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IY천재의 힐링생활백서-130화 (128/159)

130. 소년기(112) - #반디의 정체

“뭐, 뭐지? 이 강대한 기운은······. 라, 라그나? 혹시 웰버른 님이 오신 건가?”

“아니, 라그나는 이런 느낌이 아니라고.”

웅성웅성.

에프렐들도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으며 혼란스러워했다.

그런 그들과는 별개로 나는 저 멀리서 날아오는 물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게······.

“반디?”

빛나는 물체.

그것은 다름 아닌 반디였으니까.

아까 장터에 도착했을 때 갑작스럽게 어딘가로 갔던 반디가 쏜살같이 날아오고 있었다.

평소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던 것과는 달리 잔상이 생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게다가 어디서 뭘 먹기라도 했는지, 반디의 크기가 조금 커진 상태였다.

따지고 보면 반디가 늘 밭으로 향하면서 그 몸집이 점차 커지고 있는 걸 느끼긴 했지만······저 정도로 급격하게 몸집이 불어난 적은 없었다.

신기한 점은 크기만이 아니었다.

후우웅!

“네놈 어딜 가는 거냐! 당장······. 뭐? 지금 내 명령을 무시하겠다는 거냐!”

“시, 실피? 갑자기 왜······.”

금방이라도 서로를 향해 불과 바람을 뿜어낼 듯, 맹렬한 기세를 뿜어내던 두 정령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나는 혹여나 반디를 공격하는 건가 싶어 백색 마나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정작 두 정령은 반디를 공격하긴커녕 그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아······. 저, 정말로 이곳에 계셨었군요!”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 나르비 씨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떨리는 목소리에는 환희마저 감돌고 있었다.

아울러 나르비 씨의 눈에는 반디가 보인다는 게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곳에 계셨군요······라는 건.”

내 중얼거림을 들은 나르비 씨가 감격에 찬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저분이야말로 정령의 왕입니다.”

“그, 그게 진짠가요?”

나는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그도 그럴 게, 반디가 정령의 왕이라니······.

그럼 저 두 정령도 반디가 왕이라는 걸 알기에 저런 행동을 취했던 걸까.

하물며 저 두 정령을 부른 이들은 따로 있다.

특히 니엘 씨의 경우는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정령에게 몹시도 화가 난 듯, 온갖 악담을 퍼붓고 있었다.

“일개 정령 주제에 내 명령을 무시하다니······. 정녕 소멸이 되고 싶은 거냐!”

심지어 돌아오지 않으면 소멸을 시키겠다는 무시무시한 협박까지 해댔다.

그런데도 정작 정령은 니엘 씨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롯이 반디의 곁에만 머물렀다.

“아이넬 님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동안 모르고 계셨던 거군요.”

나르비 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솔직히 조금 아니, 엄청 놀랐어요.”

아무렴.

나랑 반디랑 함께 지낸 지 10년.

이제 곧 11년이 된다.

강산이 변할 세월을 함께했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반디의 정체를 몰랐다.

물론 나도 나름 반디에 대해 생각하면서 몇 가지 떠올렸던 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소문으로만 들었던 정령이었다.

실제로도 레비아 선생님이 알려주신 정령의 특징과 무척이나 흡사한 점이 있기도 했고.

그래 봐야 내 추측일 뿐, 그냥 아예 짐작조차 하질 못했다고 보는 편이 옳으리라.

근데, 다짜고짜 정령의 왕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충격을 받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호롱!

이런 내 놀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정령의 환대를 깔끔하게 무시한 반디가 살포시 내 머리 위에 앉았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꼭 산책을 끝내고 돌아와 지친 몸을 달래는 강아지를 보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반디가 정령의 왕이고 말고가 무어 그리 중요할까. 내게 있어서 반디는 처음으로 사귄 친구이자, 앞으로도 쭉 인생을 함께할 동반자다.

거기다 반디가 속이려고 속인 것도 아니었을 테니까.

“이제라도 알았으니까 됐지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가장 친한 친구가 알고 보니 정령의 왕이었더라,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가면 되겠지.

그러나 이건 내 생각일 뿐이지, 나르비 씨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령의 왕이시여,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녀는 정말로 상전을 만난 신하라도 된 듯, 몹시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반디는 그런 나르비 씨의 인사에도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요정이라면 반디랑 대화를 나눌 수 있건 아닐까, 하고 내심 기대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던 건가.

“혹시 아이넬 님은 이분······.”

“반디요.”

“반디?”

“네. 이름이요. 반디라고 이름 붙였어요.”

내 말에 나르비 씨가 황당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하기야.

명색이 정령의 왕이다. 나르비 씨의 입장에서 보자면 왕에게 이름을 지어준 꼴이었으니, 황당하기도 하겠지.

“반디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더라고요.”

내가 웃으며 반디를 톡, 건드렸다. 그러자 녀석이 특유의 싱그러운 소리를 내며 은은한 빛을 뿜어냈다.

호롱!

“그쵸?”

“아! 그럼 그······반디 님과 맹약을 맺으신 건가요?”

“아뇨. 솔직히 저는 반디가 정령이라는 것도 이제 알았거든요. 그 맹약이라는 게 뭔지도 몰라요.”

“아······. 그랬던 거군요.”

“네. 근데, 그 맹약이라는 건······. 일종의 계약 같은 거죠?”

아직도 씩씩거리며 정령에게 온갖 저주를 퍼붓고 있는 니엘 씨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정령이 명령을 따르는 쪽이라는 건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즉 나르비 씨가 말한 맹약으로 말미암아 갑과 을의 관계가 성립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네. 비슷한 의미는 맞아요. 하지만 맹약과 계약에는 큰 차이가 있어요.”

“큰 차이요?”

“네. 맹약이란 곧 서로의 존재를 하나로 묶는다는 것. 따라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맹약으로 맺어진 약속을 깨게 될 경우, 그에 따른 벌을 받게 돼요.”

“벌이요?”

“추방. 정령은 아티로스에서 강제로 추방을 당해요.”

잠깐만.

아까 내가 듣기로 정령은 페아로스라는 곳에서 왔다고 했지.

“지금은 그 문이 닫혔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문이 닫혔는데, 아티로스에서 추방을 당하게 되면······.”

내 말이 채 끝을 맺기도 전이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나르비 씨를 보며 페아로스로 돌아가는 건가요, 라는 뒷말을 삼켰다.

”아티로스도, 페아로스도 아닌······. 그저 아무것도 없는 암흑을 떠돌게 돼요.“

아무것도 없는 암흑을 떠돈다니.

지구로 치자면 망망대해. 아니, 그보다는 우주에 홀로 내던져지는 것과 비슷한 감각인 걸까.

”상상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네요.“

”저도 같은 생각이랍니다. 그래서예요. 지금 아티로스에 남은 정령들은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나르비 씨가 무어라 설명을 이어가려던 찰나였다.

“그렇게 나오겠다면, 좋다. 오늘부터 나, 니엘은 불의 정령인 이그니와의 맹약을 깨겠노라! 아티로스에서 너의 존재는 지워질 것이며, 영원한 어둠을 떠돌게 될 것이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니엘 씨의 외침에 나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맹약을 깨겠다고?

그럼 저 이그니라고 불린 정령은······.

당황한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멈추세요! 니엘,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그만하세요! 맹약은 그렇게 함부로 깨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나르비 씨는 물론, 조용하게 서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리니아 씨가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혔는지, 니엘 씨는 그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정령을 쏘아보며 맹약을 파기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어······?”

니엘 씨와 이그니의 사이에 얇고 기다란 녹색 선이 생겨났다.

저거다.

저 녹색 선이야말로 둘 사이에 연결된 맹약이라는 걸 직감했다.

나는 재빨리 다리를 박찼다.

그리고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팽팽해진 녹색 선을 향해 손을 뻗었다.

툭!

기어코 선이 끊어졌고, 나는 있는 힘껏 손을 내밀어 끊어진 녹색 선을 붙잡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걸 잡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딱 여기까지였다.

녹색 선은 점점 그 얇아지며 자꾸만 내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아울러 이그니 또한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두면 이그니는 아티로스도 아닌, 페아로스도 아닌 공간을 떠돌아야만 할 터.

대체 이걸 어떻게 해야······.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방법을 강구하던 중이었다. 머리 위에 있던 반디가 살포시 내 앞으로 오더니, 그대로 내 손등에 앉았다.

그와 동시에 얇아졌던 선이 밝은 빛을 뿜어내더니 그대로 반디의 몸에 착, 달라붙었다.

더불어 흐릿해지던 이그니 또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정정한다.

니엘 씨에게 소환됐을 당시보다 더 붉고 활활 타오르며, 한층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냈다.

호롱!

이제는 괜찮다는 듯한 반디의 행동에 조심스레 손을 놓았다.

그러자 녹색 선이 차츰차츰 사라지며, 이윽고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뭐, 뭐야? 어째서······. 어째서 추방당하지 않은 거지?”

일련의 사태가 이해되질 않는지, 멀거니 이그니를 쳐다보던 니엘 씨가 중얼거렸다.

분명히 맹약이 깨졌음에도 추방당하긴커녕, 멀쩡하게 남아 있었으니 당황한 것이다.

“나, 나르비! 맹약이······. 맹약이 깨졌는데도, 이그니가······!”

“이게 어떻게 된······. 분명히 맹약은 깨졌는데, 어떻게 추방되지 않은 거죠?”

엘리니아 씨와 나르비 씨 또한 멀쩡한 아니, 아니 오히려 더욱더 강력한 기운을 뽐내는 이그니를 보며 놀라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반디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 정령의 왕이라더니, 이런 능력도 있었구나.”

괜스레 뿌듯해진 나는 손가락으로 반디를 콕콕 찔렀다.

호롱!

내 장난에 반디가 내 뺨에 달라붙어 간지럼을 태웠다.

야야, 그건 반칙이잖아.

“네?”

이런 내 혼잣말에 나르비 씨가 의뭉스럽게 쳐다봤다.

방금 나와 반디가 했던 걸 보지 못한 건가?

반디가 보이기에 녹색 선도 보이는 줄 알았는데.

보아하니 이 녹색 선은 나한테만 보이는 모양이다.

뭐, 나한테만 보이는 거라면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어, 음······. 그러니까, 반디가 정령의 왕이라고 하셨잖아요.”

“네.”

“반디는 맹약이 깨진 정령을 이곳에 머무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닐까요?”

“아! 그런 거였군요!”

나도 그냥 그럴 것 같았다는 말이었는데, 나르비 씨는 그것이 진실이라도 믿는 듯했다.

“이익······. 다들 뭐 하는 거냐! 당장 나르비와 저 수상한 자를 포획해라!”

니엘 씨가 외쳤다.

하지만 니엘 씨의 외침에도 선뜻 나서는 에프렐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자유의 몸이 된 이그니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뿜어내며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으니까.

이런 걸 더러 상황이 역전됐다고들 하는 거겠지.

“니엘. 아직은 제가 잡혀갈 때가 아닌가 봐요. 분하겠지만, 오늘은 이대로 돌아가세요.”

나르비 씨의 말에 니엘 씨가 주먹을 쥐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니엘 씨 또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는지, 결국 모두에게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오늘의 수모는 잊지 않겠다.”

“저도 오늘을 잊지 못할 거예요. 아, 그리고······. 웰버른한테 전해주세요, 조만간 진실을 들으러 가겠다고.”

나르비 씨의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를 포위하고 있던 에프렐들이 장터를 떠났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엘리니아 씨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 * *

“휴우, 이걸로 끝인가.”

당초의 목적이었던 초대장 돌리기를 끝낸 나는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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