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소년기(122) - #데모스
축제의 개막일로부터 어느덧 3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당초 축제가 열릴 때 잡은 기간은 딱 3일이었다.
사실 이것도 길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처음으로 열리는 축제인 만큼 가능한 기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도리아 아주머니도 나도 일정 부분 동의하기도 했고.
근데, 막상 축제가 열리고 3일이 지난 오늘. 도리아 아주머니가 긴급회의를 소집하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축제 기간을 조금 더 늘리고 싶어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때요?”
요컨대, 축제가 워낙 성황이었거니와 모두가 즐거워하는 모습에 기간을 연장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비단 즐기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도리아 아주머니는 추가로 몇 가지 안건을 제시하셨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안건은 다른 종족들의 이주였다. 이전에 흘러가는 대화로나마 우리 마을에서 살고 싶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후로도 비슷한 이야기들을 곧잘 들었다.
나는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이주를 희망하여 도리아 아주머니를 찾아간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물론 이주 자체는 무척이나 간단하다.
다만 이주는 이주일 뿐, 정작 신경을 써야 할 건 그다음이다.
이곳은 지구가 아니다.
지구라면 으레 하는 출생신고는커녕 그 흔한 신분은 하나 없는 곳이다.
즉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종이 쪼가리 한 장 없다.
특정한 목적이라고 해야 할까.
쉽게 말해서 불순한 의도를 품고 마을로 입주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이를 사전에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건 비단 입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축제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 앞으로 우리 마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된다.
더불어 다른 마을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게 될 터.
셀리오스 씨가 왕으로 있는 아브륄만 해도 우리 마을과 깊은 관계를 맺기로 한 것처럼 말이다.
축제는 그 시발점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두 번째로는 규칙이었다.
이 또한 앞선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는데, 우리에게는 이렇다 할 법이라는 게 없다.
제아무리 가족이라도 곧잘 다투고 싸우곤 한다.
하물며 다른 종족이라면 어떨까?
내가 여러 종족들을 지켜본바.
정말로 죽이 잘 맞는 종족이 있는가 하면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불편하게 여기는 종족들도 있었다.
이들에게 어떠한 문제가 생겼을 때, 잘잘못을 가릴 방법도 제재를 가할 방법도 없다.
조금 강하게 말하자면, 무법지대 그 자체인 셈.
해서는 안 될 죄를 짓는다고 한들, 이를 벌할 수 있는 기준조차도 없었으니까.
입주 후에 어떤 일이 발생했을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준비할 게 많았다.
근데, 내가 또 누구인가.
아예 백지부터 시작하는 거라면 모를까. 나에게는 지구의 지식과 경험이 있다.
따라서 도리아 아주머니나 회의에 참석한 이들이 걱정하는 부분에 대한 해결책은 진작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손에 쥐고 있었다.
실제로도 내 나이 8살이 되었을 무렵부터는 대략적으로 틀을 잡아놓기도 했고.
그때, 머릿속으로나마 정리했던 걸 그대로 옮겨 적으면 그게 곧 법전이 되는 셈이다.
“법전이라니 좀 이상하긴 하네.”
다만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마따나.
지구의 법을 그대로 가져와 적용한다는 건 어불성설.
이곳에 맞게끔 적당하게 손을 볼 필요가 있었다.
더불어 처음부터 강한 규칙을 적용하느니, 상황을 보면서 차근차근 늘려가거나 조정하는 편이 모두에게 더 좋아 보이기도 했고.
“뭐, 법이라는 게 필요 없는 세상이 가장 좋긴 하지만 말이야.”
솔직히 지구에 사는 사람들에게 법이라는 건 일상이다.
그저 매너와 에티켓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뿐이지, 우리가 뭘 하든 법은 늘 곁에 있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것들을 따르면서 지내는 것이다.
가끔은 법이라는 것이 날 불편하게 만들고, 맞지 않는 옷처럼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렇다고 법을 없앤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생기거니와······따지고 보면 나도 법의 비호를 받으면서 살았다는 걸 자각하고 있기에 강한 불만을 품진 않는다.
“뭐, 이거야 차근차근 생각하기로 하고.”
몇몇 걱정하는 인원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축제 기간을 조금 더 늘리기로 했다.
“나도 조금 더 놀고 싶긴 하지만, 예정대로 진행하는 게 우선이겠지.”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던 나는 슬그머니 뒤쪽을 돌아봤다.
“그나저나, 밤인데도 밝긴 밝구나.”
시각은 얼추 새벽 3시쯤 됐을까.
본래라면 모두가 잠들어 있을 시간이다.
하지만 누가 축제 아니랄까 봐, 마을 전체가 환했다.
“예쁘네.”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도시의 한복판. 그것도 야경이 가장 아름답다는 서울의 밤거리를 보고 있다는 착각마저 일었다.
“조금 귀찮긴 해도 빨리 끝내는 게 낫겠지.”
그래.
저 환한 불빛이야말로 우리의 미래임과 동시에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앞길을 밝혀주는 등대다.
그랬기에 비로소 나에게는 반드시 마무리를 지어야 할 일이 있었다.
정정한다.
“운명이겠지.”
내 머릿속에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얼마 전 마주쳤던 노인이었다.
“파메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노인은 자신의 이름을 파메르라고 밝혔다.
물론 파메르라는 건 내가 만든 말이 아니다. 원래부터 이곳에 존재했던 명사 중 하나다.
이슬 혹은 사랑이라는 명사를 이름으로 사용하듯, 파메르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노인의 이름이 파메르고, 그 노인이 하필이면 축제에 왔고 나와 마주쳤다?
그것도 노인은 다양한 이름 중 하나가 파메르라고 밝혔으니, 따지고 보면 본명도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노인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누는 삶, 앞으로도 지켜보겠다고.
나는 이 모든 걸 우연으로 치부할 정도로 단순하지도, 눈치가 없지도 않았다.
단순한 심증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확신한다.
그 노인이야말로 나를 이곳에 환생시켜준 그 노인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왠지 속은 것 같은 느낌도 들긴 하네.”
내가 처음 이곳에 환생하고 난 뒤로 항상 머릿속에 몇 가지 의문을 품고 살았다.
노인이 왜 나를 환생시켰고, 하필이면 왜 이곳이었을까.
왜 나에게 이토록 강인한 육체와, 뛰어난 머리를 줬을까.
무엇보다.
왜 나의 기억을 지우지 않고 고스란히 남겼을까.
내가 속물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노인이 내게 원하는 게 있는 게 아닐까, 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물론 정말로 노인의 의도였는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와 노인이 그렸던 이 세계의 미래가 비슷하다는 건 확실했다.
짧게 한숨을 내쉰 나는 걸음을 멈췄다.
딱, 손가락을 튕기자 삽시간에 주변 풍경이 바뀌더니 내 앞에 정사각형의 구조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기는 내 키보다 약간 작았으며, 재질은 마그테리움이었다.
이 구조물의 정체는 다름 아닌 금고였다.
아니, 금고라면 돈이나 보석이 들어있어야겠지.
음.
그래, 위험물 보관함이라고 하면 적절하겠지.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물건.
데모스의 영혼이 담긴 마봉석이 들어있었다.
사실 말이 보관함이지 겉으로 봤을 땐 문을 열 수 있는 손잡이는커녕 이렇다 할 잠금장치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위험물 보관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인증이 완료되었습니다.
과거의 내가 꽤 좋아했던 연예인의 목소리가 들려와 무심코 웃어버렸다.
좋아서라기보다는 내가 생각해도 정말로 쓸데없는 기능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솔직히 목소리는 재미로 넣었을 뿐이지, 이 보관함은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쉽게 열 수 없게끔 제작했다.
특히 내가 아닌 누군가가 강제로 열려고 할 경우에는······.
“후회하겠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차마 내 입으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된다.
이런 내 시답잖은 생각과는 별개로 위험물 보관함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내 덜컥, 소리를 내며 잠금장치가 풀리며 안에 들어 있는 마봉석이 서서히 바깥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만난 바깥 공기가 반갑기라도 한 걸까.
마봉석에서 음험한 기운이 넘실거리며, 내 신경을 쿡쿡 찔렀대.
“그래, 그렇게 까부는 것도 오늘까지니까.”
무덤덤하게 중얼거린 나는 그대로 마봉석을 쥔 채 게이트를 열었다.
“아차!”
깜빡할 뻔했네.
나는 게이트로 들어가기 전 미리 만들어 둔 헬멧과 방호복을 착용했다.
“좋아.”
완벽하게 준비를 갖춘 나는 곧바로 게이트로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아크니악의 옥상에 도착했다. 그런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구체였다.
그렇다.
저 구체는 다름 아닌 달이었으며, 내가 지금 있는 위치는 상공.
그것도 지상에서 족히 수십 km는 떨어진 곳이었다.
방금까지 내가 발을 디디고 있던 지상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거, 이로나스 씨가 알면 진짜 화내겠지.”
그도 그럴 게, 내가 데모스와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로 결정한 곳이 바로 아크니악이었으니까.
잠시 주변 풍경을 지켜보며 마음을 추스르던 나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얼른 끝내고 축제나 즐기러 가야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크게 혼잣말을 지껄인 나는 아크니악의 내부로 들어갔다.
* * *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나는 고정대에 마봉석을 끼웠다. 그리고는 곧장 템페스트를 꺼내 그곳에 백색 마나를 불어넣었다.
템페스트가 우우우웅, 떨며 파란 마나를 머금었을 때보다 한층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흡!”
나는 힘차게 템페스트를 휘둘렀다.
후우우웅, 바람을 가르던 템페스트가 그대로 마봉석과 충돌했다.
콰르르르르릉!
처음 템페스트를 휘둘렀을 때처럼,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눈이 시릴 정도로 새하얀 빛이 아크니악 내부를 밝혔다.
마침내 나를 집어삼켰던 빛이 사라지며, 내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 앞에는 완전히 박살이 나다 못해 깨진 유리처럼 잘게 조각난 마봉석이 있었다.
그리고 마봉석의 위였다. 그곳에는 시커먼 무언가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데모스의 영혼이었다.
꿈틀꿈틀.
마봉석에서 빠져나온 데모스의 영혼이 기괴하게 꿀렁거리는가 싶더니, 서서히 사람의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크으으으으······.”
데모스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템페스트를 꽉 쥔 채 데모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마침내 데모스가 완전한 형태를 갖췄다.
커다란 뿔과 기다란 꼬리.
박쥐를 연상케 하는 날개와 피처럼 붉은 눈동자.
내가 비스테르를 구했을 당시, 동굴에서 어떠한 석상을 본 적이 있다.
그 석상이 데모스를 형상화한 거라는 것쯤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더불어 석상을 딱 봤을 때, 레비아 선생님이랑 꽤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데바와 데모스 사이에 연관이 있다는 걸 최근에서야 알게 됐다.
그러니까, 과거 데모스가 지상을 침략했을 당시 혼자가 아니었다.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함께 있었다.
데모스가 지닌 의미가 마왕이라면, 그들은 마왕을 따르는 마족쯤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마족의 피를 이어받은 자들이 바로 데바인 것이다.
마침내 완전한 형태를 갖춘 데모스가 시뻘건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더니, 나와 시선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