보이며 나를 가지고 노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지쳤나 보군.”
데모스가 씨익, 웃으며 날 조롱했다.
“글쎄. 나는 아직 멀쩡한데? 오히려 너야말로 모든 공격이 빗나가던데. 그래서 마왕이라고 할 수 있겠어?”
내가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자, 데모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후후후. 그래, 인정하지. 네 녀석은 강하다. 비록 내 상태가 완전하지 않다고는 한들, 여기까지 버텼다는 건 칭찬해줄 일이지.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이다.”
말을 마친 데모스가 손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녀석의 주변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시커먼 낫이 생겨났다.
그 숫자가 어찌나 많았는지, 흡사 낮에서 밤으로 바뀐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여기까진가.
그동안 나도 한계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며, 아슬아슬하게나마 데모스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순수한 육체의 능력만으로는 모든 공격을 피할 수 없었던지라 지속적으로 갑옷을 생성시켜야만 했다.
그마저도 미처 피하지 못한 공격으로 인해 옷을 넝마가 되었고, 곳곳에는 자잘한 생채기로 가득했다.
더군다나 야금야금 백색 마나를 소모하면서 지금 내게 남은 양도 상당 부분 줄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꾸준하게 백색 마나가 채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이 느끼는 긍정적인 기운 때문이겠지.
다만 지금 내게 흡수되는 백색 마나의 양으로는 데모스의 공격을 막는 게 고작이라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이었다.
“어쩔 수 없나.”
데모스를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백색 마나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상태로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야 녀석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기란 요원했다.
정정한다.
녀석은 영혼이라서 체력이라는 게 없는지라, 이대로 시간을 끈다면 내가 먼저 지쳐서 나가떨어질 터.
“휴우.”
나는 뒷머리를 거칠게 긁으며 양손을 늘어트렸다.
“큭큭. 결국 포기한 건가?”
“포기는 무슨. 그냥 아까워서 그래.”
내 말투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음일까.
데모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깝다고? 그건 무슨 소리지?”
“아니 뭐······.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너를 이길 수가 없어. 좋다. 그건 인정하지. 근데······.”
나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너는 이게 뭔지 알고 그렇게 태연한 거냐?”
“그게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긴. 말 그대로야. 니가 지금 서 있는 곳. 여기가 어딘지 아느냐는 거야.”
“······.”
그제야 무언가가 잘못 돌아간다는 걸 깨달았는지, 데모스가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여긴······. 지상이 아니었군.”
“정답.”
내가 굳이 데모스를 아크니악에서 깨운 이유는 단순했다.
처음부터 나는 데모스를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쯤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무렴.
제아무리 내가 강한 육체를 타고났고, 거기다 이로나스 씨의 백색 마나가 있다고 한들.
상대는 엄연한 마왕이다.
게임으로 치자면 이제 막 튜토리얼을 끝낸 플레이어가 최종 보스에 도전하는 꼴.
그런데도 내가 데모스를 깨운 이유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그건 아크니악이었다.
아크니악의 가장 큰 능력이라면 역시나 게이트다. 그리고 이 게이트를 이용한다면 데모스를 머나먼 곳으로 보낼 수 있다.
그곳은 바로 차원의 틈이다.
이전에 나르비 씨가 말했던, 맹약이 깨진 뒤 본래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하는 정령이 도착하는 곳.
컴컴한 어둠만이 전부인 그 공간으로 보내버릴 예정이었다.
대신 이대로 아크니악을 버려야 한다는 게 단점이지만, 최소한 데모스라는 존재를 아티로스에서 추방시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나아가 이미 아크니악을 제작할 수 있는 방법은 알고 있었으니 시간만 있다면 똑같이 만들 자신도 있었고.
“뭘 어쩌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호락호락 당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글쎄. 호락호락 당하고 말고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거든. 뭐, 만나서 반가웠고. 다시는 보지 말······. 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