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소년기(123) - #결전
두근두근.
이런 게 살기라는 걸까.
데모스는 아무것도 하질 않았다.
그저 날 쳐다볼 뿐이다. 이렇다 할 감정을 드러내긴커녕 무슨 로봇처럼 무감정한 표정이다.
그럼에도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농담이 아니라 아주 예리한 칼로 내 살갗을 저미는 듯한 감각이었다.
아울러 마왕답게 그 위압감도 엄청났다.
꿀꺽.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침착하자.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했다.
아니, 이럴 때일수록 의연한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애써 쿵쾅거리는 심장을 어르고 달래며, 데모스를 마주 봤다.
그때, 데모스가 눈을 한 차례 깜빡였다. 아울러 무기질적인 얼굴 위로 한 가지 감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의문이었다.
혹시 내가 이렇게 쳐다보는 게 신기해서 그러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꾹 닫혀 있던 데모스의 입이 열렸다.
“너는······. 누구······. 지······?”
흡사 잠이 덜 깬 사람처럼 느릿느릿한 말투였는데, 꼭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울렸다.
“아이넬.”
“아이넬······. 네 녀석······. 불쾌한······. 냄새가······. 나는구나······.”
불쾌한 냄새라.
록시는 나더러 상냥한 냄새가 난다 했고, 요정의 왕인 나르비 씨도 반디의 냄새가 난다고 했었다.
어째 새롭게 만나는 인물마다 꼭 냄새를 언급하니, 기분이 참 묘하단 말이지.
이거 향수라도 뿌리고 다니든가 해야지 원.
“사돈 남 말하시네.”
데모스의 영혼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 건 아닐지언정 불쾌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돈 남 말······? 그건 무슨 말이지······?”
내가 무심코 한국말로 툭 내뱉자 데모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호오.
데모스는 처음에 비해서 말의 속도도 빨라지고, 한층 발음도 또렷해졌다.
역시나 이제 막 깨어나서 그런 거겠지.
“그건 알 바 없고.”
데모스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나는 템페스트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우우우우웅!
백색 마나를 머금은 템페스트가 거세게 진동하며, 내 전의를 불태웠다.
후우우.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빠르게 뱉었다.
나는 이제껏 그 누구랑 싸워본 적이 없다.
애당초 평화를 가장 중요시했거니와 대화로 푸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나 자신의 능력에 조금은 자신이 있기도 했고.
하지만 오늘 만난 상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상대거니와, 대화가 통하고 말고를 떠나 명백한 우리의 적이다.
괜히 시간을 끌어 회복할 시간을 주느니, 한시라도 빨리 소멸시키는 게 나으리라.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겁먹을 거 없다.
그 시기가 어찌 되었든, 어차피 나는 데모스와 마주쳐야만 할 운명이다.
아니,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
설령 그 끝이 죽음이라고 한들, 나는 데모스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부딪힐 수밖엔 없다.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이제 남은 것은 행동이었다.
나는 강하게 지면을 박찼다.
후왁!
순식간에 주변의 풍경이 스쳐지나며, 데모스가 부쩍 가까워졌다.
한계를 벗어난 동체시력에 집중력이 더해지자, 시간이 느리게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시시각각 변하는 데모스의 표정이 내 시야에 때려 박혔다.
흠칫.
부지불식간이었다.
시커먼 무언가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낫처럼 생겼는데, 그 색깔이 무척이나 까맸다.
어?
순간, 시커먼 낫이 사라졌다.
뭐야. 저걸로 날 공격하는 게 아닌······.
의문은 여기까지였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에 앞으로 나아가던 몸을 급히 세우며,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샥!
그와 동시에 무언가가 내 머리 위를 지나는 감각이 들었다.
그것이 내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는 걸 알리듯 내 머리칼 몇 올이 눈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뭐지?
내 머리카락을 자른 건 방금 내 시야에 잠깐 생겼다가 사라졌던 그 시커먼 낫이 확실하다.
하지만 정작 낫은 내 눈에 보이지 않았을뿐더러, 정작 내 뒤에서 날아왔다.
마치 낫이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내 공격에 방어하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보이지 않게끔 공격할 줄이야.
이건 진짜 성가시겠는데.
그나저나, 진짜 아슬아슬했다.
만약 내 반응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잘려 나가는 건 내 목이었으며, 떨어지는 건 머리카락이 아닌 머리였을 터.
심지어 데모스는 내가 기습적으로 달려들었음에도 놀란 기색은커녕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라는 거구만.”
역시 마왕은 마왕이라는 걸까.
호기롭게 달려든 것까진 좋았으나, 녀석에게 채 닿기도 전부터 기세가 한풀 꺾이는 느낌이다.
“너는 누구지?”
데모스가 물었다.
무척이나 평온한 말투였다.
“알 거 없다니까, 그러네.”
내가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데모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렴.
데모스는 마왕이다. 세상을 발아래 둘 정도로 강했으며, 어마어마한 추종자까지 있었으니 나의 이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겠지.
“건방진 놈이로구나. 흐음, 이 불쾌한 느낌은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호오, 그래. 기억이 나는군!”
데모스가 눈을 빛내더니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네 녀석, 날 봉인시켰던 그놈이로구나.”
세이비오르였던 이로나스 씨를 말하는 거겠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아니지.
마왕인 자신의 야망을 짓밟은 것도 모자라, 오랜 세월 동안 갇혀 지내게 만든 장본인이다.
데모스의 입장에서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인물이 이로나스 씨겠지.
“아닌데?”
“내 눈을 속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비록 네 놈의 모습을 달라졌을지라도, 주변에 넘실거리는 그 불쾌한 기운은 그놈과 똑같다.”
“거, 내가 아니라니까. 아무튼,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은 없으니까 바로 시작하자고.”
나는 데모스를 주시하는 한편, 백색 마나를 끌어올려 전신을 감쌌다.
이내 내 몸을 완전히 감싼 백색 마나가 마그테리움화化하며, 금세 멋들어진 갑옷의 형태로 변했다.
“노오오옴!”
내 모습을 본 데모스의 눈에서 불길이 뿜어졌다. 더불어 날 향한 살기도 강해졌다.
반응이 격하시네.
하기야.
내 몸을 감싼 갑옷은 데모스를 봉인하겠다고 결심했던 당시의 기억을 토대로 제작했으니까.
디자인은 조금 다를지언정, 데모스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기능을 모조리 때려 넣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이로나스 씨가 데모스와 전투를 치를 당시를 몇 번이고 곱씹으며, 몇 가지 기능을 더 추가했다.
달리 말해서 오롯이 데모스를 상대하기 위해 이로나스 씨가 고안하되, 차기 세이비오르인 내가 개량한 갑옷이다.
딱 한 가지 아쉬운 건 데모스에 대한 기억은 물론, 전투에 관련된 기억이 없다는 거다.
만약 그걸 알았더라면 저 시커먼 낫처럼 생긴 공격에 당황하지 않았어도 됐을 테니까.
뭐, 아쉬움은 아쉬움일 뿐이다. 내가 알든 모르든 데모스와 싸워 이겨, 완벽하게 소멸시켜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오늘도 놀아야 하거든? 그러니까, 빨리 끝내자고!”
나는 데모스가 분노를 뿜어내거나 말거나, 오늘도 열릴 축제를 상기하며 재차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데모스는 시커먼 낫을 생성시켰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럿이었다.
보아하니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이내 여러 개의 낫이 처음 공격했을 때처럼, 모습을 감추더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미 한 차례 겪어본 덕분인지, 크게 긴장되진 않았다.
아울러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나는 보았다.
낫들이 사라지던 순간 허공이 일그러지는 것을 말이다. 뒤이어 내 뒤쪽에서 서늘한 기운이 감각됐다.
온다!
나는 이를 꽉, 물었다.
퍼퍼퍼퍼펑!
이내 갑옷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들이닥쳤다. 마치 폭탄이 터진 듯 내 몸을 두드리는 충격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정신을 다잡으며, 휘청거리는 균형을 바로 세웠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데모스는 아크니악처럼 게이트를 열 수 있다.
정정한다.
단순히 게이트를 열고 닫는 수준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활용하며 공격과 방어에 쓸 수 있었다.
거기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이로나스 씨의 갑옷이라면 데모스의 공격을 능히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처음부터 이 갑옷을 입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백색 마나였다.
이 갑옷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백색 마나를 소모해야만 한다.
하물며 데모스의 공격을 방어하는 그 순간에도 막대한 백색 마나가 소모된다.
방금 데모스의 일격에 이미 내가 지닌 백색 마나의 20%는 날아갔으니 말 다 했지.
쉽게 말해서 백색 마나가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데모스의 공격을 막을 방도가 없어지는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죽음으로 이어지리라.
“그러니까, 여기서 끝내자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데모스의 지척까지 도달한 나는 백색 마나로 넘실거리는 템페스트를 휘둘렀다.
“노오오오옴!”
데모스가 분노로 똘똘 뭉친 악을 내지르며, 주먹을 뻗었다.
꽈르르르릉!
* * *
같은 시각.
밤새 진행되는 축제와 달리 마을은 몹시도 한적했다.
제아무리 축제가 즐겁다고는 한들 24시간 내내 놀 수는 없는 노릇.
이는 록시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록 체력 하나는 끝내주는 록시라지만, 요 며칠간 쉴 새 없이 놀았으니 지치지 않을 순 없었다.
본인의 방은 갈 생각이 없는지, 초저녁부터 아이넬의 방에서 뒹굴거리다가 잠든 록시가 돌연 눈을 번쩍 떴다.
“위험하다!”
혹시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걸까.
록시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빠르게 주변을 살펴봤다. 허둥지둥 방을 살펴보던 그녀의 시선이 침대로 향했다.
역시나 있어야 할 아이넬이 없었다.
록시의 다소 뜬금 없는 말과 행동에 루나가 옷장 문을 열었다.
루나 또한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아이넬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위험하다!”
두서 따윈 없는 말임에도 루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이넬이 위험한 거야?”
“위험하다! 빨리, 빨리!”
록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정작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발을 동동 구르더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루나를 쳐다봤다.
“위험하다. 대장이, 위험하다.”
록시의 말에 루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록시의 말이다. 그녀가 저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며, 지금까지의 경험상 빗나간 경우는 거의 없었다.
“루나, 루나. 대장이······.”
“기다려 봐.”
록시를 진정시킨 루나가 테이블 위에 놓인 무전기를 들었다.
“위즈. 여기는 루나······ 오바.”
-여기는 위즈. 루나, 무슨 일이야? 평소 안 하던 무전을 다 하고. 오바.
다행히도 위즈는 깨어있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 지금 마을에 있는 모든 비스테르를 모아줬으면 해. ······오바.”
루나의 무전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알았어. 지금 즉시 모든 비스테르를 소집할게. 장소는? 어디로 모이면 되는 거야? 오바.
난데없는 소집에 이유를 물을 법도 했으나, 위즈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녀 또한 루나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리라.
‘장소.’
루나가 고심하던 중이었다.
두 비스테르의 무전을 지켜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록시가 외쳤다.
“신전.”
“신전?”
“신전. 신전. 신전. 가야 한다.”
록시가 고장난 자동응답기처럼 신전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신전. 오바.”
-응. 그럼 그쪽으로 모두 모이게끔 무전을 보낼게.
이내 무전을 끝낸 루나가 록시의 팔을 잡았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